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입을 못 시키면 끝장나는 거다.
감정이입을 못시키면 말짱 도루묵이다.
이제 '감정이입'에 관한 이야기를 할 차례이다.
당신이 이제까지 내 강의를 쭉 읽어왔다면 '감정이입'이 극작술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허구의 이야기를 '불신의 자발적 정지'를 해서 실제처럼 받아들이는 것의 근간은 바로 감정이입이다. 캐릭터의 매력도 감정이입을 통해야만 비로소 느껴진다. 뿐만인가. 감정이입은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응원하게까지 되고, 호기심을 이끌어 내 스토리를 끝까지 따라가게 만든다.
이렇게 중요한 감정이입일진대...
왜 당신이 가진 작법책들엔 왜 '감정이입'을 다룬 챕터가 없는 것일까? 내가 가진 수백권의 작법책에도 없다. ㅠㅠ
내 말을 못 믿겠으면, 지금 당신의 서가에 꽂혀있는 작법서들을 모두 꺼내서 감정이입이란 챕터가 있는지 찾아보라.
없을 것이다. 아니, 단언컨대 없다(심지어 로버트 맥키의 책에도 없다).
그러니 이번에도 당신은 닥치고 내 강의를 읽어야만 한다.
감정이입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인가?
감정이입은 관찰자가 어떤 대상에게 자신의 마음을 투사하여 일체감을 느끼는 정신 행위이다.
감정이입은 우리가 이야기를 접할 때 그 안에 빠져들게 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는 주로 주인공에게 자신의 마음을 투사해서 일체감을 느낀 뒤 그의 입장이 되어 이야기의 롤러코스터에 올라탄다. 때문에 이야기를 보면서 감정이입이 되지 않으면, 이야기에 집중도 되지 않을뿐더러 재미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작품을 감상함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가 감정이입인데, 거의 모든 작법 책들이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은 사실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한 동안 나는 이것이 작법책 저자들의 책임 방기라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감정이입이 작법의 영역이 아니라, 심리학이나 인문학의 영역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작법은 심리학과 결합할 때 파워풀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최근 내린 결론은 작법책을 쓰신 훌륭한 선생님들은 감정이입은 저절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말이다. 왜냐하면 감정이입이야 말로 기본 중의 기본 중이니까. 그래서 누가 하나가 감정이입을 다루지 않으니까, 그 이후에 작법책을 쓴 작가들도 자연스레 당연하다는 듯 다루지 않은 것만 같다.
즉, 대가들 입장에서 감정이입은 당신이 작법책을 보기 전에 이미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근데, 솔직히 모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사실 모르는 게 문제는 아니다. 모르면 배우면 되는 것이니까. 정말 큰 문제는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게 그동안 당신에게는 바로 감정이입이었던 것이다.
대가들은 당신이 감정이입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떻게 극본을 쓴다면서 그걸 모를 수 있지? 이래서 천재들은 초보자들을 가르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자기가 저절로 알게 된 걸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맨땅에 헤딩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작법을 축적해 온 사람 말이다.
각설하고, 본격적으로 감정이입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사실 이 전의 나의 강의를 통해서 여러 차례 감정이입에 대해 언급했다. 따라서 당신은 감정이입이 무엇이고,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번 강의는 새로운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몇 회에 걸쳐서 얘기해 왔던 것을 정리하는 게 될 것이다.
감정이입은 나와 인물 간의 동일시에서 시작되며, 동일시의 최소 요건은 인물에 대한 호감이다.
인물에게 강력한 매력을 느끼면 더 좋겠지만, 호감 정도만 느끼는 선에서도 충분히 동일시되며 감정이입이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호감은 매력의 시작점이자 전제 조건이며 기준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감상할 때 제일 먼저 주인공의 캐릭터에서 동질감을 찾는다. 그래서 호감이 느껴지면, 그다음 단계로 동경할 것 또는 동정할 것을 찾는 것이다. 물론 순서가 바뀌기도 하고, 동시에 보이기도 한다.
결국, 호감에서 시작해서 매력까지 느끼게 되면, 감정이입이 확실하게 된 것이라 보면 된다. 그다음부터 시청자들은 즐기는 일만 남는 것이다.
사실 캐릭터에 호감을 느낀다거나, 매력을 느낀다거나, 감정이입이 된다는 것은 '불신의 자발적 정지'적 측면에서 볼 때 거의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들 간의 온도차이는 존재한다.
