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에게 화를 내는 것도, 또 그걸 후회하는 것도 다 괜찮다.
01. 슬퍼하는 이를 위한 매뉴얼 -상-
엄마의 장례식 이튿날부터 한동안 나는 거의 울지 않았다.
엄마를 모실 장지를 결정하고 발인을 하던 날에도, 유품을 정리하고 엄마가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여기던 광주 친정집을 리모델링할 때도, 심지어 사망신고를 하던 날도 나는 그저 덤덤하게 굴었다. 슬픔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딱히 울음을 참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아빠와 동생을 위해 큰딸 역할을 하느라 꿋꿋이 버텼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고요하고 눈물이 별로 나지 않을 뿐이었다.
장례식과 발인을 치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내게 엄마의 지인들이 말했다. 그래도 너 같은 큰딸이 있어서 엄마가 걱정 없으시겠다. 다들 바쁘긴 매한가지였는데 유독 내게 그 말을 건네는 사람이 많았다. 모두 내가 어릴 때부터 봐온 엄마와 가장 친한 이모들이었다. 큰딸이면서 막상 엄마에게 해준건 하나도 없는데. 웃으며 감사하다고 말하는 얼굴 아래 숨겨진 마음이 쓰라려 견딜 수가 없었다.
생전 엄마는 마음공부를 좋아했다.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 술 좋아하는 아빠, 걸핏하면 아픈 몸. 평생을 불안 속에서 살아온 엄마에게 마음공부는 좀 더 행복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을 것이다. 관련 유튜브 채널부터 온갖 도서까지 섭렵하는 등 엄마는 제법 열심이었다. 그렇게 배운 것들을 가장 많이 공유한 이는 바로 나였다. 당신 큰딸이 취리히로 이사 온 후 지독한 향수병과 산후우울증을 겪었음을, 엄마는 내게 직접 듣지 않아도 다 알고 있던 터였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법, 예기치 못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법부터 나 자신을 안아주는 방법까지. 엄마랑 한 번 통화하기 시작하면 한 시간은 기본이고 몇 시간을 내리 이야기한 날도 많았다. 마음공부로 시작한 이야기가 알토란에서 본 초스피드 김치 만드는 법으로 이어지는 날도 더러 있긴 했지만. 시시껄렁한 잡담이 반이라고 해도, 비행기로 12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모녀가 그리움을 해소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었다. 우리 딸이랑 얘기하다 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그렇게 말하며 통화를 마무리하는 엄마의 목소리엔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나중에 엄마 없으면 나는 어떡해? 이렇게 좋은 얘기를 누구한테 듣지?"
"엄마는 적어도 큰딸 네 걱정은 안 해. 너는 벌써 잘하고 있어."
내 걱정은 안 한다는 엄마의 그 말이, 그땐 왜 그리도 반짝반짝한 훈장처럼 느껴졌을까.
엄마가 항암치료를 시작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날, 그날도 어김없이 나는 엄마와 길고 긴 대화를 했다. 가족들 모두 엄마가 항암치료를 시작하길 바랐지만 결국 엄마는 정반대의 결정을 내린 것이다. 2시간여의 대화가 끝나고 내가 엄마의 뜻을 지지하겠다고 밝히자 엄마는 말했다. 큰딸이 있어서 든든하네. 정말 안심이야. 그때 나는 다짐했다. 엄마가 정말 내가 있어 안심할 수 있도록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의 편을 들 것이라고. 그리고 그 마음은 아마도 오래도록 변치 않을 것이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탁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그 다짐을 꼭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단단해 보였던 그 다짐이 몇 달 후 어느 오후에 하릴없이 모두 깨어져 버린다는 것을.
