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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원 Oct 05. 2023

원 포인트 레슨 : 클리셰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을 자주 보았을 거라 확신한다.




남자 주인공이 한 밤중에 여주인공을 찾아와 얼결에 여자의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여자는 남자를 재워주는 대신 방 중앙에 매직펜으로 선을 긋고는 그 선을 넘어와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받는다. 그리고 나란히 눕는데...  




예전에는 정말 많이 나왔지만, 요즘엔 젊은이들의 변화된 성의식으로 인해 잘 쓰이지 않는 고색창연한 클리셰 중 하나이다. 하지만 요즘에도 분명 어느 드라마에서는 이 장면이 나오고, 미래에 제작될 드라마에도 반드시 나올 거라 확신한다. 왜냐, 남녀 주인공을 밤중에 한 방 안에 있게 하는 것은 언제나 굉장한 흥미와 긴장감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녀 사이에 선을 긋는 클리셰를 순간, 보는 이들은 짜증이 나서 채널을 바꿔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너무나 많이 봐 왔던 장면이기 때문이다.




클리셰가 무엇인가? 진부하기 짝이 없는 뻔하디 뻔한 설정이나 장면 아닌가.




그래서 작가들은 이 클리셰를 클리셰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식으로 각색하거나 변화를 주기도 한다.




매직펜으로 선을 긋는 대신, 책꽂이에서 책을 꺼내 성을 쌓거나, 행거 옷걸이를 가져다가 놓거나, 심지어 베개를 가운데에 죽 이어놓고 베개 없이 누워있기도 한다. 때론 방 가운데 가상의 선을 설정한 뒤 넘어오지 말라고 하기도 한다.




이 책을 읽는 당신도 지금 둘 사이에 무엇을 놓으면 좋을지를 한 번 생각해 보라.




필통에서 필기도구를 꺼내 선 대신 이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침 방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이 있어서 거기에 홑이불을 걸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재활용을 하기 위해 모아둔 병이 있다면 병을 일렬로 세워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가? 클리셰 같지 않고 새로운 느낌이 드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새로운 오브제를 늘어놓아 봤자 여전히 클리셰일 뿐 인 것이다.




왜 그런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모두 어설픈 물리적 장애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즉, 방 가운데 그어 놓은 선과 같은 기능을 하는 동시에 의지만 있으면 누구나 넘을 수 있는, 장애물이라 하기에 민망한 오브제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클리셰를 어떻게 하면 창의적인(크리에이티브) 장면으로 바꿀 수 있을까?




일단 공식으로 보자.




크리에이티브 = 클리셰+캐릭터




사실 단 둘이 있는 방 안에서 장애물을 쌓는 여주의 캐릭터는 결국 모두 같은 캐릭터라 볼 수 있다. 방 가운데 선을 긋는 인물이나 행거를 놓는 인물이나, 심지어 연필을 길에 늘어놓는 인물이 모두 같은 캐릭터라는 것이다. 즉, 물리적으로는 선(장애물)을 넘어올 수 있지만 상대의 양심에 맡겨 넘어오지 말라고 하는 캐릭터라는 말이다.




자, 여주가 이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1) 여주가 주방에 가서 부엌칼을 가져와 남주와 여주 사이에 내려놓는다.




이 여주는 이전에 장벽을 쌓는 캐릭터와는 다른 캐릭터임에 틀림없다. 만약 내 영역을 침범한다면, 그땐 네가 죽거나 내가 죽거나라는 메시지가 들어있는 행동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사항전의 느낌이 강하게 드는 행동이지 않은가. 여기에 주방에서 부엌칼 대신 가위를 가져다 놓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좀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느낌이 들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두 가지 상황 다 남주에게는 섬뜩한 느낌을 주게 될 것이다.




2) 여주가 책꽂이에서 성경책을 가져와 남주와 여주 사이에 내려놓는다.




