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을 영웅 서사구조로
본격적으로 '세상의 모든 서사구조'를 하나씩 아작을 내보자.
수많은 서사구조 공식 중에서 최고는, 뭐니뭐니해도 영웅서사 구조 12단계이다. 조지프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신화 속의 영웅의 여정 패턴을 크리스토퍼 보글러가 스토리텔링을 위해 12단계로 정리한 것 말이다.
크리스토퍼 보글러는 자신의 책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스토리텔링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고대 신화의 패턴에서 일탈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스토리는 조악한 농담에서부터 지극히 고상한 문학에 이르기까지 영웅의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이 말에는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영웅의 여행'의 관점에서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대개 재미가 없다. 근데 그런 재미없는 이야기들을 영웅서사구조로 바꾼 뒤 보면, 대체로 재미있어 진다.
바로 이것이 영웅서사구조의 마법이다.
왜 그런 것일까?
영웅서사구조는 인간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때부터 진화해서 만들어진 가장 완벽한 플롯이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의 신화가 서로 입을 맞추지 않았음에도 비슷한 패턴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앞으로 다양한 스토리텔링 패턴을 배우게 될 텐데, 그 패턴들의 기준점은 바로 지금부터 배우게 되는 영웅서사구조임을 명심하고, 영웅서사구조 12단계의 뽕을 뽑기 바란다. 물론, 나도 최대한 다양한 예시를 통해 도울 것이다.
영웅서사 12단계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 있다.
보통세상 > 모험에의 소명 > 소명의 거부 > 정신적 스승 > 첫관문의 통과 > 시험, 협력자, 적대자 > 심연에의 접근 > 시련 > 보상 > 귀환의 길 > 부활 > 영약을 가지고 귀환
이게 뭔 소린지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근데 조금 지나면 뭔 소린지 명확하게 알게 될 것이다.
일단 이번 글에서는 12단계에서 5단계까지만 배우고 익힐 것이다.
3막 구조는 이야기를 세 토막으로 나눈다, 기승전결은 이야기를 네 토막을 나눈다. 그리고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구조는 이야기를 다섯 토막으로 나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패턴에서 1막과 기(起)와 발단은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은 같지 않다. 2막은 승전(承轉)이고, '전개-위기-절정'이다. 3막은 결(結)과 결말과 같은 것이다. 이 세 가지 패턴은 이야기의 본체인 2막부분을 세분화하는 데서 차이가 있다.
당신이 지금 1막(기 또는 발단)을 써야 한다고 치자, 무얼 어떻게 쓸 것인가, 좀 막막하지 않는가? 무엇부터 시작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 2막으로 넘어가야 할지 깝깝하지 않은가?
그럴 때 망설임없이 영웅서사구조의 처음 5단계를 쓰면 모든 근심이 해결된다.
왜냐, 1막(기 또는 발단)은 영웅서사구조에서는 5단계로 나누고 이 5단계를 사용하면 완벽한 1막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완벽한 1막은 보통세상 > 모험에의 소명 > 소명의 거부 > 정신적 스승 > 첫관문 돌파 이렇게 진행된다.
1. 보통세상 - 주인공이 사는 세상에 대해 알려주고, 주인공에 대한 정보를 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인공의 꿈(목표, 해야할 일)이다. 또한 주인공과 동일시하거나 연민을 하면서 감정이입을 하게 해야 한다.
2. 모험에의 소명 - 주인공에게 미션이 전달 된다. 그 미션은 주인공이 꿈을 이루기 위해셔 해야만 하는 것으로, 수사물인 경우 사건이 맡겨지는 것이고, 로코에서는 특별한 이성을 만나는 순간이다. 이 모험에의 소명은 주인공의 목표(꿈)를 명확하게 한다.
3. 소명의 거부 - 주인공은 망설이거나 공포를 드러낸다. 이 단계는 두려움에 관한 것이다. 수사물에서는 주인공이 사건을 맡지 않으려고 한다. 로코에서는 주인공의 연애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망설일 수도 있다. 그런데 망설이거나 거부하는 이유가 매우 합당해야 한다.
