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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를담다 Oct 08. 2022

'엄마'라 불리는 여자

엄마 역할의 모호함 견디기(feat. 아이.신랑)


무엇보다 나를 위해 산다는 대명제를 세우라고.

나의 자식, 나의 남편 앞에 '나'라는 한 음절이 붙는 건,

내가 존재해야 자식도 남편도 있다는 뜻이라고.

내가 없어지면 나의 우주도 멸망한다고.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장명숙/김영사>


전전긍긍하며 큰아이를 키운 지 어느덧 9년이 훌쩍 지났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첫'아이라는 황송한 이름을 붙여 애를 태우며 시간을 보냈고 태어난 후로는 한시도 편한 잠을 자본적이 없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분주하게 키웠던 것 같다. 아이는 세상 밖을 나오자마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나의 인내심을 테스트했고 육아를 함에 있어 '나만이 겪었던 고유한 감정'을 아이의 마음과 동일시하다 보니 주관적이고 까다로운  성향까지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그 비위를 맞추느라 하루도 바람 잘날 이 없었다. 그렇게 영원할 것만 같은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 가만히 누워만 있던 아기가 걸음마를 하기 시작하고, 기저귀를 떼더니, 어린이집도 가고 초등학교에 입학도 했다. 아이가 커갈수록 육체는 수월해졌으나 머릿속은 더없이 복잡해져만 갔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엄마의 삶이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매번, 매 순간 가늠할 수 없는 다른 상황의 육아가 늘 내 눈앞에 펼쳐졌다. 아마 아이도 이런 엄마가 처음이겠지만 나도 '9살 아이를 키우는 주부 엄마'는 처음이다 보니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며 못살게 굴었다.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던 나는 두 번의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는 동안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패기와 자신감은 사라졌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조심성만 늘어났다. 나 개인보다는 나 이외의 가족을 신경 쓰고 챙겨야만 했고 아이를 데리고 다닐 때는 '정情'이라는 명목을 내세우며 일면식도 없는 이들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타인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아이는 태어난 뒤 내가 잊지는 않았는지 되묻듯 매 순간마다 자신이 나와는 다른 타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내가 들인 노력에 비해 기대했던 결과가 보란 듯자주 어긋났다. 나의 삶의 원동력과도 같았던 '기대'라는 의미를 바꾸어주는데 크게 한몫을 한 뒤부터 한 계절이 바뀌어 갈 때마다 여봐란듯이 자기주장을 펼치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나에겐 매번 새로운 형태의 과제들이 주어졌다. 모든 게 처음인 나는 내역량을 가늠하기에 앞서 '집에 있는 엄마'라는 사회보편적인 이미지를 떠올려 아이의 가드라인 역할을 해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에 가슴이 무거워졌다. 아이에게 강요하는 부모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공부의 선, 친구관계의 선, 학교생활의 선의 개입 여부를 두고 아이보다 내가 더 헷갈려하기 시작했다. 육아에 대한 중심이 흔들리자 굳건했던 마음은 이내 흐트러져 버렸고 눈앞에 마주하는 상황들의 대처도 애매해져 버렸다. 나와 아이에게 당장 큰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불안함과 초조함과 두려움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나를 초조한 불함 속에 갇히게 만들었는지 선뜻 답을 내기도 어려웠다.




역할. 역할의 꽃, 엄마역할, 역시 '역할'은 생각을 요구하지 않는다. 영혼없이도 가능하다. 현관에 들어서면 나는 엄마가 되어 기차가 레일을 지나가듯 현관에서 부엌으로, 부엌에서 식탁으로, 식탁에서 냉장고로 자동왕복하는 거다. 사고하지 않아도 그냥 습관대로 하던대로 막힘없이 수행한다. 이런 걸 무슨 숭고한 모성이라고 하겠는가 자기 손에 물 묻히기 싫은 사람들이 지어낸 말일 뿐. 누추하고 번거로운 집안일이다. 내가 엄마라는 사실이 싫은 건 아니다. 엄마 역할로 주어지는 과다한 몫들이 싫다. 엄마 역할을 하는 동안은 내가 나같지 않다. 그냥 밥순이, 그냥 아줌마다.

