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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기지촌 여성 윤금이 씨 살해 사건

by 김로운

동두천 기지촌에서 1992년 10월 윤금이 씨가 미군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된 사건은 전국민적인 관심을 받으며 공분을 일으켰다. 미군 부대 인근 한국 기지촌 여성이 미군에 의해 끔찍한 방법으로 폭행을 당하거나 살해된 사건들은 그 이전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많았다. 그러나 윤금이 살인 현장은 너무 끔찍하기도 했고 당시 사회 정황상 (1980년대 민주화 이후) 그 사건은 높아진 시민 의식에 들끓는 분노를 일으키는 기폭제였다.


1992년 10월 28일 동두천 보산동 소위 벌집에서 발견된 윤금이 사체는 알몸이었다. 방 안은 검고 끈적한 피로 가득 차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그 위에 세탁 세제가 흩뿌려져 있었다. 아랫도리의 질에는 콜라병 하나가 꽂혀 있었고 우산이 항문에는 직장까지 28센티 꽂혀 있었다고 한다. 입 안에는 성냥개비가 한가득 꽂혀 있었다. 또한 더욱 끔찍하게도 부검 후 자궁 안에서 맥주병 2병이 발견되었다. 나는 여자 몸에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살아 있는 상태에서 했다면... 상상하기도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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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사건 당시 26세로 1966년 전북 순창군에서 5형제 중에 중간으로 태어났다. 집은 가난했고 아버지는 병을 앓고 있었다. 그녀가 17세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중학교만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1980년대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평택 미군 부대 기지촌으로 흘러 들어가 미군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전형적으로 70, 80년대 시골 출신 가난한 여성의 경로이다. 당시 기지촌 여성들은 좋은 미군과 만나 결혼하면 미국으로 이민 가는 게 가능하였다. 소위 아메리카 드림이다.


평택에서 만난 미군과는 2년간 동거를 했다. 헤어지고 1992년 10월 동두천으로 넘어오게 된다. 그때 술을 많이 마시고 각성제를 마시고 울면서 자주 행패를 부려 동두천의 클럽에서 정식으로 고용되지 못한 것 같다. 따라서 기지촌 여성 가운데에서도 가장 하층인 길거리에서 꽃장사를 했다. 꽃장사는 밤에 길거리에서 연인처럼 보이는 매매춘 남녀에게 꽃을 파는 일이다. 성매매를 하면 가장 낮은 화대를 받았다. (출처: 유튜브 사건의뢰 따라잡기 대한민국 살인사건 126화 주한미군 윤금이 씨 살해사건)


당시 사건 기록에 따르면 윤금이 씨는 크라운이라는 동두천에 있는 클럽 앞에서 미군 케네스 마클 이병을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자기 방으로 데려가 함께 있다가 일을 당했다. 한국 경찰이 28일 신고를 받고 출동해서 현장을 보고 범인을 특정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크라운 클럽에서 목격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나중에 부검을 하니 맥주병에서 마클의 지문이 나왔다. 따라서 마클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범인으로 확정되었다. 당시 한국 경찰은 마클을 잡는 과정은 너무나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나 동두천 기지촌 여성 조직인 ‘민들레회’의 도움으로 그를 잡을 수 있었다. 10월 31일 저녁, 경찰은 마클을 범임으로 특정하고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형사들은 보산동 미군 부대 정문 앞에서 민들레회 여성들과 함께 기다렸다. 한미행정협정 소위 SOFA 때문에 한국 경찰이 미군 부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밤 12시 30분 부대 밖으로 외출했다가 복귀하는 많은 미군들 사이에서 마클의 얼굴을 민들레회 언니가 알아봤다. 마클은 막 여러 군인들 사이에 섞여 신분증을 확인하는 정문 검문소 안으로 발을 딛고 있었는데 얼굴을 알아본 언니가 검문소 안으로 한 발을 디뎌 미군 영지로 들어간 마이클의 바지 뒷춤을 잡고 끌어냈다고 한다. 덕분에 마클은 한 발자국 뒤인 한국 영토로 끌려 나와 경찰이 잡을 수 있었다. 당시 형사는 그게 아니었더라면 마클을 잡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출처: 유튜브 '사건 의뢰 따라잡기 ‘대한민국 살인사건 126화' 주한미군 윤금이 씨 살해사건)


체포 당시 마클은 피가 묻는 바지와 운동화를 입고 있었다. 윤금이 살해 당시 입었던 옷차림 그대로였다. 어떻게 사람을 살해한 사람이 3일 후에도 범행 당시 옷을 그대로 입고 있을 수 있을까. 형사는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한다. 사건을 일으킨 범인들은 보통 증거를 지우기 위해 살해 당시 물건들은 다 없앤다. 그런데 뻔뻔하게 살해 당시 옷을 그대로 입고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사람들이 미군을 손댈 수 없다는 자만심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추정한다. 한국인은 미군에게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자만심이다. 그러나 덕분에 운동화에서 나온 피가 윤금이의 DNA와 일치한다는 게 밝혀져서 증거가 되었다.


