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작가는 별 관심이 없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여성 작가들은 멋진 로맨스 드라마 한 편을 쓰길 꿈꾼다.
잘 나가는 남배우를 캐스팅한 뒤 자신의 페르소나인 여배우를 통해 아름다운 사랑을 만들어 가고 싶은 로망 말이다. 하지만 그게 그리 만만치가 않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로맨스 드라마가 그냥 쓴다고 써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로맨스 드라마는 성공하기 매우 어려운 장르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청자들은 끊임없이 로맨스 드라마를 원하고, 많은 작가들이 그 뻔한 것을 뻔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다가 스러져 갔다.
나는 이 '초간단 레시피'를 통해서 당신에게 로맨스 드라마를 성공시키는 법을 가르쳐 주려는 것이 아니다. 사실 나는 로맨스 드라마를 성공시키는 법을 모른다. 하지만 망하지 않는 법은 안다. 그래서 난 당신이 로맨스 드라마를 썼을 때 망하지 않는 레시피를 알려주려고 한다.
내가 늘 얘기하지만, 당신이 작가로 성공하는 것보다 망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망하지 않으면 다음에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지만, 망해 버리면 그 다음에 기회를 얻는 것은 매우 어렵다. 요즘 드라마 한 편 제작비가 기본 백 억인데, 망한 작가에게 백 억 짜리 드라마를 다시 맡긴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기본에 충실하면, 망하기 쉽지 않을 뿐더러, 성공의 가능성도 있다. 또한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기본기가 충실한 작가로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성장을 시킬 작가'로 점 찍힐 확률이 높다. 그러면, 비록 처음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기본기가 탄탄하기 때문에 다음에는 성공할 수 있어, 하고 기회를 또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망하지 않는 것의 최소 요건은, 장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르에 충실하려면, 장르의 정체성과 문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로맨스 드라마는 로맨틱 코미디와 멜로 드라마, 이 두 가지로 나뉜다.
자, 로맨틱 코미디와 멜로드라마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일까?
당신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지도 모르겠다.
"로맨틱 코미디는 웃기고, 멜로드라마는 슬퍼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감상자들의 시각에서 봤을 때의 차이점일 뿐이다. 당신의 시각이 그 정도에서 머물면, 결코 작품을 보는 눈이 높아지지 않을 뿐더러 실력도 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작가로서 로코와 멜로의 차이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어야 할까?
로코와 멜로는 극단적인 차이가 있다.
로맨틱 코미디와 멜로드라마는 사랑의 완성점이 다르다.
때문에...
로맨틱 코미디는 사랑이 완성되면서 끝나지만, 멜로드라마는 완성된 사랑에서 시작한다.
이렇게 이해하고 암기하고 있으면 베스트.
로맨틱 코미디는 주인공 남녀가 서로에게 호감이 없는 비호감 상태에서 시작한다. 왜냐하면, 비호감이 호감이 되고 사랑이 되면서 결국 사랑이 완성되면서 끝나야 하기 때문이따. 따라서 둘의 첫 만남은 백퍼 악연이다.
여주인공이 첫 출근하는 날, 지하철에서 남주인공이 여주인공 옷에 실수로 커피를 쏟는다. 둘은 대판 싸우고는 '재수 없으면 또 보자'는 악담을 하고 헤어진다. 그리곤 정말 재수 없게도 다음 순간, 여주인공은 직장에서 남주인공을 직장상사로 만나게 된다. 맙소사! 그들은 허구한 날 티격태격하다가 정이 들고, 결국엔 사랑하게 된다. 로코 끝.
로맨틱 코미디는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핵심은 사랑의 완성이 마지막에 이뤄진다는 것. 그 완성된 사랑이 값지려면, 가장 사랑하지 않는 상태에서 시작해야 한다. 때문에 어떤 해프닝으로 인한 다툼으로 시작하고, 심지어 상대를 죽이고 싶은 상황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반면, 멜로드라마는 주인공 남녀가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지는데서 시작한다. 그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되는 곳은 주로 파티나 축제.
