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하게 영화 읽기 no. 003] 어서오시게스트하우스를 보고
1) 졸업도 해야 하고 취업도 해야 하고... 나한텐 선택이 아닌데
2)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네. 그게 좆같아서 이렇게 된 거란 걸 왜 몰라
3) 당신들은 다 해봤잖아요 나도 해보겠다는데 왜 못하게 해요
4) .... 좋더라구요 서핑
0.
마음을 건드리는 대사들을 기억에 남기려고 했는데, 두뇌가 노쇠해져서 위에 보이는 몇 줄 정도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1.
졸업반에 취업준비생, 왠지 취업할 때까지 한두 학기 졸업유예를 한 것 같아 보이는 준근은 계절학기 신청에 실패하고 기숙사를 떠나(쫓겨나) 양양 해변에 자포자기한 얼굴로 서있다. 서핑 중인 태우를 눈부신 듯 바라보는 준근은 곧 자신의 서핑 인생을 예감이라도 한 듯 그의 모습에 자신의 모습을 덧씌운다. 딱히 머물 곳도, 머물 돈도 없던 준근은 얼떨결에 따라 들어간 게스트하우스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고, 겨울에 입문하는 이 없는 서핑의 겨울 입문자가 된다.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패들링도 힘겨운 준근, 어쩌다 (미친 자존심에) 하와이에서 개인 교습을 받은 한 남자와 서핑 대결을 약속한다. 준근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 달, 어서오시게스트하우스의 시즌권을 끊어 머물고 있던 3인(유나, 태우, 원종)과 함께 훈련에 돌입하는데.....라는 줄거리의 영화는 취업시장의 승리자가 되기 전까지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체 사회 진입을 위해 필요한 거라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20대의 불안을 파도에 싣는다.
2.
밀려오는 파도를 잡는 건 그걸 볼 수 있는 눈과 타이밍을 아는 능력, 일어서고 버텨서 파도를 탈 수 있는 실력을 요구한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좋은 대학에 못 가고, 높은 학점을 못 받고, 취업도 못한 준근은 서핑 또한 기를 쓰고 열심히 하지만 ‘정말 안 는다’는 소리만 듣는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해야 한다고 배워온 우리들은 자라면서 조금씩 열심히 보다는 잘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듣는다. 열심히 하는 것 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현실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잘하지 못하면 결국 잘 못한 게 되고 마는 결과를 줄 뿐이다. 그래도 준근은 다시 기운을 내본다. 열심히 하되 이길 수 있는 방법도 찾기 시작한다. 시즌권 동지들은 준근의 승리를 위해 각자의 열정도 함께 불태우며 가느다란 그들의 욕망을 배팅한다.
하지만 신은 늘 가혹한 테스트를 하시는 법. 교수님이 소개한 회사 면접과 서핑 대결 일자가 겹쳐버린다. 준근에게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고 결정이다. 태우와 원종은 화를 내고 비아냥 거린다. 취준생의 입장에서 면접은 일생일대의 기회다. 잡을 수밖에 없고, 잡아야만 한다. 지나고 나면 그때 그 면접을 보지 않았어야 했어라는 말도 할 수 있겠지만, 아직은 그때가 아니니까. 하지만 이미 그 시절을 지나온 이들에게 준근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은 그들의 실패와 분노로 환원되고 만다. 어쩌면 그들 자신도 준근의 나이 때 겪었을 실패와 좌절,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지금에도 이뤄야 할 성공과 꿈을 준근에게 투영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Latte is horse의 꼰대적 발언을 쏟아내며 이미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봤기에 할 수 있는 말들로 설득하려 하지만, 준근의 귀에 그 말들이 들어올 리 없다. 준근은 분노한다. 아니, 그건 억울함의 포효 같았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그만큼의 결과를 주지 않은 현실에 대한 억울함, 그것밖에 못했던 자신에 대한 억울함, 실낱같은 희망을 잡아보려 하는데 잔소리와 욕을 들어야 하는 것에 대한 억울함.
3.
알아서 잘할 거라 믿는다는 엄마의 말은 무한한 믿음처럼 보이지만, 무한한 무관심과도 같다. 졸업도 하고 취직도 하고, 돈을 벌면 결혼도 하고 그런 길을 잘 갈거라 믿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지만 네가 잘 살거라 믿어. 준근의 어깨를 계속 누르고 누르던 믿음 또는 무관심. 그래서 사회가 정해놓은 길을 걸어야 했고 밟아갈 수밖에 없었던 삶. 가진 것도 받는 것도 없으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투박하게 열심히 하는 것뿐인 삶. 준근은 서핑을 배웠고, 서핑의 룰을 안다. 그답게 열심히 했고, 거기에 더해 룰에 기반해 이길 수 있는 전략도 세웠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하고, 자신들이 아는 걸 나눠준 이들이 있었다. 아마도 이런 게 준근의 인생에는 드물지 않았을까.
시도하는 경험, 해내는 경험, 이겨보는 경험은 인생에서 꽤 큰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취업을 위해서, 어머니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 보통 사람처럼 살기 위해서 준근이 해왔던 어쩔 수 없는 선택들이 앞으로는 다소 달라지지 않을까. 면접 대기실에서 혼란스러웠던 얼굴이 답을 찾았던 것처럼.
4.
한 겨울, 서핑 시즌권을 끊고 게스트하우스에 머물고 있는 유나와 태우, 원종은 멋진 인생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할 일 없는 백수, 한량처럼 보인다. 마치 지금의 나처럼. 카라반을 끌고 다니며, 하와이에서 개인교습으로 서핑을 배운 성민이 그저 부러운 놈 같다. 준근은 뭐든 시작도 해보기 전에 앞이 막혀버린 사람 같다. 마치 이 시대 청년들의 모습처럼.
20대 때 자소서를 쓰고 또 쓰고, 면접 한 번 보기 위해 끙끙대었던 시절이었다면 이런 영화가 눈에도 안 들어왔을 거 같다. 헛소리 하지 말라고, 나는 살아야 한다고. 이 영화를 보고 내 생각은, 내 느낌은 하고 떠들어댈 수 있는 것도 이미 내가 그 시절을 조금은 지나왔기 때문인 것 같다. ‘나도 떨어져 봤고, 붙어도 봤고, 그만둬도 봤어. 다 부질없어. 좋아하는 걸 해.’ 같은 말을 내뱉지 않는 어른이 되었길 바라는데 잘 모르겠다. 다만 그저 어쩔 수 없다는 핑계에 숨지 않는 사람이 되고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