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더 이상의 극본 쓰는 법은 없다. 이걸로 끝!
사실 방송극본이나 시나리오를 배우러 가는 망생이 상당수는 극본(시나리오) 쓰는 법을 모르고 간다. 왜냐하면 강좌에서 당연히 그것부터 배울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가르쳐 주는 곳은 많지 않다.
놀랍지 않은 가? 극본 쓰기 강좌에서 극본 쓰는 법을 안 가르쳐 준다는 것이?
하지만 사실이다. 가르쳐 주는 곳이 별로 없다.
때문에 본인이 어떻게든 터득해서 와야 하고, 아니면 첫 작품을 제출할 때까지 어떻게든 방법을 습득해야 한다.
극본 쓰는 법은 딱히 가르치기도 배울 것도 없다. 그래서 막상 가르치려 하면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가르쳐야 할지 감을 잡기 힘들다. 그래서 '수강생이 극본 쓰는 법을 다 숙지했다'치고 바로 '작가 정신'이나 '취재하는 법' 등 정말 안 배워도 되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때 용기를 내서 물어보면, 보통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좋아하는 작가의 극본을 구해서 필사해 보세요!"
맞는 말이다. 나도 그렇게 말한 적이 많다.
사실 필사를 해 보면, 극본 쓰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 게다가 필사는 '가장 느리고 완벽한 독서'이기 때문에 극본 형식 외에 배우는 것이 많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극본 쓰는 법'만을 터득하는 데에는 불필요한 시행착오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극본 쓰기만을 배우는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일인가?
극본 쓰는 법을 뚝딱 해치운 뒤 작품 속에서 작가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게 훨씬 낫지 않는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금 나한테 한 방에 뚝딱 배우기 바란다.
하나의 극본(드라마의 경우)은 보통 수십 개의 씬으로 구성되어 있다. 때문에 극본을 쓴다고 하는 것은 씬을 연속적으로 쓰는 것이고, 따라서 씬을 쓰는 법을 배우게 되면 극본 쓰는 법은 끝나는 것이다.
씬(scene)은 무엇인가?
한 장소에서 이뤄지는 이야기의 단위이다. 보통 한 개 이상의 컷들로 구성된다.
그렇다면 컷(cut)은 무엇인가?
숏(shot)이라고도 하는데, 카메라를 작동시키는 시점에서 끝나는 시점까지 한 번에 촬영된 결과물을 말한다.
한 개의 컷(숏)이 하나의 씬으로 되어 있다면, 그걸 원 씬 원 컷(one scene one cut)이라고 한다. 보통 뮤직 비디오에서 많이 쓰이며,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롱 테이크(long take)라고 해서 예술적인 의도 등의 이유로 한 장면을 한 컷으로 길게 찍을 때 사용된다.
이런 씬들이 모여서 한 편의 극본을 이루지만, 그전에 알아야 할 단위가 있는데, 그게 바로 시퀀스이다.
시퀀스(sequence)는 무엇인가?
시퀀스는 한 개 이상의 씬들이 모여 어떤 흐름을 가진 이야기를 만드는 단위이다. 이 시퀀스들이 모여 하나의 시나리오(scenario) 또는 극본(script)이 된다.
보통 시퀀스는 페이드 인(fade in, F.I.)으로 시작해 페이드 아웃(fade out, F.O.)으로 끝난다. 페이드 인은 화면이 밝아지는 것이고, 페이드 아웃은 화면이 어두워지는 것이다.
보통 60분 물 극본은 보통 4개의 시퀀스에서 6개 시퀀스로 이뤄져 있다. 최근에 발표되는 작품은 시퀀스 숫자가 많은 편이다. 시퀀스가 많을수록 이야기가 스피디해지지만,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급급하게 돼서 작품의 메시지가 잘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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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씬들로 이루어진 시퀀스를 보자.
S#1. 어느 도로 (N)
F.I. 경찰들이 음주 검사를 하고 있다. 경찰이 경광봉을 들고 차량을 도로가로 인도 중이고... 도로가에서는 정복을 입은 수진, 윈도우를 열지 않고 있는 차량 옆에 서 있다. 화가 잔뜩 났는데...
경찰1 (E) 도난차량은 아니라는데요.