며칠째 야속할 정도로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던 12월의 어느 오후, 나는 은행에 들렀다가 동네 마트에 들러 아빠를 위한 반찬거리를 사서 집에 가던 길이었다. 오고 가는 어린이집 차량과 이를 기다리는 엄마들. 태권도 도복을 입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아이들. 하늘은 새파랗고 아파트 단지엔 활기가 넘쳤다. 기분 좋은 그 소란스러움 가운데, 어디에선가 봄에나 맡을 법한 달콤한 꽃내음이 났다. 그 향기에 나는 문득 올해 봄까지만 해도 이 아파트 단지를 엄마와 함께 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반찬거리가 담긴 작은 비닐봉지와 통장들이 들어있는 가방은 엄마가 들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세 살 된 아이를 쫓아다니느라 여념이 없었고, 엄마는 그걸 보며 웃다가 차 온다. 조심해, 하며 외쳤다. 아파트 단지에서 꽃을 발견한 아이가 할머니와 사진을 찍겠다며 엄마 손을 잡아끌었고, 나는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엄마 손에 들려있던 그 짐들을 뺏어 들었다. 3월의 봄 햇살 아래, 꽃 앞에 할머니와 손자가 나란히 섰다. 찍는다. 여기 봐야지! 하나, 둘, 셋-
날카로운 칼에 손이라도 베인 듯 회상에서 깨어났다. 계절은 겨울로 바뀌어 있었고, 햇살은 여전히 포근했으나 나는 혼자였다. 문득 내려다보니 손에 들린 반찬거리와 통장 가방이 보였다. 숨이 차오르고, 가슴 언저리가 뻐근하더니 급기야 귓속이 윙윙 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 좋게 느껴지던 오후의 소음들이 불쾌하게 뭉개져 저 멀리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엄마에게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
예기치 않게 찾아온 분노는 맹렬하고 뜨거웠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다 내팽개치고 거리 한가운데서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집으로 향했다. 엄마는 좋겠네. 다 훌훌 털어버리고 혼자 가버려서. 속이 다 시원하시겠어 아주. 우리를 봐요 엄마. 우리는 엉망진창이야. 아빠도, 엄마가 그렇게 아끼던 둘째 딸도. 내가 있어서 안심이라고요? 지금 내 꼴을 좀 봐요!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악을 쓰며 울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아직 밖에서 길을 걷는 중이었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마스크 아래 입술을 미친 듯이 깨물며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트에서 사 온 반찬거리를 반찬통에 옮겨담으며 안방에 누워있는 아빠에게 주절주절 말했다. 아빠가 좋아하는 반찬 몇 가지 사 왔어요. 식사 꼭 챙겨 드셔야 해, 아빠. 나는 씩씩하게 부엌을 정리하고 이불을 빨고 일부러 티비를 틀어놓고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엄마가 없어도 일상은 지속된다는 걸 아빠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사실 엄마가 돌아가신 순간부터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방에 가서 하루 종일 누워 자고 싶었다. 그런데 엄마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내 걱정은 안 한다는 엄마. 나를 믿고 떠난 엄마. 나는 실제로 엄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 엄마에게 그렇게 물었었다. 엄마, 내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 알지? 엄마는 흐려져 가는 눈을 간신히 떠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렇게 묻는 내 마음 한켠이 조금은 외로웠다는 걸,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장례식, 집 리모델링, 사망신고 등 광주에서의 일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나는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다시 취리히로 돌아갈 날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그전에 동생 부부가 사는 서울에서 시간을 보내다 갈 예정이었다. 엄마와 자주 갔던 집 근처 공원 앞에서 아빠는 내게 고생했어, 한 마디를 남기고는 서둘러 택시를 잡아 세웠다. 나는 그런 아빠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했는데 이게 뭐냐며 투덜대다가 못 이기는 척 택시에 올라탔다. 아빠는 내가 택시를 타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공원에 앉아 막걸리를 마실게 분명했다. 이제부터 슬픔을 견디는 건 각자의 몫이다. 나는 버스터미널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차창 밖의 익숙한 광주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오전 11시 50분, 센트럴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하는 우등고속버스. 나는 다시 한번 티켓을 확인하고 내 자리에 가 앉았다. 평일 오전답게 버스 안은 승객들이 별로 없어 한산했다. 문득 오랜만에 혼자가 되었다는 걸 깨닫자 가슴 위에 얹혀있던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오랜만에 스위스 핸드폰을 켜보았다. 한국에 온 후로 거의 방치되어 있었던 탓에 생각보다 많은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나보다 먼저 아이를 데리고 취리히로 돌아간 남편이 엄마의 부고를 알린 모양인지 미처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들에게도 제법 많은 메시지가 와 있었다. 대부분이 엄마의 명복을 빌고 나를 위로하는 내용임을,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아직은 그 메시지들을 읽고 답장할 엄두가 나지 않아 일단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그때, 문득 음성메시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취리히에서 가깝게 지내는 친구 중 하나인 독일인 A가 보낸 메시지였다. 나와 비슷하게 몇 년 전 병으로 갑자기 아버지를 여읜 친구로, 누구보다도 내 상황을 안타까워했기에 엄마의 임종 사실도 아직 알리지 못한 터였다. 나는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평소 냉철한 모습의 그녀 답지 않게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 나야. 방금 우연히 네 시어머니를 만나 소식을 들었어. 정말..... 정말 너무......"
그녀는 흐느끼느라 더 이싱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아마도 길에서 메시지를 녹음한 듯 주변에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기 너머 취리히의 한 길가에 서서 울고 있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누군가 라디오를 듣는지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작게 들리는, 겨울의 햇빛에 휩싸인 광주를 뒤로 하고 덜컹덜컹 달리는 한낮의 고속버스 안. 그런데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의 눈물이 쏟아져 나는 결국 고개를 파묻고 울고 말았다. 엄마 장례식 이후 약 한 달 만의 울음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비로소, 나의 진짜 애도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