마클의 신병을 확보해 경찰서에 데려갔지만 형사는 조사를 할 수 없었다. 한미행정협정에 따라 미군 대표의 입회 없이는 미군을 조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검거된 미군은 무조건 일단 미군 헌병에게 인도해야 했다. 경찰은 미군에 연락해 마클을 인도하고 다시 조사를 위해 한국 경찰서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해야 했다. 마클을 데려간 미군은 미적거렸다. 계속 핑계를 대며 한국 경찰서에 오지 않으려 했다.


따라서 윤금이 사건은 그전에 일어난 많은 미군 사건들처럼 묻힐 수 있었지만 이때는 달랐다. 사건을 알게 된 동두천 시민 진영에서 대대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1월 4일 동두천 민주 시민 회의와 지역 단체들이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택시 노조에서는 ‘미군 승차 거부’ 운동을 벌였다. 왜냐하면 택시 운전사들도 피해자였다. 동두천의 미군들은 택시를 타고는 부대 앞에서 돈을 내지 않고 내려 부대 안으로 도망가는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 거기에 항의하면 택시 기사를 폭행하고 부대 안으로 도망가 버렸다고 한다. 동두천 택시 기사들은 분노했다.


1992년 11월 7일에는 2천 명의 시민들이 모여 규탄 대회를 열어 미 2사단 (캠프 케이시) 정문 앞까지 행진을 하고 미군의 천인공노할 범죄에 분노를 터뜨렸다. 이때의 시위로 한미 행정 협정이 개정됐다. 살인사건, 강간 사건 석방대가금 취득목적 약취유인, 불법 마약거래, 방화, 흉기 강도, 음주 교통사고, 뺑소니 사고 등은 미군이라도 한국 경찰이 신병을 확보해서 조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규탄대회.jpg (사진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이전 한미행정협정 (SOFA)는 한국민을 살해, 강간, 폭행한 미군을 한국에서 조사할 수 없는 국제법이었다. 한국이 미약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법이었다. 요즘처럼 한국이 선진국인 시기에는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다. 너무나 비참한 죽음이었지만 윤금이 사건 때문에 1990년대 한국은 미국에 조금 더 평등한 위치를 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한국 영토에서 일어나 미군 범죄일지라도 소파 협정에 따라 미군이 요구를 하면 한국 경찰은 미군 범인을 미군으로 인도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는 것은 동두천 기지촌 여성들의 자조 조합인 ‘민들레회’의 활약이다. 민들레회에는 보통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클럽에 나갈 수 없는 기지촌 출신 여성들이 모여 있다. 그녀들은 아프게 되면 병원을 데려간다든지 약을 사서 서로 돕는다. 또 새롭게 들어오는 젊은 여성들에게 미군을 상대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을 가르친다고 한다. 또한 기지촌 내에 일어나는 불공정 행위들에 대해 자체적인 감찰도 한다.


1992년 당시 한국 경찰은 범인을 잡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정보를 얻는 데에도 ‘민들레회’의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들은 스스로는 ‘민들레회’라고 부르기보다는 ‘감찰’이라고 부르는 걸 더 선호한다고 한다. 스스로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이다. (출처: 유튜브 '사건 의뢰 따라잡기 대한민국 살인사건 126화' 주한미군 윤금이 씨 살해사건)


현재는 미군 부대 근처 기지촌에서 주로 필리핀 여성들이 클럽에서 일하며 미군을 상대한다. 한국 여성들이 갈 유인이 거의 없다. 1992년 윤금이 씨 같은 경우는 1960 ~ 70년대 가난한 한국 여성의 전형적인 인생 경로였다. 그녀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병든 부모를 부양하기 위해, 혹은 남자 형제의 대학 진학을 위해 기지촌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녀들이 벌어들인 돈은 1960년대 한국이 경제 성장을 하는 데 기여했다.


‘미 8군의 한 정보 장교는 군대가 1960년대 남한 GNP의 25퍼센트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출처: ‘동맹 속의 섹스’ 2002년, 캐더린 문, 전 미국 웨슬리 대학 정치학 교수) ‘1970년 한국은 미군 주둔에 따른 성매매등 사업으로 연간 1억 60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당시 한국의 수출액이 연 8억 3500만 달러였던 것에 비교하면 국가의 경제를 좌우할 만큼 상당한 액수다.’ (출처: ‘뉴욕 타임스’, 2023년 5월 2일 자) 더구나 그녀들의 매춘을 돕기 위해 국가에서는 1970년대 보건소에서는 ‘성병 검사’를 강제로 하고 ‘성병 관리소’를 전국에 여기저기에 세웠다.

성병관리소1.jpg 동두천 소요산 주차장 뒷쪽에 위치한 옛 성병 관리소, 직접 찍은 사진


윤금이의 죽음은 그녀 개인의 억울한 한 많은 죽음이 아니다. 그녀의 죽음은 기지촌에서 한 많은 인생을 살았고 버림받고 죽고 외면당한 수많은 가난한 언니들을 표상한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안에서처럼 전 세계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서서 힘차게 노래하는 한국 여성들은 가난한 언니들에게 이렇게 빚지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한다.


*매거진북 표지 사진은 'blogspot' 사이트에서 이 글의 머릿 사진은 '미디어인천'에서 다운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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