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하게 영화 읽기 no. 002] 녹색광선과 겨울이야기를 보고
#1. 녹색광선 (에릭 로메르)
1.
로메르 영화 중 처음 접하게 된 작품이 녹색광선이다. ‘으음? 나 겨울이야기 괜히 예매했나? 계절 연작은 시나리오 책으로도 나왔다던데’ 싶은 후회가 스멀스멀 밀려와서. 영화가 별로라는 얘기는 아니다. 영화적 재미는 있다. 다만 델핀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이다. 보는 이를 무척 피곤하게 만든다. 내 경우엔 그랬다.
2.
델핀은 자신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아 보인다. 어쩌면 자기 자신이 마음에 안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름휴가 2주 전 친구와 함께 가려고 한 바캉스에서 버림받았고, 남자 친구는 헤어진 지 오래다. 근사한 바캉스를 보내고 싶은데 혼자인 건 싫다. 단체 여행도 싫고, 가족과 함께 우중충한 아일랜드에 가는 것도 싫다. 뜨거운 곳에서 제대로 여름휴가를 보내고 싶다. 친구들은 이러저러한 조언을 한다. 남자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델핀이 남자를 만날 수 있게 도와주려 한다.
하지만 그런 행동들이 그녀에겐 폭력적이다. 너무도 다른 성향의 친구가 ‘나도 너처럼 겪어 봤어.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해주는 충고는 그를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친구의 말에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녀의 숨겨진 마음을 건드리는 것 같다. 델핀은 속시원히 맞서지 못하고, 그저 뒤에서 눈물을 터트린다. 또 다른 친구가 위로를 건네고, 그녀의 휴가지에 함께 한다. 하지만 거기서도 혼자인 델핀은 자주 운다. 홀로 자주 눈물짓는다.
3.
영화는 델핀의 자존감 찾기 혹은 쉽게 누군가를 만나지 못하지만 자신만의 이유를 갖고 있는 즉 확고한 인생관과 가치관이 있는 그의 내면을 탐구하는 듯해 보인다. 비건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의 친구들 사이에서 동물을 먹지 않는 이유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하고, 풀은 먹지만 꽃을 먹지 않는 이유도 명확한 그녀는 정말 나름의 신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처럼 그녀의 신념과 가치관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쉽게 사랑하지 못하고, 쉽게 판단하지 못하는구나 이해가 되려다가도,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고 멋진 휴가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못하는 모습은 델핀의 그 중심이란 게 바로 서 있는 게 맞나 싶은 의문도 들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보내는 여름휴가, 친구들과의 어긋남, 약간은 비웃음 당하는 자신의 라이프스타일, 내면의 혼란스러움 등을 마주하고 답답한 마음에 눈물 지으면서도 자신을 정립해가는 것인가 싶었던 기대는 영화의 막바지, 왼쪽 가슴에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까만 티셔츠의 남자 앞에서 무너진다. 아! 델핀은 그저 마음에 드는 남자를 찾지 못했을 뿐이구나라는 결론에 이르며, 녹색광선의 과학적 현상을 설명하는 이들과 거기에 귀 기울이던 델핀의 모습은 그저 델핀의 운명론에 녹색광선을 이용하기 위함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에 실소로 이어진다.
4.
영화는 듣는 이보다는 주로 말하는 이를 주목한다. 말하고 있을 때 듣는 이의 얼굴이 잡힐 때는 언쟁이 오갈 때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묘한 표정은 그들 사이의 거리감을 드러낸다. 농담이나 잘 모르는 사람의 (무지에서 나오는) 질문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델핀의 모습은 불편함과 어색함을 고조시킨다. 사실 주인공이니만큼 델핀에게 연민이나 동정의 감정이 일어날 법도 한데, 내 마음은 델핀에게 ‘대체 뭘 어쩌자는 건데’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마침내 3번의 결론에 다다르는 것이다.
