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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나래 Dec 10. 2018

삿포로에서 열심히 살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여기서에서는 보다시피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면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단다. 어딘가 다른 곳에 가고 싶다면, 최소한 두 배는 더 빨리 뛰어야만 해.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이 앨리스에게 하는 대사다. 거울 나라에서 앨리스는 한참을 아무리 빨리 달려도 주변 풍경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결국 앨리스는 자신이 뛰는 속도만큼 주변도 뛰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 상황에서 어딘가로 이동하고자 한다면 그저 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주변이 뛰는 속도보다도 더 빨리 달려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 시대의 삶이라는 게 마치 거울나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두 분명 열심히 살고 있는데, 한다고 했는데, 시대를 따라잡는 것만 해도 벅차다. 나는 분명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시간을 돌이켜 회상해보니 이룬 것이 없다. 스크린에 비치는 젊은 나이에 성공한 연예인들, 수억을 번다는 유튜버들, 20대 나이에 창업해 백만장자가 되었다는 성공 스토리를 보면 왜 나는 저렇게 하지 못했나 자괴감이 든다.



나는 (시대가 만든) 열정 만수르

나는 사실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로 돈을 허투루 쓰는 것만큼이나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것이 아까운 사람이다. 퇴근 후 저녁시간과 주말이 아까워서 최근 1, 2년간 많은 것을 시도했다. 개발도 배워보고 중국어 학원도 다녀보고 헬스장도 다니고 러닝도 하고 춤도 배웠고 영어 스터디도 하고 글도 썼다. 친한 친구들은 이렇게 바지런하게 다니는 나를 보고 우스갯소리로 열정 만수르라며 '유노윤호'라고 부른다. 그런데 뭐랄까, 이렇게 유난 떤다고 떨었는데 과연 나에게 남은 것이 얼마나 될까? 개 중에는 꾸준히 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또 많은 것들은 그냥 사라졌다. 태어나기도 전에 떠나가버린 나의 중국어처럼..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 한편이 답답해지곤 한다.



오타루 어느 상점 앞의 눈사람. 귀엽다.


올 초에 삿포로에 갔다. 원래 겨울을 좋아하질 않아서 겨울에는 그냥 집에 있거나 굳이 여행을 간다면 따뜻한 나라를 선택하는 편이다. 그래서 겨울왕국 삿포로는 의외의 목적지였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마침 월요일이 연차여서 가까운 곳 어디라도 다녀오고 싶었고 그래서 스카이스캐너를 둘러보는데 토요일 아침에 출발하는 삿포로 왕복 항공권이 17만 원 밖에 안 하는 거였다. 이 시즌에 삿포로 왕복이 17만 원이면 거의 거저먹는 것과 다름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출발이 36시간도 안 남은 시간에 충동적으로 티켓을 끊었다. (출발 시간이 너무 일러서 공항에서 밤을 새워야 했던 건 안 비밀이다...) 가끔 자본주의는 나를 예상치 못한 목적지로 데려간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겨울을 싫어하지만 아예 대놓고 겨울왕국인 것은 그것대로 매력이 있었다. 지천에 눈이 널린 삿포로는 고작 서울에서 3시간을 날아갔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세상 같았다. 겨울날에 이불이 내 몸을 포근히 감싸주는 것처럼 온도시를 덮은 눈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사실 추운 데다가 눈 때문에 걷기가 힘들어서 어딜 바지런히 돌아다니고 싶지가 않았다. 결국 짬을 내서 오타루에 다녀온 것을 빼면 여행 내내 그냥 숙소 근처만 맴돌게 되었다. 거리에 가득한 눈 때문인지 마음이 포근해져서 도토루 커피에서 평소에는 달다고 마시지도 않는 따뜻한 캐러멜 마끼아또를 하루에 두 잔씩 마셨다. 그냥 혼자서 먹고 자고 마시고만 했다.


워낙 가만히 있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여겨 버리는 성격인지라 가끔씩은 이렇게 강제로 톱니바퀴를 정지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스스로에게 '지금부터는 쉬는 시간!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아.' 하고 선언하는 것이다.


눈 덮인 오타루. 삿포로나 오타루나 눈이 정말 많다.



열정을 유지하며 사는 게 버겁다고 느껴지는 때가 있는데, 바로 요즘이다. 최근에 나에게는 꽤나 큰 변화가 있었고 앞으로 더 큰 변화가 예정되어 있다. 변화가 항상 싫은 건 아니지만 그게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진행될 때 지치고 현기증이 난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세상이 가만 머물러주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래서, 여행할 때만큼은 절대로 열심히 하지 않겠다 결심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빡빡한 일정을 시간대별로 엑셀 파일에 정리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다. 그때 그때 발길 닿는 대로 다니겠다.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하게 조사해서 여행지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마치 이미 한 번 다녀온 적이 있는 듯 완벽하게 준비된 여행을, 하고 싶지 않다.


누구나 간다는 관광명소, 꼭 가봐야 한다는 맛집에 정말 꼭 갈 필요는 없다. 런던에서 빅벤을 안 보고 로마에서 3대 젤라또를 안 먹어도 상관없다. 그 순간 마음이 내키면 하고 아니면 마는 것이다. 그저 주어진 시간을 즐길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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