<싸울때마다 투명해진다/은유/ 서해문집>


아이를 낳고 일을 하지 않은 주부로 지낸 지 10여 년이 흘렀다. 일을 하지 않으므로 편한 점도 있지만 고충도 많은 편이다. 자칫하면 타인의 눈에 노는 여자로 비치기 쉽기도 하고 아이를 데리고 외출을 했다가 실수라도 하게 되면 맘충 소리를 들을까 상점에 들어가는 일을 망설이기도 할만큼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는것이 일상이 되었다. 집안일은 어떤가 뭐든 노력을 들인것 보다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이 대부분이다. 아무리 쓸고 닦고 헤집어 정리를 해도 크게 표가 나지 않을뿐더러 아이가 가방을 내려놓는 순간 치우기 전보다 더 어질러지기 일쑤라 '내가 몇 시간 동안 뭘 한 거지?'싶기도 하는 일이 다반사다. 잔손이 가는 일은 참 많고, 집안 대소사나 나 이외의 아이와 신랑과 관련된 주변 사람을 챙기는 일이나, 떨어져 버린 혹은 곧 필요한 생필품 구입, 계절별로 챙겨 입힐 옷, 매일매일의 식단과 장보기, 공과금, 학교 행사, 등하교 시간과 학원시간 조율, 학교 숙제, 공부, 준비물 다음날 입고 갈 옷 챙기기, 청소, 빨래, 설거지, 식사 준비, 간식 준비까지 하루 종일 해내야 할 일정들로 머릿속은 늘 빽빽하다. 집에 있는 주부는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으므로 중간중간 돌발상황이 생기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자칫 잘못하다 말끝에 '집에서 놀면서 뭐하냐'는 소리를 듣게 될까 봐. 왠지 내가 욕을 먹으면 아이를 욕 먹이는 것만 같은 기분은 오로지 나만 느끼는 감정일까.


밤이 되어 아이를 재운다고 엄마의 일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밤새 추운지 더운지 살피며 이불을 덮어줘야 하고 보일러를 껏다켰다. 선풍기를 틀었다 말았다 한다. 자는 동안에도 (간절기라) 열은 나지 않는지. 아이의 몸을  더듬어보고 기침소리 한 번에도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기도 한다. 이처럼 자는 동안에도 또다시 몸과 머리가 쉬지 않고 일을 한다. 결혼해서 어쩌다 애를 둘이나 낳고 키우고 있긴 하지만 나도 이 모든 게 처음인, 아직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 더 많은 어리벙벙한 여자 사람일 뿐이라 아이가 커갈수록 내 역량에 비해 주어진 일이 버겁다고 느껴질 때가 많이 있다. 우리 집에는 어지르는 사람이 따로(?) 있지만 집안이 어지러워지면 금방 치우지 않은 내 탓인 것만 같고 애가 말을 안 들어도 잘(?) 가르치지 못한 내 탓인 것만 같고, 신랑이 일을 하느라 힘들어해도 돈을 벌지 못하는 내 탓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미디어와 주변 사람들과 어른들이 기대하는 것들은 넘쳐나지만 이걸 어쩌나. 나는 내 역할에 대한 쓰임을 늘 고민하고 밥값 못하는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숨 막히는 생활을 살아내며 견디는 여자 사람일 뿐인걸.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내가 가계경제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에겐 큰 치명타인 것 같다. 삶을 꾸려나가는 데 있어 돈은 꼭 필요하므로. 돈을 벌지 않는 내 발목을 매번 잡고 늘어진다. 그래서일까. 잠깐의 독서도, 잠깐의 낮잠도, 왠지 눈치가 보이고 주눅이 든다. 주부로 꽤 오랜 시간을 지내다 보니 집에서 노는 여자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놀지 않고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하듯 살아가고 있다. 시어머니도 말끝마다 '너는 집에서 노니까'라며 다양한 일을 요구하셨고, 신랑이 아이와 시간을 가지는 모습을 보는 어른들은 엄마는 뭐하고 아빠가 일까지 하고 와서는 애를 보게 하느냐고 하시고, 친정 엄마조차도 매일 '정서방 잠 좀 재워라'는 말을 밥먹듯이 하시니 이쪽저쪽 눈치 보고 살다가 머리와 몸이 산산조각이 날 것만 같았다. 병원에서 만난 큰아이 친구 엄마조차도 소풍에 따라갔더니 어떤 아이 엄마가 편의점 도시락을 싸주더라며 나를 앉혀 놓고 험담을 하기도 했다. 아이의 친구 엄마는 새벽같이 일어나 아이를 위해 정성껏 싸준 도시락을 통해 본인의 우월함을 내세우는 동시에 나에게도 그러면 안 된다는 경고를 날리는 것 같아 또다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도시락을 싸주지 않는다고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그 엄마에게 '사정이 있었겠지' 혹은 '그 아이 엄마도 그런 보살핌을 받아보지 않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을 낼 수는 없을까? 우린 한배를 탄 사람들이나 다름이 없는데 서로를 헐뜯고 비교하며 나를 내세우기보다는 '이해'를 해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들이 먼저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낸다면 우리를 보며 자라는 나의 아이들도 좋은 영향을 받아 서로 돕고 이해하는 사회가 될 수 있을텐데 싶었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보듬어주고 이해를 해주어야겠지.)   