영화는 녹색광선이라는 제목, 한두 줄의 줄거리에서 읽혔던 낭만이나 환상을 (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영화가 내내 하는 얘기는 델핀의 속물성(이 아닐까). 그것을 남자들의 장난, 기만을 벗어나 자신의 확고한 신념이라(고 부르)는 틀에 담아서 ‘난 너희들과 달라’라고 외쳤던 델핀은 어쩌면 스스로와 친구들, 주변 사람을 기만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2. 겨울이야기 (에릭 로메르)
1.
펠리시도 특이하다. 로익과 막상스, 펠리시의 불쌍한 두 남자. 펠리시는 샤를과 헤어지고 힘든 시절 만난 로익과 주로 함께 생활한다. 하지만 너무 똑똑한 이 남자와 함께 있으면 자신이 바보 같아지는 것 같아서 싫은 순간들이 생긴다. 그녀가 일하는 미용실의 사장 막상스는 그녀를 위해 아내와 헤어지도 고향으로 돌아가 미용실을 운영한다. 적당히 똑똑하고 경제력이 있어서 (비록 매우) 사랑하지 않지만 같이 살 수는 있을 거 같다며 펠리시는 로익과 헤어지고 딸 앨리스와 함께 막상스 곁으로 간다. 하지만 거기서도 펠리시는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은 느낌인지 ‘사모님’이란 말에 막상스와 싸우고, 헤어지도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 펠리시. 그녀는 우울한 연말을 로익에게 친구로서 함께 보내자고 한다. 로익은 친구로 남을 수 없을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펠리시는 샤를과의 만남을 포기하지 않는다. 운명처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갖고, 로익과 헤어진다.
2.
겨울이야기는 겨울의 프랑스 (주로 파리) 풍경이 보고 싶기도 했고, 5년 전 피치 못하게 헤어진 연인이 파리에서 다시 만나 펼쳐지는 연애 이야기인 줄 알고 봤던 거라서, (간략한 줄거리만 봤을 땐 그런 줄 알았지. 요즘 영화보기 전에 정보 거의 안 보고 가서 보면서 이런 설정이었어? 하고 놀라는 게 일상임) 샤를과 만나기는 하고 끝나는 걸까, 펠리시는 아니 프랑스는 저렇게 어이없이 이별 통보하고 ‘친구로 잘 지내자, 그래도 되잖아’라고 하고 정말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는 문화인 걸까, 펠리시 너무 노매넌데. 로익과 막상스는 바보인가라는 생각이 주렁주렁 이었다.
어떻게 보면 펠리시는 매우 긍정적이고 주체적이다. 샤를과 다시 만나기 어려운 실수를 했음에도 홀로 아이를 낳고, 아이 방엔 아빠의 사진 액자를 놓아주고, 샤를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가슴에 품고 희망을 갖고 있다. 또한 지금 당장을 함께 살아갈 사람을 찾고 또 만나고, 함께 지내다가도 자신의 감정이 틀렸다는 걸 깨달을 때면 관계를 정리할 줄도 안다. 자기 나름대로 넘어야 할 선과 지켜야 할 선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는 느낌. 그래서 그 경계 즈음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로익이나 막상스 같은 인물이 생기기도 하지만.
3.
이 또한 영화 끝나기 오 분 전, 델핀이 등장하고(같은 배우) 운명처럼 헤어진 샤를과 운명처럼 (우연히) 다시 만난다. 이 얼마나 해피엔딩인가. 정말이지 얼렁뚱땅 샤를은 펠리시의 집에 함께 가고, 그녀의 가족을 만나고, 5년 만에 그들은 함께 연말을 보낸다. 100% 확신이 없는 사랑 사이에서 저울질할 필요 없는 확실한 사랑을 되찾은 펠리시. 그들의 겨울은 따뜻한 봄을 맞이 할 수 있을까. 결말지어지지 못한 안타까운 이별이 펠리시를 다소 주춤거리거나 두리번거리게 했다면, 어떤 엔딩이든 샤를과의 만남이 발생했다는 점 자체가 펠리시를 한 발짝 더 나아가게 할 것은 분명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