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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이상 문학상 수상집’을 읽고

예소연 ‘그 개와 혁명’

by 김로운

나는 50대이고 우리 아들은 20대 남자이다. 나는 86세대인 편이고 우리 아들은 가끔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의 말이 옳다고 말한다. 요즘은 갈등을 피하느라 말을 삼가고 있지만 나와 남편이 어떤 정치 사건에 대해 의견을 말하면 우리 아들은 무조건 일단 안티를 건다. 강경하다.


이명박 정권 때 해직되었던 전 mbc 대표이사는 아들이 티브이 뉴스에 직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대학생 무리 속에 있었다고 한다. 청년 세대는 성장하기 위해서 이전 세대를 부정하고 밟고 일어선다. 기원전부터 그래 온 오랜 역사이다.


예소원 작가의 ‘그 개와 혁명’이 2025년 이상 문학상 대상을 받을 때 나온 기사를 보면서 젊은 세대가 전 세대를 품어 앉은 혁명적인 소설이라는 평을 본 적이 있었다. 소설은 기사대로였다. 30대 여주인공은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방문한 조문객에게 죽은 아버지의 유언 즉 지령을 전달한다. 죽은 아버지의 목소리로.


아버지는 전형적인 86세대로 김문수 국민의 당 전 대통령 후보처럼 공장에서 노동 운동을 한 학출 (학생 출신)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가부장적이었다. ‘유연한 노동 문제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불가산인 가사 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사회는 조리 있게 굴러가야 하지만, 가족이라는 제도 안의 조리는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어쩌면 젊은 시절 똑딱이핀 공장에서 일하던 그는 가까이 있는 현실을 보지 않고 멀리 있는 이념만 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죽은 그의 아버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노동 운동을 그만두고 참고 견디는 삶을 선택했다. 안 맞는 양복을 입고 지루하게. 주인공은 그래서 아버지를 사랑한 것 같다. 작가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장녀로서 상주 노릇을 하며 충실하게 아버지의 유언을 실행한다. 젊은 세대의 혁명적인 사랑이다. 내 마음이 편안해진 주제였다.


또 하나 이 소설이 매력적인 것은 주인공이 괄괄한 성격으로 남자처럼 행동하는 점이다. 장례식장에서 상주 노릇을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조문객들을 대하면서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요즘 ‘테토녀 (테스토스테론 여자)’라고 한다. 보통 순수 문학 소설 여주인공들이 고통받고 고민하고 감성이 예민한 것에 비해 매우 다른 성격이라 소설을 읽으며 해방감을 느꼈다.


기술적으로 이 소설은 기승전결과 절정에서의 카타르시스를 가지고 있어 문법이 명확하다. 특히 절정에서 생전 아버지가 사랑하던 개를 장례식장에 풀어놓음으로써 기존 질서를 깨뜨린다. 카타르시스를 주는 부분으로 문학적인 완성도를 높였다. 이런 절정이 없었다면 평범한 단편으로 멈췄을 것이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쓴 김기태 작가의 ‘일렉트릭 픽션’은 우수상이다. 주인공은 40대 미혼 남자로 괜찮은 빌라 505호에 산다. 탄탄한 공기업에서 40여 명 정규직 사이에서 유일하게 계약직으로 일한다. 복사를 하거나 사무실로 오는 우편물을 받아 분류하는 것 같은 일이다. 35년을 일한 소장이 퇴임하는 날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전 직원이 양복을 입고 오라는 회사 메일을 받고 양복을 입고 출근하지만 기념사진 찍는 자리에는 알아서 가지 않는 성격이다.


집에서 안온하고 편안한 생활을 누리기 위해 회사를 다닌다. 한 푼이라도 아껴서 사는 그가 어느 날 우연히 5주에 거쳐 고민한 끝에 전기 기타를 산다. 그리고 기타를 치며 해방감을 느낀다. 방음형 기타이기는 하지만 그는 소심한 성격이라 빌라 내 소음을 걱정한다. 그는 누가 항의라도 할까 조마조마하다.