나는 왜 스토리마다 소명을 거부하는 부분이 나와야만 하는지 궁금했었다. 소명을 거부 안 하고 바로 미션을 수락하면 되지 않는가. 나의 의문에 대해 보글러의 책은 제대로 된 해답을 제시해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보글러에게 메일을 써서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영웅서사를 알게 된 뒤로 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마다 도입부(1막)을 영웅서사로 분석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데 소명의 거부가 없이 다이렉트로 스토리가 이어지는 영화나 드라마가 재미가 덜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럴까? 고민하고 궁리하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다.
'보통 세상'에서 우리는 주인공과 동일시하거나 연민하면서 감정을 이입하고 있었는데, 그의 입장에서 모험이 오는 순간, 두려운 거라... 그런데 그때 주인공이 소명을 거부하면... 우리 마음 속에서 이런 말이 터져나오는 것이다.
'나라도 그러겠다'.
그러면서 지금 진행 중인 스토리를 믿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불신의 자발적 정지'라고 하는 것이다. 주인공의 거부 행동에 동의하면서, 이야기가 가짜일 거라는 불신이 자발적으로 정지되면서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소명의 거부는 다시 말하면, 너라면 어떡할 건데 묻는 것이다. 그 답은 나라도 거부하지.
즉, 소명에의 거부는 이야기의 몰입을 돕는 심리적인 장치인 것이다(크리스토퍼 보글러에게 내가 알게 된 사실을 알려줘서 증보판에 보완할 수 있게 해주고 싶다).
여기서 당신이 바보 같은 질문을 댓글로 남길끼봐 예상 큐앤에이를 하나 남긴다.
매번 사건이 던져지는 시리즈 수사물의 경우에도 매번 소명 거부가 있어야 하나요?
그렇지 않다. 시리즈물의 경우 대개 파일럿에만 소명의 거부가 있다. 가령, 닥터 <하우스>의 파일럿을 보면, 하우스는 환자를 보라는 원장의 요구(모험에의 소명)을 거부하지 않는가. 하지만 결국 소명을 받아 들이고, 매번 환자를 받아서 에피소드 100개 이상을 가지 않는가.
4. 정신적 스승 - 정신적 스승은 주인공이 소명을 받아 들이게 돕는 역할을 한다. 로코에서는 보통 베프가 그런 역할을 한다. 니가 꿀릴 게 뭐가 있어, 당당하게 만나. 이런 식으로 자극해서 남자를 만나게 한다. 때론 정신적 스승이 어떤 신문 기사나 정보가 될 수도 있다. 정신적 스승은 사람이 아닌 경우도 많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어떤 메시지이든 소명을 받아들이게 하면 정신적 스승이다.
다시 말해, 소명의 거부를 거둬 들이고, 주인공이 모험을 떠나게 만드는 모든 것이 정신적 스승인 것이다.
5. 첫관문의 돌파 - 보통 첫관문의 통과라고 하지만 나는 '돌파'라는 표현을 좋한다. 이야기가 더 힘이 있어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어쨌든 첫관문을 돌파함으로써 이야기는 2막으로 넘어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여기서 첫관문은 안방에서 거실로 나오는 그런 문이 아니다. 이전과 다른 새로운 세상의 문이어야 한다.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문일 때 드라마가 재미있어진다., 가진 재산을 모두 팔아버리거나, 잘 다니던 학교나 직장을 그만 두거나, 연인과 이별 선언을 하거나 하고 2막으로 가는 것이다.
할리우드에서는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물고기에게 1막은 물이었다면, 2막은 뭍인 것이다.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와서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물 밖인 2막으로 나온 주인공을 궁금해 하고 여정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도 하고, 불신의 자발적 정지도 했지 않은가.
당신은 앞으로 단막의 도입부를 쓸 때 영웅서사 도입부 5단계를 이용해서 스토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미니 시리즈 1화를 쓸 때도 이 5단계를 활용해야 한다. 보통 미니 시리즈 1회는 긴 시리즈의 도입부이기 때문에 이 5단계로 구성된다는 사실은 안 비밀.
자, 그럼... 이제부터 여러분을 반복숙달을 시켜서 몸에 체화되게 하기 위하여 무자비한 예시로 들어가겠다.