수진, 돌아보면 경찰1, 무전기를 들고 다가오고 있다.
수진 (혼잣말) 그럼, 뭐야? (유리창 두드리며) 이보세요! 이것 좀 내려 보세요!
꼼작도 않는 차. 수진, 짜증 나 미치겠다. 주변 경찰들이 다가오고...
수진 (두드리며) 공무집행 중입니다. (문을 열어보지만 안 열리고) 이봐요! 정말 이러실 겁니까?
빵빵 거리는 소리. 모여든 경찰들 때문에 차량 정체가 일어났다. 사람들 나와서 보고. 수진, 경찰 1에게 무전기를 받아서는
수진 (무전기 버튼을 누르고) 현재 2343 차량. 검문을 불응하고 있습니다.
본부 (F) 알겠습니다. 강제 견인 조치하겠습니다.
S#2. 견인 몽타주
수진이 보는 가운데, 레커차가 검문불응 차량을 들어 올리고 있다.
수진이 조수석에 탄 레커차가 차량을 견인해 달리고 있다.
레커차가 경찰서 입구를 통과하고 있다. 정문 보초의 경례에 수진, 경례로 답한다.
기술자가 주차장에 세워진 차량의 문을 따면, 수진이 문을 연다.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군 운전수...
수진 (Na) 그 시절 나는 교통과에서 근무 중이었고, 그날은 내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사람을 만난 날이었다.
S#3. 교통과 사무실 (D)
인서트) 경찰서 건물
수진, 책상에 앉아 맞은편에 앉은 운전수의 조서를 꾸미고 있다.
수진 음주 측정 거부하셨고요. 혈중 알코올농도 0.12... 음주운전이 문제가 아니라....
운전수 (말 자르며) 저 운전 안 했습니다!
수진 (기가 막힌) 네?
운전수 술에 취해서 운전 안 하고 잤습니다.
수진 그럼 제가 본 건 뭐지요?
운전수 (O.L.) 전 안 했다고요!
수진 우겨도 소용없으세요. 저희 CCTV 아래에서 단속하거든요. 까보면 다 나와요.
운전수 (놀라는) ....!
플래시백. 죄수복 입은 운전수가 감옥 창살을 잡고 절규하고 있다.
운전수 (표정 일그러지는) 안 돼요. 안 된다고요.
수진,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데..... 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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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허접한 시퀀스지만 극본을 쓰는데 꼭 필요한 용어와 기법이 다 들어가 있는 샘플이다. 이제 하나씩 살펴보면서 극본 쓰는 법을 읽혀보자.
S#1. 어느 도로 (N)
씬 타이틀이다. 씬 넘버가 1이고, 씬이 촬영되는 장소가 '어느 도로'이며, 때는 밤(night)이다.
어떤 사람은 씬넘버를 '#23'로 쓰거나 그냥 숫자만 '23'이라고 쓰기도 하는데, 어떻게 쓰던 상관없다. 숫자만 있으면, 관계자들이 그것이 몇 번 씬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장소는 특별히 지정해야 할 장소가 아니면, '어느 장소', '장소 일각' 등으로 써도 무방하다. 특별히 지정해야 할 장소라면, '경찰서 앞 도로', '창식 아파트 거실', '응급실' 등등 이런 식으로 쓰면 된다.
씬 타이틀의 마지막은 씬의 행위가 일어나는 때를 표시해 주는 건데, 제일 무난한 것이 'D, D/N, N, N/D' 등으로 쓰는 것이다. 가끔 초보자들은 새벽, 이른 아침, 아침, 오전, 오후, 늦은 오후, 저녁, 밤, 한밤 등등 디테일하게 표현하는데, 절대로 그럴 필요가 없다. 촬영은 당신의 의도대로 그 시간 대에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촬영에서 구분하는 때는 딱 네 개뿐이다.
D (day. 아침, 낮, 오후, 즉 환할 때)
D/N (day/night. 낮과 밤이 만날 때 즉, 저녁때)
N (night. 밤. 어두울 때)
N/D (night/day. 밤과 아침이 만날 때. 새벽)
어떤 작가들은 그 씬을 세트에서 찍는지, 야외 로케이션인지도 구분해 주기도 하는데,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때를 네 가지로만 구분해 주면, 나머지는 연출부 쪽에서 알아서 한다.