호감은 매력의 부분집합이고, 매력은 감정이입의 부분집합이다.
즉, 호감 < 매력 < 감정이입
이는 시청자가 감정이입을 하는 데 있어서 매력 외의 요소가 있다는 뜻이다
그 매력 외적인 감정이입의 요소에 대해서 설명하기 전에 내 유년 시절의 '썰'을 먼저 만나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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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릴 적 별명은 '안방 샌님'이었다. 지극히 내성적이라 밖에 나가 놀지 않고 집에 처박혀 있어서 붙은 별명이었다. 집에서 나는 책만 줄곧 읽어댔다. 하지만 그리 넉넉한 집안이 아니어서 맨날 같은 책을 보고 또 보아야 했다.
그때 제일 많이 읽었던 책이 그림이 곁들여진 이순신 장군의 전기였는데,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는 대목부터 왜구와 싸우는 해전에서 연전연승하는 장면이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다. 그러다 원균의 모함으로 나무 감옥에 수레에 갇혀서 한양으로 끌려갈 때는 너무 억울하고 분했고, 백의종군해서 다시 전장에 나갈 때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는 장면은 매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전사하기 직전에서 멈추고, 다시 무과에 급제하는 부분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것이 내 유년 시절의 모습이었다.
당시 내가 제일 부러웠던 사람은 집에 책이 많은 아이들이었다. 나는 그런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야 할 때만 어렵게 용기를 내곤 했다(욕망이 행동을 부추긴다). 그래서 친구의 집에 놀러 갈 때면 너무 행복했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까지 정말 열심히 책을 읽었다. 친구 엄마는 놀러 와서 장난을 안 치고 친구까지 책을 읽게 만드는 나를 기특하게 여겨주시기도 했다.
이른바 '도장 깨기'가 아니라 '책장 깨기'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에는 정말 어렵게 우리 반 반장을 친구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반장은 우리 학교 고학년 담임 선생님의 아들이었다. 다른 친구들의 집에 있는 책들은 주로 형이나 누나, 또는 삼촌의 책들이었지만, 반장의 집에는 선생님 엄마의 교육열 때문인지 신간들이 많은 것으로 추정됐다. 그가 학교에 가지고 오는 책들이 거의 '새삥'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반장네 책장을 깰 차례였다.
나는 집에 한 번 놀러 가고 싶다고 반장에게 여러 번 졸랐고, 결국 허락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반장은 엄마가 사준 세계문학전집을 보여줬다. 우와, 반짝반짝 광채가 나는, 지문조차 묻지 않은 하드커버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중 한 권을 꺼내 들었고, 미친 듯이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었다.
저녁이 되었고, 반장의 엄마가 퇴근해서 오셨다. 나는 책을 읽다 말고 벌떡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아들에게 이렇게 멋진 전집을 사주시는 선생님이야 말로 진정한 챔피언이십니다.
"....!"
선생님의 표정은 차가웠다.
나를 보고 반장을 보았는데, 내 앞에는 이미 읽은 책들이 쌓여 있었고, 친구 앞에는 집짓기 블록이 놓여있었다. 선생님은 내 손에 있던 책을 매몰차게 빼앗더니 전집 전체를 장롱 속에 넣고는 열쇠로 잠가 버렸다. 그리곤 늦었으니 가라고 했다.
"네... 안녕히 계세요."
나는 인사를 하고 친구의 집을 나섰다.
반장의 집에서 우리 집까지는 꽤 멀었다. 나는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고, 엄마를 보자마자 서럽게 울었다. 울먹이며 내가 자초지종을 말하자 엄마는 나를 안아주었고, 당신도 우셨다.
몇 달 후 엄마는 곗돈을 타셨고, 그 돈으로 내게 국민서관에서 나온 30권짜리 고학년용 세계문학전집을 사주셨다(있는 집에서는 50권짜리 계몽사 세계문학전집을 보유하던 시절이었다).
그 전집은 초등학생 시절 내내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전집 중에서 <명탐정 홈즈>, <로빈슨 크로소우>, <15 소년 표류기>, <몽테크리스토 백작>, <레미제라블>은 정말 외울 정도로 읽었다(거기서 딱 한 번씩밖에 안 읽은 책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소공녀>와 <빨간 머리 앤>이었다).