하우스 포스터
미드 <하우스>
병원이라는 '보통 세상'에서 주인공 하우스는 천재 의사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병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해 다리를 절고 있다. 그는 환자를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데, 그 이유는 환자들이 자신을 환자로 보는 게 싫어서이고, 또 하나의 이유는 환자가 환자를 고치는 것을 환자들이 탐탁치 않게 생각할 거라는 것이다. 그런 그의 꿈은 당연히 의사로서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모험에의 소명'으로 원장이 맨날 뺀뺀이 놀지말고 환자들을 치료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많은 환자를 치료하는 꿈을 이루라는 것이다. 하지만 환자들을 대면하는 것이 두려운 하우스는 '소명의 거부'를 한다. 하지만 '정신적 스승'인 원장은 그를 계급과 계약서로 찍어 누르고, 하는 수 없이 하우스는 비대면에서 대면 의료의 세계로 '첫관문을 돌파'하는데...
개늑시 포스터
미니 시리즈 <개와 늑대의 시간>
어릴 적 태국 폭력조직에 엄마가 살해 당한 수현은 NIS(보통세상: 주인공이 사는 세상)에 들어가 요원이 된다. 그런데 임무를 수행 중에 엄마를 죽인 살해범 마오를 만나게 된다(모험에의 소명). 하지만 범죄조직의 두목인 그에게 두려움(소명의 거부)을 느껴 임무에 실패하고 만다. 방황하던 수현에게 NIS부장(정신적 스승)이 언더커버를 제안한다. 이에 수현은 NIS요원(물)에서 언더커버 케이(뭍)으로(첫관문 돌파) 다시 태어난다.
시크릿 가든 포스터
미니 시리즈 <시크릿 가든>
소방관 아버지를 사고로 잃은 길라임은 스턴트 일이라는 '보통 세상'에서 살아간다. 그런 그녀 앞에 김주원이 나타나면서 '모험에의 소명'을 받음과 동시에 그녀의 목표(꿈)은 김주원과의 사랑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길라임은 김주원과 신분 차이가 너무 나기 때문에 '소명을 거부'한다. 길라임과 김주원은 '정신적 스승'인 신비가든 주인장에게 약술(이게 정신적 스승일 수도 있다)을 받아온다. 길라임과 김주원은 약술을 마시고, 몸이 뒤바뀌며 '첫관문을 돌파'한다. 나중에 결국엔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지만, 이 순간만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여기서 정신적 스승을 신비가든 주인장이라 생각할 수도, 약술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위에 내가 분석해 놓은 것의 포인트가 당신이 분석한 것과 다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며, 누가 옳고 그른 것은 없다. 자기 식대로 분석해야 하고, 자기 식대로 영웅서사 5단계를 짜서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변호인 포스터
영화 <변호인>
'보통세상'에서 우석은 부동산 등기 전문 변호사로 성공해서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다. 그의 꿈은 이대로 무탈하게 사는 것이다. 그런데 선배로부터 부림 사건 변호를 부탁 받는 것으로 '모험에의 소명'을 받는다. 때마침 대기업 스카웃 제의도 받은 상태인데 국보법 사건을 맡는다는 것이 껄끄럽다. '소명의 거부'이다. 그런데 어려웠던 고시생 시절에 신세를 졌던 '정신적 스승'인 국밥집 주인이 사건에 연루된 아들을 도와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래서 우석은 부동산 등기 전문 변호사에서 시국 사건 변호사로 '첫관문을 돌파'하고 다시는 등기 전문 변호사로 돌아가지 못하는데...
일단 이 정도로 맛보기로 영웅서사로 도입부 만들기 강의를 마치고, 이후 몇 회 동안 당신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게 유명한 작품의 도입부를 분석해 볼 것이다.
지금 제시한 작품들은 비교적 옛날 작품(보글러의 책은 더 오래된 작품들을 예로 들었다)이라 여러분들이 내가 영웅서사로 분석해줬으면 하는 작품을 댓글로 남겨주면 감사하겠다.
그리고... 좋아요도 잊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