위처럼 엄마들은 죽어라고 해도 항상 죄인이 된다는 것을 현장에서 끊임없이 느끼고 있다. 엄마는 뭘 해도 애한테는 죄인이 된다. 쉬지 못하고 일해도 정서적으로 못해주면 그것도 죄고 상담을 받으면 결론은 뭐든 엄마가 잘해야 된단다. 항상 아이는 문제가 없고 엄마가 캐치를 못했거나 변해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아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이 든다. 집안의 소소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빼앗는 일인지. 애들을 학교에 보내 놓고 오롯이 혼자서 해내야만 하는 자잘한 일에 투여되는 시간과 에너지의 소모는 내가 개인적인 일에 시간을 빼낼 수 없을 만큼 속절없이 흘러가버린다는 사실을 알아주는 이가 드물다는 사실이 속상하기만 하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따져봐도 돌봄 노동은 모든 생산적(경제적) 노동을 뒷받침하는 '기반 노동'이다. 모든 사람은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와 쾌적한 환경에서 쉬어야 하고, 먹어야 하고, 자야 한다. 일상생활이 영위되기 위해서는 요리, 청소, 빨래, 설거지, 장보기가 되어야 다. 각종 공과금도 내야 하고, 가족 중 누가 아프면 돌봐야 하고, 집안 대소사도 챙겨야 한다. 이런 돌봄 노동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생산적 노동은 '올스톱' 될 것이다.


사회에서 남자를 노동자로 부릴 때는 대개 가정을 부양할 수 있을 만큼의 임금을 줘야 한다는 묵계가 있다. 그런데 이 '가정을 부양할 수 있을 만큼의 임금'이라는 말이 기만적이다. 그것은 남성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시혜와 배려를 강조한다. 임금 최소화를 비롯해 경제적 이익 추구가 유일한 목적인 기업이 남성 노동자에게 좀 더 많은 임금을 줄 때는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한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아내의 돌봄 노동에 대한 대가'다. 남성 노동자의 임금에는 아내의 돌봄 노동에 대한 대가가 포함되어 있다. 남성의 경제권력은 아내의 돌봄 노동에서 나온다. 아내 돌봄 노동이 없다면 남성은 지금처럼 회사에 나가 일에 집중하는 자체가 힘들어질 것이고 일하지 못하면 가정에서 남성의 경제 권력은 성립할 수 없다. 경제적 폭력을 당하는 아내는 돌봄 노동을 통해 남편의 경제 권력 성립에 이바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오히려 억압당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박민영/ 북 트리거>


