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지옥
신도시로 이사 온 지 나흘차. 서울에, 아니 남양주에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어릴 적 강원도에서 자랐고, 눈이 6개월이 오는 곳인 오하이오에서 20대를 보냈다. 이젠 눈 오는 날이 ‘출근하기 힘든 날’ 중에 하루 정도가 됐지만, 우리 집 아이들에게는 눈은 무조건 "눈을 굴려서" 노래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어야 하는 날이다.
아침에 첫째 축구를 가려고 준비 중인데 비 같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내리고 말겠지 했는데, 눈발이 점점 굵어진다. 눈경력 대략 40년 차.
이 눈은 진짜다.
슬슬 바깥으로 나갈 준비를 해야겠다. 미취학 아동과 함께 야외로 눈놀이를 가려면 준비할 것이 많다.
옷은 내복 위에 맨투맨과 레깅스 하나를 입히고, 가장 바깥에 스키바지와 생활방수가 어느 정도 되는 패딩을 입는다. 괜히 추울까 봐 두꺼운 옷을 입으면 덥고 불편하다고 칭얼거리는 아이와 바깥에서 실랑이를 할 수 있다. 볼을 다 감쌀 수 있는 귀도리 모자와 목을 감쌀 수 있는 목도리를 착용한다. 장갑은 '다있어'에서 파는 털실로 만든 장갑 대신 생활방수가 되는 장갑을 끼워야 바깥에서 노는 내내 엄마의 속이 덜 탄다. 방수 부츠도 역시 필수품. 젖으면 말리기 세상 귀찮은 어그부츠 대신, 생활방수가 되는 부츠는 겨울철 내내 유용하게 쓰인다. (가격도 합리적이다.)
엄마와 아빠도 스키바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츠와 장갑, 방수패딩과 모자는 준비하자. 바깥에서 눈사람을 만들다가, 내가 눈사람이 되는 불상사를 피해야 하니깐. 애들은 2023년 F/W 시즌에 나온 패딩과 스키바지를 입혔고, 나와 남편은 10년도 더 된 새까만 스키바지와 5년은 넘은 패딩을 입는다. 눈진창을 대비해서, 출발하기 전에 현관문 앞에 비치타월을 깔아 놓는다. 드디어 놀이터로 출발.
12월 30일, 토요일, 다들 새해를 맞이하여 따뜻한 나라로 떠났나, 할머니집으로 떠났나. 고요한 눈이 하늘에서 펑펑 떨어지는데, 놀이터에는 딱 두 가족만 있다. 덕분에 놀이터에는 양질의 뽀얀 눈이 가득 쌓여있다.
아, 거참. 눈사람 만들기 좋은 날씨야
눈사람을 본격적으로 만들고 있는데, 첫째의 패딩이 눈에 들어온다. 이왕 사는 거 둘째까지 입히자는 마음에 구매한 그 2023 F/W 신상 패딩. 물려 입을 둘째 딸을 생각해서 색깔을 베이지로 샀는데 후회가 밀려온다. 25만 원이란 거금을 주고 산 패딩이 눈진창에 질척거리며 지저분해지기 시작했다. 괜한 마음에, "별이야! (덜 진창인)이 쪽으로 와서 놀자!"라고 소리치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올라가자마자 베이지 패딩을 세탁을 나의 운명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빨래 생각에 초조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는다.
눈 오는 날의 강아지처럼 방수패딩이 쫄싹 다 젖을 만큼 놀았는데도 더 있겠다는 아이들. 결국 '비야는 여기 살아, 엄마는 갈 거야'를 외치고 나서야, 모두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현관 신발장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눈 녹은 씨꺼먼 물이 뚝뚝 고이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현관문 앞에 깔아 놓은 비치타월 위에서 옷을 벗기 시작한다. 축축하게 젖은 옷이 안 벗겨진다며 양쪽에서 엄마를 외친다. 염화칼슘으로 바짝 건조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비누로 깨끗하게 손과 얼굴을 먼저 씻기고 로션을 듬뿍 발라준다. 그러곤 따뜻한 블랭킷을 주고 티비를 틀어준다.
눈놀이의 끝은 빨래지옥이다. 우선 염화칼슘을 지워야 하니 젖은 옷은 모두 세탁기에 넣어 놓는다. 애벌빨래가 필요한 베이지색 패딩은 부분 세제를 이용하여 따뜻한 물에 담가놓는다. 검은 때를 따뜻한 물에 불릴 동안, 현관문으로 가서 신발 겉면과 바닥에 녹은 눈이 염화칼슘으로 하얗게 변색되기 전에 부지런히 닦아준다. (물론 닦아도 하얗게 되긴 한다. But, better than nothing!) 다시 아까 담가놨던 패딩을 손으로 애벌빨래를 하고, 빨래망에 넣어 빨래를 돌린다.
이쯤이면 아이들 티비시간 30분이 끝났을 시간이다. 따뜻한 코코아를 한 잔만들어서 테이블에 세팅해서 눈놀이가 어땠는지 이야기 나눈다. 이 깨알 같은 '이야기 나누기' 시간을 놓치지 않는다. 종이와 색연필을 주고 눈놀이를 함께 그리고 있는데, 빨래가 다 됐다는 알람 소리가 울린다. 건조기에 있는 울코스를 한번 돌린다. 애들은 졸려서 징징거린다. 시계를 보니, 낮잠시간이 한참 지났다.
애들을 재우며 나도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건조기가 다 됐다는 알림이 울린다. 졸린 눈을 하고 패딩과 스키바지를 꺼내 건조대에 옆으로 눕혀 널고 제습기를 틀어놓는다. *리빙포인트: 구즈패딩은 '완전 건조'가 되어야 비린 구즈털 냄새가 안 난다. 나머지 옷은 표준건조로 다시 돌려야 눈놀이의 진정한 끝이다.
아무리 우리나라 3대 이모님 (식세기, 건조기, 로봇 청소기 이모님)과 고모님 (음식물 처리기, 에어프라이기등) 살림을 하기에 편해진 세상이라 그래도, 아직도 엄마 (아빠)의 손길이 많이 가는 게 살림이다. 다행히, 이모님과 고모님들과 함께라 이렇게 빨리 끝났다. 아니었으면 눈놀이 하루종일 빨래만 붙잡고 있었을 듯하다.
세상 모든 이모님과 고모님들에게 치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