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닥터 브리짓의 방

엄마를 잃은 내 마음 상태가 어떤지, 사실 나도 모르겠다.

by 헤이욘



00.

닥터 브리짓의 방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정말 힘드셨겠어요."


하얀 마스크 위로 보이는 고동색의 두 눈이 내게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나는 대기실에 있다가 방금 이름이 불려 이제 막 브리짓의 방으로 들어온 참이었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고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브리짓은 여전히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슬프긴 하지만 뭐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으니까요."


내 목소리는 방금 엄마를 잃은 사람치고는 안정적이고 차분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브리짓이 물었다. 나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막막해 잠시 숨을 고르며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진심으로 슬퍼하는 듯한 그녀의 눈이 조금은 거북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엄마가 암을 진단받은 순간부터? 아니면 내가 뒤늦게 발병 사실을 알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순간부터? 나는 일단 그녀가 듣기 좋게 지난 몇 년간 일어난 일을 시간 순으로 간략하게 정리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발병, 엄마가 항암을 거부하고 자연치료를 선택한 것, 작년 6월부터 급격히 상황이 안 좋아져 결국 7월에 말기암 판정을 받았으나 이미 항암을 하기엔 늦은 상태였고, 결국 지난 10월에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 까지. 이 모든 사건을 말하는데 불과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너무 빨리 말한 탓인지, 아니면 마스크 때문인지 숨이 조금 가빴다.


"무슨 암이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유방암이었어요."


브리짓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컴퓨터에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3년 전부터 내가 유일하게 찾아가는 의사 중 한 명이었고, 언제나 조용히 내 얘기를 듣고 진심 어린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취리히에서 정말 숱하게 많은 의사들을 만나보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의사 복이 별로 없었다. 브리짓을 주치의로 둔 건 내게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 제가 어떤 부분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그녀가 물었다. 나는 미리 연습이라도 해 온 사람처럼 말을 꺼냈다.


"상담치료를 받고 싶어서요."


그녀의 눈이 일순간 반짝 빛났다. 정말 잘 생각했어요. 상담 치료는 당신이 이 경험을 극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나는 조금 어설픈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내가 너무 차가워 보이는 건 아닌지 살짝 염려가 되기 시작했다. 혹시 지금 좀 슬퍼 보여야 하는 타이밍인가? 나는 처방전을 받아 저렴하게 상담치료를 받으려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브리짓의 따뜻한 두 눈을 피해 나는 잠시 그녀의 뒤에 있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 밖에는 뾰족 뾰족한 건물 지붕 위로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겨울 하늘이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날카로운 겨울 햇살이 내 눈을 찔러 나는 얼른 눈을 감았다.


한 손으로 눈을 가린 나를 본 브리짓은 재빨리 창가로 가 커튼을 닫았다. 그녀의 세심함에 나는 다시 고마움을 느꼈다. 그녀는 정말 내가 지금까지 취리히에서 만난 어떤 의사들보다도 나았다. 브리짓은 내가 현재 마음 상태에 대해 더 이야기하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나는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주절주절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는 골치 아픈 환자가 되긴 싫었다. 새로운 주치의를 찾는 일은 보나 마나 고되고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이기에.


그녀가 준 상담치료 기관 추천목록을 손에 들고 나는 병원을 나섰다. 밖은 좀 쌀쌀하긴 했지만 코트를 여미지 않아도 될 정도로 포근해서 집까지 좀 걷기로 했다. 정수리엔 따스한 겨울 햇살을, 얼굴엔 찬 바람을 맞으며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사에게 다녀오면 전화를 걸어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무슨 진단을 받았고 어떤 치료를 받을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게 우리 부부의 규칙이었다. 나는 그에게 브리짓이 상담치료를 적극 권장했으며 추천 목록도 받아왔으니 이 중 몇 군데에 전화를 걸어 예약이 가능한지 물어봐야겠다고 말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땠어? 하고 묻는 그의 질문에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파도가 나를 덮쳐 목까지 물이 차오른 것처럼.


그러게, 어땠더라? 나는 그렇게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마음이, 내 기분이 어떤지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게 최근 들어 점점 더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소식 들었어. 힘들었지? 정말 유감이야. 많이 슬펐겠다. 온갖 따스한 위로들이 마치 이 겨울 햇살처럼 내 위로 쏟아져 내리는데도 나는 이상하게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런 위로들을 마주하는 게 이토록 힘든 일인 줄을 나는 몰랐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브리짓에게 그랬듯 그저 덤덤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뿐이었다. 괜찮아. 그래도 이겨내려고 하고 있어. 나에겐 내 인생이 있으니까. 나는 늘 희망적인 말로 말을 끝맺었다. 마치 나를 염려하는 그들을 안심시키는 게 내 임무인 것처럼. 아무도 그러길 기대하지 않는데도.


전화기 너머의 남편은 아직도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손에 든 상담치료 기관 목록이 적힌 작은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1월의 고요한 오후, 버스와 사람이 수시로 오가는 취리히의 어느 길에 멍하니 선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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