"엄마의 역할은 죽어야만 끝이 난다"라고 한다. 정말 무시무시한 말이다. 직장처럼 퇴근이 없으니 직장에서 24시간을 사는 거나 다름이 없지만 사회가 원하는 대로 묵묵히 역할을 수행해 나가다 보면 엄마에겐 잠깐의 쉼도 사치고, 낭비로 변질된 것 같아 서글퍼진다. 아이가 곁에 있든 없든 머릿속은 끊임없이 많은 일들을 수행해 내기 위해 복잡한데 도대체가 외부로는 증명해 낼 수 없는 이 직업의 모호함에 회의감이 생겼다.(그래서 엄마들이 아이를 통해, 신랑을 통해 스스로를 증명하다 좋지 않은 결과를 낳나 보다.) 문득 주부가 되면서부터 나도 모르게 나의 가치를 내가 아닌 아이와. 남편. 집안일로 옭아매고 있었다는 사실을 글을 쓰면서 진심으로 깨닫게 되었다.


모르면 몰라도 이 사실을 알아버린 나로서는 타인이 뭐라고 하든 간에 적어도 나만은 내 노동력을 정당화시키려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멀리 돌아갈 필요도 없이 조금은 다른 각도로(시각으로) 바라보면 노동력을 운운할 필요조차 없기도 하지만 모든 가치가 돈으로만 매겨지는 삶을 살고 있기에 겉으로 보이는 현실보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나를 이해해주고 싶기도 하다. 오늘 같은날은 애를 쓰더라도 나를 한번 안아줘야겠다 싶은 마음이 간절해 진다. 우리는 이미 세상에 나올 때부터 이러이러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사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인간 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나만의 중심이 단단해야만 아이에게도 좋은 기운을 전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그것이 흘러넘쳐 신랑과 가족에게 전해지고 그 기운이 신랑이 만나는 사람들과 우리 아이들이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전해져 또 다른 이들에게 좋은 기운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좋은 기운을 받은 사람 중 열린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아내나 남편, 그리고 아이에게 더 나아가 또 다른 이들에게 전해줄 것이라는 단단한 믿음과도 같은 거다. 예상치 못하게 타인에게 받은 친절함과 배려 같은 작은 호의에 감동을 하면 나 또한 잊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전해 준 것처럼 이렇게 우주는 연결되어있고 타인이 나이고 내가 타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글을 쓰며 내가 나의 일을 경제적인 측면을 따지며 하찮게 생각하고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 인간적인 권리를 엄마와 주부라는 막연한 이름으로 모성애와 가족애를 강요당한 것은 아닌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의 내면으로 거르며 균형을 맞춰 내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해야 된다니까 곧이곧대로 믿고 따라준 것은 아닌지 나에게 한번 더 물어봐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를 조금은 더 가치 있게 여기며 내 삶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스스로 나만의 권리를 찾아야만 내 아이들도 그 어떤 삶이 주어져 살아내더라도 그 안에서 자신의 삶과 권리를 찾을 수 있을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부터 그렇게 해보자' 이렇게 결심한 순간 아이를 바라보는 시각이 한결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다 같이 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므로 엄마인 내 인생 하나만을 놓고 논한다면 모순일 것이다. 나도 나지만 먼저 내 아이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정하며 함께 상의하며 앞으로의 인생도 함께 설계해야 할 것이다. 다만 너의 삶만큼 엄마의 삶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물론 아빠의 삶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삶과 가족의 삶의 사이의 균형을 맞추도록 노력하다 보면 아이. 신랑. 엄마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게 되어 이기적이거나 죄책감이 생기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같다. 가족들이 다양한 생각을 주고 받고 지내다 보면 아이가 잘못되더라도 집에 있는 엄마 탓만이 아니며 아이가 잘되더라도 집에 있던 엄마의 덕도 아니라는 것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가족중 누군가 한 사람만이 그 역할을 다 해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가족 모두 함께 하고, 각자 할수있는 일은 각자가 해내며,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것은 다 함께 누리는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진 가족이 건강한 가족이 아닐까?