일단 사랑이 완성되면 그 다음은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견고한지 테스트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그들을 갈라놓기 위한 방해 카드가 한 장씩 제시되고, 그들은 그것을 극복해 나간다. 돈, 신분, 정혼녀 등장, 어두운 과거, 알고 보니 원수 집안 등등이 카드로 사용된다. 하지만 끝내 그 어떤 것도 그들의 사랑을 찢어 놓지 못한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해피 엔딩. 멜로 끝.
멜로드라마에서는 때때로 주인공 중 어느 한쪽이 죽기도 하는데, 결국 그들의 사랑은 죽음만이 갈라놓았다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멋있게 말하면, 진정한 사랑은 죽음을 초월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러브 스토리>, <타이타닉>이 그런 스토리이다.
로코와 멜로의 차이점을 알았으니, 이제 당신은 로맨스 미니 시리즈 기획안에 이런 문구를 써서는 안 될 것이다.
'로맨틱 코미디와 멜로드라마를 적절하게 섞어서 웃기고 울리고 싶다'.
만약 당신이 만든 기획안에 이런 문구가 있다면, 다른 사람이 보기 전에 지금 당장 지우기 바란다.
로맨틱 코미디와 멜로드라마는 절대로 섞일 수가 없는 것이다. 왜? 사랑의 완성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로코와 멜로를 뒤섞어 쓴 로맨스 미니 시리즈는 보통 주인공들이 속으론 너무 사랑하지만 겉으론 싫은 척 투닥거리며 진행되는데, 사랑스러움보다 가증스러움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잠깐이라면 모를까 이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내용이 지속되면, 당신에게 그 드라마는 재앙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로코와 멜로는 뒤섞는 게 아니라, 이어 붙이는 것이다. 어디서? 사랑의 완성점에서.
로맨스 미니 시리즈 = 로맨틱 코미디의 완성점 + 멜로드라마의 시작점
즉, 악연으로 시작된 두 주인공의 로맨틱 코미디에서 사랑이 완성되면, 장르를 멜로로 갈아타서 그들 사랑이 얼마나 진실되고 절실한지 확인한 뒤 사랑이 결실(결혼, 여행, 키스 등)을 맺는 식으로 스토리를 전개시키는 것이다.
이 로맨스 미니 시리즈는 서로 다른 장르를 이어 붙인 것이라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로코 영역에서는 여자가 좀 더 주도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멜로 영역으로 넘어가서는 남자가 좀 더 주도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로맨스 드라마는 여성향 판타지이기 때문에 로코 영역에서는 여성이 '하고 싶은 사랑'이어야 하고, 멜로 영역에서는 '받고 싶은 사랑'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니시리즈 로맨스 드라마의 로코 영역에서는 참신함을 절대적인 무기로 써야 한다. 남녀의 직업이나 캐릭터, 설정 등이 유니크해야 보는 이의 시선을 붙잡아 둘 수 있다. 가령, <별에서 온 그대>에서 외계인과 톱스타의 사랑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참신하다 하더라도, 4부 정도 넘어가면 진부함이 찾아온다. 당신은 알 것이다. 어지간한 로맨스 드라마도 4부까지만 재밌다는 사실을 말이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하나의 장르로 시리즈 전체를 이끌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로코는 필연적으로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기 때문에 지루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재빨리 멜로로 갈아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멜로가 시작되면 또 다른 진부함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때는 참신함 대신 상황의 디테일과 감정의 깊이로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그래야 로코 부분만 본 뒤 얌체같이 이탈하기 시작하는 시청자들을 돌려세워 끝까지 데리고 갈 수 있다.
요즘 복합장르가 유행이라고 이것저것 막 섞는데, 그것이 자칫 잘못하면 비빔밥이 아니라 단순히 짬시킨 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복합장르의 요령은 이렇다. 메인 장르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잡아놓고, 서브 장르를 문법을 슬쩍슬쩍 양념처럼 넣어서 맛을 내는 것이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는 시즌을 이어가고 있는 로맨스 물이지만, 이 드라마는 성장 스토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미국에서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낯선 파리로 건너간 에밀리의 직업적 성공기 위에 로맨스가 덧 씌워져 있는 형태인 것이다.