그러나 상가 음악 학원에서 고수에게 기타를 배우고 난 후 방음형 기타가 아니라 진짜 기타를 치고 싶어졌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내에 ‘전기 기타 소음을 내서 죄송합니다’라는 글을 붙이고 집에서 짧은 시간 그냥 기타를 치겠다고 선언한다. 여기까지만 썼더라면 소설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에 501호는 ‘저도 전기 기타를 좋아합니다’라고 써 붙인다. 강력한 연대의 선언이다. 사실 이 소설은 처음 시작도 501호의 시선이었다. 시작이 501호의 서술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건 소설 마지막 부분을 읽고 나서였다. 주인공은 505호 남자지만 화자는 501호 남자였다. 김기태 작가는 이런 구성적 기술을 잘 부린다.

그의 단편 소설집에 있는 ‘롤링 선더 러브’에서도 30대 후반의 미혼녀의 연애 얘기가 진행되는 중간에 갑자기 황당한 환상 장면이 진행된다. 작가는 과감한 기술을 부리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덕분에 누군가는 너무 현학적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기술이 좋았지만 전체적인 진행이 너무 완만하고 굴곡이 적어 소설적 완성도가 높게 보이진 않았다.


단 소외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40대 남자에 대한 강력한 지지라는 주제는 참 좋았다.


정기현 작가의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은 구성이 치밀한 단편 소설이다. 소설은 ‘김명철 들어라 31. 당신은 우리를 파멸시켰고 나와 내 가족들을 구렁텅이에 처넣엇다죽어야마땅한 사람아’ 라는 도발적인 낙서글로 시작한다. 무슨 일인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20대로 보이는 미혼 여성 주인공이 교회에서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난다.


남자와 점점 가까워지는 가운데서도 주인공은 김명철의 무시무시한 낙서글을 거여동이라는 동네에서 계속 만나고 의문이 커진다. 주인공은 무시무시한 김명철 낙서글의 실체를 탐색해 나가기 시작한다. 담쟁이넝쿨로 덮여 있는 담벼락에서 이파리들을 일일이 걷어 보기도 한다.


마침내 발견한다. 거여동이 2000년대 다단계 사업체의 온상이었다는 사실을. 무시무시한 낙서글은 다단계에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쓴 글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은 바로 준영을 찾아가 말해준다. 그러나 준영의 반응은 미적지근하고 교회로 달아나 버린다. 이때 주인공은 깨닫는다. 그녀가 낙서글의 실체를 탐색한 동기는 준영에게 말 걸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그리고 그 마음은 슬픈 마음이 되었다.


그런데 반전은 여기부터다. 주인공은 아늑함을 느낀다. 비로소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결말에서 다시 반전이 일어난다. 교회 예배에 간 주인공은 찬송가를 부르게 되는데 구절은 이러했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예수 이름 믿으면 영원토록 변함없는 기쁜 마음 얻으리.’ 주인공의 앞자리에 있는 준영은 고개를 까닥거리며 노래를 부른다. 그래서 주인공은 이 찬송가는 준영이 선택했으리라 상상한다.


작가는 결말에서 직접적으로 쓰진 않았지만 준영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주인공이 생각한다는 점을 암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걸 쓰기 위해 결말 앞부분에서 찬송가에 대한 긴 설명을 한다. 준영이 주인공을 진짜 좋아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주인공이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그게 보답받지 못하는 슬픔일 수는 있어도 사랑의 다른 이면이기 때문에 안온하다.


소설은 실은 사랑을 하게 되는 과정이다. 그런데 전혀 관계없는 낙서글 이야기를 엮어 넣는다. 구성을 눈여겨봐야 하는 소설이다. 또한 슬픔에 대한 반전적 의미도 새롭다.


2025년 이상 문학상 작품집을 보며 느낀 점은 역시 소설에서는 구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소연의 소설은 탄탄한 기승전결의 구성과 절정에서의 카타르시스를 전형적으로 구현한다. 김기태의 소설은 화자를 숨겨놓았다가 마지막에 밝히면서 결정적인 주제를 구현한다. 정기현의 소설은 두 가지 이야기를 거의 비슷한 분량으로 엮어 넣으면서 마지막에 사랑이라는 주제로 맺는다. 이 중 예소연의 소설이 주제 의식도 새롭고 사회적 의미도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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