이 여주는 아마도 모태신앙을 가진 독실한 크리스천일 것만 같다. 남주와 여주 사이에 놓인 성경이라는 장벽은 물리적 장벽 그 이상이다. 즉, 남주에게 종교적 신념을 저버릴 수 있겠냐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렇게 클리셰에 캐릭터가 가미되면서 크리에이티브가 되는 것이다.




응용을 한 번 해보자.




코믹한 상황으로, 여주가 남주에게 선을 넘어와줬으면 하고 바라는 상황이라면?




여주, 방 끝에서 매직펜으로 선을 그으며 오는데, 남주 근처에 다다르자 선이 점선으로 바뀐다.




여주    (시선을 슬쩍 외면한 채) 자기야... (점선을 긋기 시작하며) 여기 넘어오면 안 된다아... 알았지?


남주    (먼산 바라보듯 허공을 보며) 흠흠... 사람을 어떻게 보고... 알았엉. (하며 검지로 점선을 차례차례 콕콕 찍으며 확인하듯 여주를 보며) 나 안 넘어간다?




결국, 클리셰는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그냥 클리셰로 남을지 크리에이티브가 될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클리셰를 창의적(크리에이티브)으로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그 클리셰를 행하는 캐릭터를 활용하는 것이다.




사실 창의적인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떨어진 것은 전혀 창의적이지 않고 생경하거나 생뚱맞아 보이기만 할 뿐이다.




클리셰는 달리 말하면, '이야기를 전개함에 있어서 효율적이지만 진부하게 만들 수도 있는 스토리텔링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클리셰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스토리를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만약 클리셰 없이 스토리를 만들게 된다면, 그것은 쓸데없이 길고 지루하며 번거롭기까지 하고, 심지어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런 장면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주인공이 시한폭탄을 해체하고 있고, 시간은 째깍째깍 흘러간다. 그러다 5초가 남게 되고, 주인공에게는 마지막 선택만이 남아있게 된다. 뇌관으로 가는 전선이 빨간색과 초록 색이 있는데, 둘 중 하나는 폭탄을 그 즉시 터지게 만들고, 다른 하나는 터지지 않게 만든다. 어떤 것을 잘라야 할까? 주인공은 찰나의 순간에 결정을 내리고, 빨간색이든 초록 색이든 어느 한쪽을 끊어버린다. 전자시계는 1초가 남은 상태에서 멈춘다. 주인공이 폭탄이 터지는 것을 막은 것이다.   




여기서 빨간색과 초록 색 클리셰를 쓰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게 되면, 누군가가 폭탄을 해체하러 가는 주인공에게 이번에 해체해야 하는 폭탄의 특수성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해야만 할 것이다. 또한 우연하게 폭탄을 발견해서 해체하는 장면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폭탄을 열어보는 순간, 폭발 메커니즘을 몰라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바로 폭탄이 폭발하고 말 테니까.




아무튼 클리셰를 피하려 군더더기를 넣다가 스토리가 늘어지고 복잡해지는 우를 범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빨간색 초록 색 라인 클리셰를 쓰면, 매우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해결이 된다.




이것이 바로 클리셰의 힘이다.




물론, 이 클리셰도 창의적으로 변용이 가능하다.




크리에이티브 = 클리셰 + 통찰




여기에서 통찰은 단어 뜻 그대로 새로운 시점에서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기능의 이해나 관찰의 디테일 등이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빨간색 초록 색 라인 클리셰의 본질은 '양자택일'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빨간색이나 초록 색이냐의 선택에서 삶과 죽음이 갈리게 되는 것이다.  




가령, 누군가가 주인공에게 진공관을 주면서 폭탄을 해체한 뒤 삽입구에 꽂으면 회로가 우회되면서 시한폭탄이 멈춘다고 알려준다고 하자. 이에 주인공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진공관이 깨질 여러 위기를 돌파하게 될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폭탄에 도착한 주인공은 서둘러 해체를 시작하는데, 마지막 순간 진공관 투입구가 두 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시간은 없는데, 어디에 꽂아야 될까? 그러다 모든 것을 운에 맡긴 뒤 어느 한쪽에 진공관을 꽂는데... 그 진공관에 불이 들어오며 회로가 우회를 하고, 끝내는 타이머가 1초에서 멈추게 된다.