F.I. 경찰들이 음주 검사를 하고 있다. 경찰이 경광봉을 들고 차량을 도로가로 인도 중이고... 도로가에서는 정복을 입은 수진, 윈도우를 열지 않고 있는 차량 옆에 서 있다. 화가 잔뜩 났는데...
페이드 인(F.I)으로 화면이 열리고...
나머지는 지문들인데, 배경 묘사나 소품, 인물의 움직임, 심리 상태를 설명하다. 인물의 행동을 묘사할 때는 행동 위주로 정확하고 간결하게 표현한다. 보통 한 문장이 컷의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내가 보았던 지문 중에 가장 황당했던 것은 '그녀는 라면을 끓여먹고 입술을 닦았다'라는 것이었다. 최소 15분 정도 걸리는 내용을 한 줄의 지문으로 쓰다니! 지문이 시퀀스의 개념이면 좀 곤란하다.
그리고 이런 지문도 있었다. '한 떼의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목덜미를 할퀴고 지나갔다.' 전형적인 소설가 출신의 망생이가 쓴 지문인데, 연출이 불가능하다. 느낌은 알겠는데, 비주얼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다. 굳이 컴퓨터 그래픽이라도 표현해줬으면 한다면, 지문 앞에 CG라고 표현해 주길 바란다.
이 지문을 보고, 로케이션 담당자는 장소를 섭외하고, 소품 담당자는 경찰 차량과 경광봉 등을, 의상 담당자는 경찰복 등을 준비하는 것이다.
시나리오를 배운 작가들 중에는 지문에 '카메라 팬(Pan)해서 주인공의 얼굴을 클로즈업(CU)을 하고, 틸트 업(Tilt Up)하면 푸르른 하늘이 보인다'라는 식으로 쓰는 작가가 있는데, 당신은 절대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지문은 당신이 직접 연출을 하지 않는 이상 오버이다.
자신이 의도하는 대로 찍어줬으면 한다면, 카메라 무빙을 설명하는 대신 보여지는 그림을 묘사해 주는 것이 프로작가의 모습이다, 즉, 위의 예는 이런 식으로 쓰면 된다. '사내가 고개를 돌려 주인공 얼굴을 바라본다. 그러다 고개를 들면 푸른 하늘이 보이는데...'.
간혹 클로즈 업을 많이 쓰는 작가 있는데, 특별히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안 쓰는 게 좋다. 위의 지문만 봐도 '주인공 얼굴'이란 표현이 있기 때문에 감독은 알아서 클로즈 업을 찍을 것이다.
결국, 지문을 쓰는 것의 핵심은 당신의 머릿속에 그려진 영상을 글로 정확하게 옮기는 것이다.
경찰1 (E) 도난차량은 아니라는데요.
수진, 돌아보면 경찰1, 무전기를 들고 다가오고 있다.
이펙트(E)는 소리만 들리고, 모습은 보이지 않는 상황을 표시한다. 경찰1은 목소리로만 먼저 등장하고, 수진이 돌아보면 그제야 무전기를 들고 다가오는 것으로 등장한다. V.O. (Voice off)라고도 한다.
수진 (혼잣말) 그럼, 뭐야? (유리창 두드리며) 이보세요! 이것 좀 내려 보세요!
괄호 지문, 또는 소지문은 인물의 대사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연기나 표정, 상황 등을 표현한다.
소지문은 간결하게 써야 하며, 소지문이 길어지는 상황이라면 대사를 분리한 뒤 그 사이에 대지문으로 쓰는 것이 좋다.
위의 극본은 원래 이렇게 쓰여 있던 것이었다.
수진 (혼잣말) 그럼, 뭐야? (유리창 두드리며) 이보세요! 이것 좀 내려 보세요! (꼼작도 않는 차. 수진, 짜증 나 미치겠다. 주변 경찰들이 다가오고. 다시 두드리며) 공무집행 중입니다. (문을 열어보지만 안 열리고) 이봐요! 정말 이러실 겁니까?
본부 (F) 알겠습니다. 강제 견인 조치하겠습니다.