이제는 캐릭터에 대해서 얘기해 보자.
한국형 로맨스 미니시리즈의 시작은 로맨틱 코미디이다. 때문에 당신은 로맨틱 코미디의 남주 여주의 캐릭터 세팅을 해야 한다. 사실 로코의 남주 여주 캐릭터는 정형화 되어 있다. 때문에 당신도 똑같이 정형화된 설정을 해야만 한다.
남주는 실장님, 본부장님, 이사님, 대표님 등등인데, 하나 같이 재벌 2세나 3세이다. 즉, 내추럴 본 금수저인 것이다. 이런 주인공의 특징은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여자를 함부로 대하는 일면이 있으며, 주변에 진정한 친구가 없고, 외롭기까지 하다.
그런데 당신은 이런 설정이 식상하다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초특급으로 망하는 지름길이다.
여성 시청자들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한다. 그런 사람이 데이트 상대로 적합하지 않음을.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에 대해 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연애에서 여주가 끼어들 여지도, 알려줄 것도 별로 없다. 잔소리와 면박 등이 재수없음으로 이어지고, 남주 캐릭터는 즉시 비호감으로 전략한다.
당신은 이것을 '츤데레'라고 우길 수 있지만, 그것은 츤데레가 아니라 '재수없음'이다. 주의해야 한다.
요즘 로맨스 중드를 보면, 남주가 스타트업 출신으로 순식간에 부자가 된 인물이 자주 나온다. 이것은 얼핏 자수성가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 남주가 가진 내면은 '내추럴 본 금수저'의 그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별에서 온 그대>의 도민준은 외계인이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딱 '내추럴 본 금수저'이다. 그가 하는 행동은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남주 캐릭터를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여주의 캐릭터를 얘기해 보자.
여주는 티브이 앞에 앉아 있는 시청자의 내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시청자가 여주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마치 자기가 연애를 하듯이 남주와의 사랑이라는 모험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로코의 여주의 캐릭터는 대개 '평범'하다. 집이 부자이지도 않고, 엄청난 스펙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화려한 연애 경력의 소유자도 아니다. 또한 미모가 썩 훌륭하지도 않은데, 출연은 출중한 미모의 배우가 하게 됨으로, 정작 자신은 자신이 예쁘다는 것을 모르는 설정으로 간다(그 예쁨은 남주에 의해 드러나고 발현된다).
로코의 여주는 세상에 대해서 남주보다 더 많이 안다. 집안에 골치거리 가족이 하나 쯤 있고, 나름 어렵게 자라왔기 때문이다.
로코 여주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씩식함 또는 긍정성이다. 아마 시청자들이 자신도 그렇다고 생각할 확률이 매우 높다.
로코의 여주는 이런 씩씩함과 긍정성을 가지고, '야수'인 남주를 교화(?)시키는 '미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주를 무조건 평범한 집의 딸로 설정하는 것은 식상할 수도 있다. <별에서 온 그대>의 천송이는 세상에서 모르는 사람이 1인 밖에 없는 톱스타이다(그 1인은 바로 도민준). 그녀는 일반적인 설정의 로코 여주의 캐릭터와는 다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정체성(내면)은 보통 로코의 여주의 그것과 똑 같다.
사소한 댓글에 당신처럼 상처를 받고, 화났을 때 만화방에 가서 라면과 소주로 스트레스를 푼다. 만화를 보면서 웃고 울고 하면서.
하지만 실제 톱스타라면 그렇게 했을까? 백화점 명품관에 가서 명품 싹쓸이 하고, 클럽에 가서 발렌타인 30년 산을 물 마시듯 마시며, 골든 벨까지 울리지 않았을까?
실제로 그랬을 것 같다고 해서, 당신이 그렇게 묘사하면, 당신의 작가 인생은 시작부터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 할 지도 모른다.
로맨스 미니 시리즈의 여주인공은 여성 시청자들의 분신임을 잊지 말도록 해라.
자....
로맨스 미니 드라마를 쓰는 당신, 망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