가족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기질과 성향, 단점과 장점들이 구성원끼리 덜 부딪히고 장점은 배가 되도록 그리고 부딪히더라도 덜 다치는 방향으로 서로가 완급 조절해나가며 함께 노력해나가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워나간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개인적인 일을 할 때 느끼는 죄의식 같은 감정은 버려야만 할 것이다.

사실 가끔씩 주고받는 따뜻한 말 한마디만으로도 내 아이와 신랑에게서 사랑의 기운이 넘쳐흘러나오는 것을 느낄때마다 집에 있기를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때도 많다. 혼자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하고 있었지만 주부로서의 나란 존재는 이미 우리 가족들 사이를 단단하게 묶어줄 매듭의 역할로서 충분했던 것이었다. 이것이 <미움받을 용기>에서 나오는 '타자공헌'이 아닐까."그래. 앞으로 내가 걱정할 것은 아이의 미래가 아닌 내 인생이다."


엄마에게 모성애가 좀 없으면 어떠랴. 아이를 해하지 않고 나쁜 것을 주지 않으려는 노력 정도면 이미 충분하지 않을까? 아이를 내 뱃속에서 낳았기 때문에 일정 부분 타고난 것은 분명 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엄마가 되고 나서 느끼는 모성애라는 것은 타고난 엄마의 고유의 영역이라기보다 언론이 만들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믿게 된 주변인들이 엄마에게 씌우는 프레임과 같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인 듯하다. 지금 내가 행하고 있는 아이를 위한 이 모든 행동들도 과연 순수하게 불리어지는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행하고 있는 행동이라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렇지 않다. 매체. 주변. 친구. 부모. 형제. 자매. 웃어른. 이웃 어른. 어린 시절 환경. 등 얼기설기 얽혀있는 상황 속에서 내가 잘 해내는 것을 보여주려고, 그들이 바라고 세상에 보이는 역할들을 잘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타인에게 욕먹지 않기 위해 눈치껏 응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내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엄마도 어느 날은 아이가 몸서리치게 싫고 미울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모성애라는 애매모호한 끝없는 잣대를 들이대며 '엄마가 뭐 저래'라는 사람들의 말은 듣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나도 엄마이기 이전에 아이였고, 결혼 전에는 상큼했던 아가씨였고, 짝을 만나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그냥 여자 사람일 뿐이다. 39년을 살아오면서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아이가 있기에 주어진대로 응당 할 일을 묵묵히 잘 해려는 평범한 한 인간일 뿐이다.

"마흔 살의 여자란 없어. 20년 경력의 20살 여자가 있을 뿐이지!"

책 속의 한 줄이 내 마음을 울컥하게 한다.


글을 쓰며 스스로에게 숙제를 내어본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내가 아닌 내 아이의 모습으로만 살지 않기를.

가족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이며 각자 구성원들의 모습을 존중하며 그 속에서 나도 나다운 삶을 살자고.


세상에 모든 엄마들.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우리 스스로를 끊임없이 증명하며 살지 않도록 해요.

그 자리에서 엄마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부모가 항상 완전해야 할 필요는 없다. 아이가 부르면 대부분 달려오지만 하던 일을 마치고 오느라 늦을 때도 있고 그런 건 안된다고 거절할 때도 있으며 피곤해서 아이의 말을 듣지도 못할 때조차 있다. 무한한 신뢰, 결함 없는 희생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 때로는 이런 자각이 아이를 고통스럽게 할 수 있지만 그 고통을 딛고 일어나야 아이는 비로소 역동적이지만 불완전한 세상에 대한 이해의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된다.

<영혼이 강한 아이로 키워라/조선미/ 쌤앤파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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