한 번은 전집 중에서 <레미제라블>을 학교에 가져가서 수업 시간에 읽다가 걸려서 선생님한테 압수를 당했다. 교과서 안 쪽에 넣고 보면 안 걸릴 줄 알았던 것이 오산이었다. 선생님한테 울면서 싹싹 빌면서 돌려달라고 했지만, 선생님은 결코 내 책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 선생님은 한 번 압수한 물건을 단 한 번도 돌려준 적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수업시간에 책을 봤던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책꽂이에서 '영구결번'이 된 <레미제라블> 자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쓰렸다. 전집이라 한 권을 따로 구할 수도 없었다. <장발장>이란 단행본을 사서 그 자리에 꽂아놓아 봤지만, 결코 위안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아픈 기억만 떠오르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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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의 어린 시절을 당신과 함께 분석해 보고자 한다.
우선, 당신은 내 고해성사를 읽으면서 책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호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 나이 때 여러 분도 분명 책을 좋아했을 테니까(동질감 획득). 하지만 가난해서 읽고 싶은 책을 맘껏 볼 수 없었던 내게 연민도 느꼈을 것이다. 만약 당신도 어린 시절 가난했었다면 동질감을 연속으로 느꼈을 것이고.
하지만 당신은 더 많은 책을 읽기 위해 전략적으로 친구를 사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여러분과는 내가 다른 모습이고, 당신이 나를 동경할만한 요소이다. 여러분은 그 아이에게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그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뇌에는 거울 뉴런(Mirror Neurons)이 있기 때문이다. 거울 뉴런은 관찰 또는 간접경험만으로도 마치 내가 그 일을 직접 하고 있는 것처럼 반응한다는 신경세포이다.
우리는 이 거울 때문에 슬픈 장면을 보면 눈물이 나고, 에로틱한 장면을 보면 흥분이 되며, 액션 장면을 보며 통쾌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거울 뉴런은 우리가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우리의 뇌의 한 부분인 것이다(거울 뉴런에 대해 더 설명하고 싶지만, 그것은 작법의 영역이 아니기에 자제토록 하겠다).
사실 내가 작법서들에 감정이입을 다룬 장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계기가 된 것은 마이클 티어노의 <스토리텔링의 비밀>을 보고 난 후였다.
책 표지
(작법책을 읽다 보면, 참 그지 같은 것들도 많은데, 이 책은 정말 읽어볼 만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노골적으로 리메이크한 이 작법서에는 '감정이입'이란 챕터도 없고, 감정이입이라는 용어도 없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인용한 말로 인간이 언제 감정이입을 하는지 소개하고 있다.
그 내용을 내 스타일로 정리하면 이렇다.
우리는 인물이 연민을 자아내게 하거나, 공포를 느낄 때 그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연민은 누군가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생기고, 공포는 우리도 그런 불행을 겪을 수 있다고 느낄 때 생긴다.
내 유년시절의 추억담으로 돌아가 보자.
반장의 집에 놀러 가 저녁때까지 책을 보던 아이(나)는 반장 엄마가 돌아왔을 때 봉변을 당하고 만다. 읽고 있던 책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보는 앞에서 모든 책들이 장롱 속에 넣어지는 수모를 당하고, 집에서 내쫓기기까지 한다.
'존나 부당하다'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당신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스쳤을 것이다.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라는데, 훔친 것도 아니고 아들보다 조금 먼저 봤기로서니 그런 짓을 하다니! 나쁜 년!'
당신은 분노했을 것이고, 거기에 염장을 지르고 기름을 들이부은 건 그 엄마의 직업이 학교 선생님이라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아니, 학교 선생님이 어쩌면 저럴 수가 있지? 저래서 학교 가서 애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나 있겠어?'
이렇게 한껏 분노한 뒤, 당신 앞에 어린 내가 있다면, 이렇게 얘기했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이 아저씨(아줌마)가 책 사줄게."
즉, 도와주고 싶고, 응원해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감정이입의 완성은 매력을 너머 그 캐릭터를 응원하고 싶게 만드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호감은 매력의 부분 집합이고, 매력은 감정이입의 부분집합이라고 한 것이다.