필터(F)는 전화 대화 상황에서 상대방 대사를 표현할 때 필터를 써 달라는 표시다. 무전기 소리도 당연히 필터 처리해야 한다. 라디오나 티브이 뉴스를 볼 때 들리는 디제이나 앵커의 목소리도 필터 처리를 하라 지시를 한다.
S#2. 견인 몽타주
수진이 보는 가운데, 레커차가 검문불응 차량을 들어 올리고 있다.
수진이 조수석에 탄 견인차가 검문불응 차량을 견인해 달리고 있다.
견인차가 경찰서 입구를 통과하고 있다. 정문 보초의 경례에 수진, 경례로 답한다.
기술자가 주차장에 세워진 검문불응 차량의 문을 따면, 수진이 문을 연다.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군 운전수.
몽타주(montage)는 여러 컷들을 의도적으로 이어 붙이는 기법인데, 보통 생각의 흐름을 표현하거나, 시간의 흐름을 표현할 때 많이 쓰인다. 미스터리 물에서는 진술과 함께, 진술 내용이 몽타주로 보이기도 한다.
수진 (Na) 그 시절 나는 교통과에서 근무 중이었고, 그날은 내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사람을 만난 날이었다.
내레이션(Narration)은 화자가 화면 밖에서 내용이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Na로 표기한다. 당신의 선생님이 내레이션을 쓰지 말라고 했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초보자들이 쓰면 너무 설명적이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내레이션과 화면의 정보가 각각 다를 때이다. 그러면 입체적인 묘사가 가능해 한층 몰입감을 더해준다.
S#3. 교통과 사무실 (D)
인서트) 경찰서 건물
수진, 책상에 앉아 맞은편에 앉은 운전수의 조서를 꾸미고 있다.
인서트 (Insert)는 씬과 씬 사이에 들어가는 정지화면을 말한다. 보통 이야기가 전개되는 장소의 외부 배경 화면을 인서트로 넣어서 그 다음 씬의 장소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 속하는지 알려주는 기능을 한다. 어떤 작가는 이런 인서트를 따로 씬으로 만들어서 빼기도 한다.
S#3. 경찰서 건물
S#4. 교통과 사무실
이렇게 써도 의미가 통하지만, 기능이 거의 없는 씬을 씬으로 분리해 별도의 독립된 씬을 쓰게 되면, 나중에 수정 등을 위해 씬 통계를 낼 때 불편함을 초래할 수 있다.
수진 그럼 제가 본 건 뭐지요?
운전수 (O.L.) 전 안 했다고요!
오버랩(Overlap)은 대사가 동시에 겹쳐지는 것을 말한다. 즉, 두 명 이상의 등장인물이 동시에 말하는 것이다. O.L로 표시한다.
오버랩은 두 개 이상의 화면이 겹치는 것도 의미한다. 수진의 얼굴에 고향 집이 오버랩된다, 이런 식으로.
운전수 (놀라는) ....!
플래시백. 죄수복을 입은 운전수가 감옥 창살을 잡고 절규하고 있다.
운전수 (표정 일그러지는) 안 돼요. 안 된다고요.
플래시 백(Flash Back)은 극 중 인물의 머리에서 섬광처럼 떠오르는 과거의 어떤 장면들을 표현할 때 쓴다. F.B.로 표기한다. 그런데 과거 장면만 쓰는 게 아니라, 상상의 장면 등에도 곧잘 쓰인다.
최근 드라마나 영화의 경향은 회상 씬 대신 플래시 백을 많이 쓴다.
회상 씬은 기본적으로 그 용도가 설명에 있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지루하게 받아들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플래시 백은 회상에 비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들어갔다 빠지는 데다가, 정보가 불완전한 편이라서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장점도 있다.
수진,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데..... F.O.
페이드 인(Fade In)으로 시작된 시퀀스는 보통 페이드 아웃(Fade Out)으로 마무리된다. 화면이 밝아지면서 이야기가 시작했다가 그 반대로 어두워지면서 이야기가 정리되는 것이다.
이렇게 극본 쓰는 법과 관련 용어들을 한 방에 다 배웠다.
더 이상 극본 쓰는 방식에 대해서 더 배울 것은 없다고 본다.
이제는 쓰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