이렇게 통찰이란 무기로 클리셰의 작동 원리를 이해함으로써 클리셰를 변주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하얀 거탑>에 쓴 장면을 예로 들어 보겠다.




수술의 천재인 장준혁은 외과과장 선거를 앞두고, 어느 호텔 객실로 자신의 라이벌인 노민국을 찾아간다. 그는 노민국 앞에서 무릎을 꿇고 후보 사퇴를 부탁한다. 하지만 노민국은 이렇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니 더욱 사퇴할 수 없다며 돌아가라고 한다. 하지만 장준혁은 물러난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 돌아갈 수 없다고 버틴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장준혁이 아주 싫어하는 교수가 나타나 그 장면을 발견하고는 황당해한다. 모멸감과 수치심으로 범벅이 된 장준혁은 벌떡 일어나 그 객실을 뛰쳐나가는데...




여기까지 쓰고 나는 그다음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그다음은 어떻게 써도 클리셰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다음 장면은 보통 '후 감정 씬'이라고 해서 인물이 어떤 감정 상태인지 표현해 줘야만 하는 씬이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작가는 제일 먼저 등장인물의 동선을 체크하게 된다. 그리고 감정을 체크하는데, 주인공은 수치스러운 장면을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들켰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에게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이고, 때문에 현장에서 최대한 빨리 멀어지고 싶을 것이었다.




일단 주인공은 객실에서 나와 복도를 뛰어간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마구 누르는데, 엘리베이터는 내려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뒤에서 교수가 나와서 볼 것만 같은 생각에 그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못하고 계단으로 우당탕탕 뛰어내려 간다.




하지만 이렇게 쓰면, 주인공의 얼마큼 화가 났는지가 표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보통 객실 복도에서 룸서비스 카트를 밀고 오는 호텔 직원과 부딪히는 클리셰를 쓰게 된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 상대에게 화를 내고는 뛰어가는 모습에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인공이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알게 만드는 것이다. 




아니면, 아무도 만나지 않고 우당탕탕 무사히 로비로 내려와 호텔 밖까지 뛰어나간 주인공은 숨을 고르며 걷기 시작하는데, 좀 전의 상황이 리마인드 되면서 화가 치밀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때 하필 발 앞에 음료수 캔이 하나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주인공은 홧김에 있는 힘껏 음료수 캔을 발로 차 버리는 클리셰를 쓰기도 한다. 그렇게 쓰면 보는 이들이 쟤, 화났군 하고 봐줄 테니까. 




당시 나는 룸 서비스 클리셰와 음료수 캔 클리셰 모두를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동안 수많은 국내외 호텔에서 묵어봤는데, 복도에서 룸서비스 카트를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호텔에서 나오다가 발로 차기 좋은 위치에 음료수 캔이 놓여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객실에서 뛰쳐나온 주인공 장준혁이 복도를 뛰어와 마침 그 층에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게 만들었다.




엘리베이터에 뛰어 들어온 주인공이 1층을 누른 뒤 닫힘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눌러 문을 닫는데, 문이 열린다. 그 재수 없는 교수가 아닐까 했지만 다행히도 아이 손을 잡은 엄마가 탄다. 그는 다시 문을 닫고 빨리 내려가기만을 바라는데, 아이가 밑으로 내려가는 모든 층의 버튼을 하나씩 누른다. 2, 3, 4 , 5, 6...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야! 소리를 치는 장준혁.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고 애엄마는 황당하게 그를 보는 상황에서 그는 다시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계단으로 우당탕탕 뛰어내려 가는데...




어떤가? 룸서비스 카트 클리셰나 음료수 캔 클리셰보다 낫지 않은가.




이렇게 클리셰는 캐릭터의 힘을 가미함으로써, 또는 그 클리셰의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크리에이티브하게 변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좋아요'를 누르는 건 결코 클리셰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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