동질감에서 호감이 생기고, 그 호감에 동경심이나 동정심이 더해져서 매력이 되고, 그 매력을 가진 이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응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기가 막히지 않은가? 세상에서 이런 논리를 만들어 내는 사람은 솔직히 나 밖에 없는 것 같다. 나중에 내가 이 강의를 묶어 책을 내면, '미친 스토리텔링'이라 해야하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논리를 전개하니까, 당신에게 뭔가 옛날에 봤던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 많은 작품들에서 주인공은 초장부터 왜 그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는지 말이다.
그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걸 평론가나 리뷰어들이 클리셰라고 비난한다고 해서 당신이 거기에 동참할 필요는 없다. 당신은 작가이다. 작가는 그 클리셰에서 공식과 원리를 발견해서 창의롭게 재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참 대단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레퍼런스가 그렇게 많지 않았을 텐데, 그런 통찰을 해낼 수가 있는지 새삼 그가 괴물처럼 보인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완전체로 전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그의 <시학>이 일부분 유실되지 않은 채 전해졌다면, 우리의 스토리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풍요로웠을 것 같다.
나는 수많은 작법서들이 결국엔 <시학>의 우라까이이자 리메이크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작법서를 만날 때마다 이번에는 어떤 시각으로 어떤 재주로 재해석을 했을까 하는 관점에서 본다.
어쨌든 아리스토텔레스 말마따나 우리는 '연민'을 자아나는 사람, 즉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고, 그리고 내 말마따나 그런 인물을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앞서 말했지만, 우리가 접하는 이야기 중에 대부분은 이처럼 주인공에게 호감이 생길만하면 바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직장 상사에게 아이디어를 빼앗기거나, 억울하게 누명을 쓰거나, 힘이 센 자에게 이유도 없이 맞거나, 문자 메시지로 해고를 당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시켜서 응원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감정이입을 시키는데,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은 매우 쉬우면서 효과적인 방법이다.
한 밤 중에 주인공이 귀가를 하는데 어둠 속에서 누군가 칼을 들고 쫓아온다면 우리는 주인공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안달이 날 것이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옥상에 불려 간 주인공 주위에 일진들이 둘러쌀 때 우리는 두려움에 가슴 졸일 것이다. 또한 아르바이트로 이삿짐을 나르다가 귀중한 도자기를 깨뜨렸을 때 우리는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 망연자실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공포를 통한 감정이입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것도 결국 '응원'이라는 키워드로 설명될 수 있다. 위험에서 빠져나오기를 응원하고, 고난에서 탈출하기를 응원하고, 환란에서 벗어나기를 응원하는 것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시학>에서 가장 강력하게 감정이입이 되는 상황을 알려줌으로써 화룡점정한다.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 자신이 그 대가를 치를 때 사람들은 가장 강력하게 감정이입을 한다.
내 유년 시절의 이야기 끝부분을 보면, 아이는 책을 너무 읽고 싶은 나머지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하게 된다. 수업 시간에 교과서가 아닌 책을 읽다가 압수당하는 대가를 치른 것이다. 그 대가는 매우 혹독했다. 다시는 돌려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저지른 일로 자신이 대가를 치르는 것이 왜 강력한 감정이입의 조건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런 것일 것이다. 부당한 대우가 불러오는 연민은 일회적이다. 어느 순간 잊혀진다. 하지만 나 자신의 선택에 의해 대가를 치른 일은 두고두고 후회가 되고 회한으로 남는다(나는 지금도 수십 년 전에 압수당한 책에 대한 회한이 있다. 그때 수업시간에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영구결번'은 없었을 텐데).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자신이 한 일로 대가를 치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늦잠을 잔 탓에 시험장에 못 들어가는 대가를 치렀거나, 노래방에서 노느라 어머니가 교통사고 났다는 소식을 못 받았거나, 잘못된 판단으로 전재산을 날렸거나 하는 등 말이다.
이런 식의 두고두고 후회가 되는 경험을 해본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 대가를 치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본능적으로 안다. 그리고 그 후유증이 얼마나 오래 가는지도. 때문에 가장 강력한 감정이입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 전체를 통틀어 끊임없이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의 기술을 계속 걸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도입부에서 주인공에게 충분히 감정이입을 시켜놓으면, 그다음부터는 주인공이 캐릭터에 맞게 선택과 행동을 잘하면 된다.
물론 가끔씩은 주인공임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감정이입을 시켜줘야 하지만, 과도하면 주인공이 어리석어지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