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낯선 곳에서, 나를 다시 보다

『 소레나 루밸라: 정서복원소』

by heyna

낯섦 / 해방감 / 작은 해프닝 / 익명성 / 감정 재발견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건
바람이었다.
한국의 공기와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결이 다른 온도.


택시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은
묘하게 익숙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완전히 다른 나라의 색을 갖고 있었다.

낯선 건물, 낯선 간판, 그리고 낯선 사람들.
그 안에서 혼자 걸어가는 나는…

이상하게도 ‘가벼웠다’.


누구도 나를 모르는 곳.
누구의 기대도, 평가도, 이미지도
내게 걸려 있지 않은 장소.


그곳에서 나는
내 표정을 신경 쓰지 않았다.
걸음걸이도, 말투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카페에 들어가 조심스럽게 주문하려 했지만
서툰 영어가 나도 모르게 꼬였다.

“Can I have… uh… one ice… hot americano?”


직원은 피식 웃으면서
컵 두 개를 내밀었다.
하나는 뜨겁고, 하나는 얼음이 가득했다.


“둘 다요? Just in case.”
그의 농담에, 나도 웃음이 터졌다.


한국이었다면 나는
‘오해하면 어떡하지’

‘실수한 거 알아챘을까’
‘부끄러워 보이면 안 되는데’
끝없이 내 반응을 점검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달랐다.
낯선 도시의 공기가 내 어색함을 가볍게 받아줬다.
내 실수는 그저 작은 해프닝이 되었고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만든 ‘나라는 틀’이 생각보다 좁았구나.”


길을 걷다 마주친 여행객들이
‘하이’라고 건네는 짧은 인사에도
나는 어쩐지 안도감을 느꼈다.


여기에서는
내가 ‘착해야 한다’는 압박도 없고,
‘눈치 보여서 웃어야 한다’는 부담도 없고,
‘왜 말 안 했어?’라는 누군가의 쟁반 같은 질문도 없었다.


그저,
내가 있는 그대로 존재하면 되는 공간이었다.


익명성은 자유로웠고,
자유는 내 안의 ‘진짜 나’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밤이 되어 숙소 창문을 열었을 때,
바람이 지나가며 속삭이는 것 같았다.


“너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야.
네가 너를 몰랐던 것뿐이지.”


그 말에,
나는 오래 묵혀 두었던 긴장을 조금씩 내려놓았다.


오늘 나는
익숙함에서 벗어나 낯섦으로 걸어왔고,
그 낯섦 속에서 오히려
가장 ‘나다운 나’를 다시 발견하고 있었다.


정서복원소 / 감정기록 / 해방감 / 감정 재발견 / 작가H.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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