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다 내린 눈이
눈꽃이 되어 날리듯 새로운 한 해를

<흰 눈>

by 그림책 READING GOING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우리에게는 아마도 그 어느 해보다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 한 해가 될 듯하다. 이루고자 한 것보다 이루지 못한 것이, 가지고자 한 것보다 놓친 것이, 그리고 만남보다 헤어짐이 더 길었던 시간이었다. 그러기에 한 해를 마무리하는 기분이 기한에 떠밀려 미처 마치지 못한 숙제를 제출해야 하는 학생 같다. 예년 같으면 어수선한 연말 분위기에 휩쓸려 또 한 해를 보내야 한다는 부담을 덜어보련만 고즈넉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한 연말, 저마다 짊어진 삶의 무게가 유독 더 무겁게 느껴진다. 이렇게 묵직하게 한 해를 보내는 마음, 공광규 시인의 시를 주리 작가가 그림으로 엮은 <흰 눈>을 보며 다독여보는 건 어떨까?


일 년 내내 내리는 눈


겨울에 다 내리지 못한 눈은


공광규 시인의 시 <흰 눈>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 어느 해보다도 사람들의 아쉬움이 진하게 전해지는 한 해여서 그런지 저 첫 시구에 마음이 멈춘다. 겨울에 미처 다 내리지 못한 눈이 올 한 해 하고자 했던 바를 다 해내지 못한 우리들의 마음 같다. 그런데 시는 그런 아쉬움을 다르게 받는다.


매화나무 가지에 앉고

그래도 남은 눈은

벚나무 가지에 앉는다.


거기에 다 못앉으면

조팝나무 가지에 앉고

그래도 남은 눈은 이팝나무 가지에 앉는다.


거기에 다 못앉으면

쥐똥나무 울타리나

산딸나무 가지에 앉고

거기에 다 못앉으면

아까시나무 가지에 앉다가

그래도 남은 눈은 찔레나무 가시에 앉는다.



겨울에 미처 다 내리지 못한 눈이 하얀 꽃이 되어 일 년 내내 온 세상에 내린다. 시구로 읽으면 후루룩 한 번에 쭈욱 읽어 내려갈 터이지만 주리 작가가 정성들여 그린 매화나무, 벚나무, 조팝나무들에 시선을 두고 읽어가다 보면 미처 내리지 못한 눈이 우리 마음에 다시 내리는 듯하다. 올해도 이제 끝이다. 그런데 내가 미처 다하지 못한 것이 많구나 하며 막막했던 마음이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눈꽃들에 시선을 빼앗기다 보면 우리에게 다시 새로운 한 해로 펼쳐진 시간이 열린다.

우리는 사실 알고 있다. 2020년 12월 31일과 2021년 1월 1일 사이에는 그저 우리가 지금껏 살아왔듯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시작되는 동일한 시간의 흐름만이 있다는 것을. 그 흐르는 시간들을 우리가 칸을 막고 구획을 세워 편의적으로 해와 달을 만들었다는 것을. 그런데 그 우리의 편의가 어느덧 우리 자신을 가두고 있었다는 것을 <흰 눈>을 읽다보면 새삼 깨닫게 된다. 겨울의 눈꽃이 봄의, 그리고 한 여름의 꽃눈이 되어 흩날리듯 시간은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최근 들어 심리학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겪는 마음의 불편함에 주목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긍정의 심리학'이다.

긍정 심리학의 학자 중 한 명인 앨버트 앨리스는 'ABC이론'을 주창했다. 사람들이 '좌절과 역경(adversity)'을 겪게 되는 원인을 일어난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belisf’, 좌절과 역경에 대한 자아 신념과 마음 상태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각자의 생각에 따라 결과(consequence)가 달라진 다는 것이다. 이른바 '비관론자'와 '낙관주의자'처럼 같은 일을 겪는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해석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고 앨버트는 주장한다. 그러니 결과를 달리할 수 있는 건 결국 '마음'이다. 겨울에 내리지 못한 흰 눈을 일 년 내내 피어나는 흰 꽃으로 받아내는 공광규 시인의 <흰 눈>은 그 자체로 앨버트 이론의 '정수'와도 같다. 삶에 대한 긍정의 시적인 승화다.


2020년 우리가 다하지 못한 시간은 이제 2021년이라는 새로운 한 해로 열려질 것이다.

그 시간을 매화나무로 부터 시작하여 벚나무, 조팝나무, 이팝나무, 쥐똥나무, 산딸나무,

아까시 나무에 내리는 눈꽃으로 만들 것인지, 미처 다 내리지 못한 흰 눈에 대한 미련으로

남길 것인지는 이제 우리의 몫이다. 다하지 못한 '미션 임파서블'이 아니라, 이제부터 한 해 내내 해내야 할 '파서블한 미션', 그게 우리 앞에 펼쳐진 새로운 시간의 숙제가 아닐까.


앉다가

앉다가

더 앉을 곳이 없는 눈은

할머니가 꽃나무 가지인 줄 알고

성긴 머리 위에 가만가만 앉는다.


그렇게 미처 다하지 못한 삶의 미션을 열중하여 살아가다 보면 어느새 할머니 머리 위에 가만가만 내린 눈처럼 세월이 나에게 온다. 머리에 눈이 내리다니 서러운가? 그런데 주리 작가의 그림 속 할머니는 그리 서러워 보이지 않는다. 흰 머리의 할머니는 계절마다 찾아오는 나무의 눈꽃들을 반기며 미소를 지으신다. <흰 눈> 속 찾아온 눈꽃들을 반기며 살아낸 할머니의 모습은 시모나 치라올로의 <할머니 주름살이 좋아요> 의 할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할머니의 주름살을 찾아낸 손녀에게 그 주름살이 만들어 진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인 추억과 사랑을 이야기해주시는 할머니처럼 하얀 눈이 머리에 얹힌 할머니는 우리의 계절에 느지막하게 피어난 한 송이 꽃이다.


그런데 왜 하필 흰 눈이었을까?


며칠 전에 눈이 왔다. 안 그래도 짧은 해가 어둑하니 곧 뭐라도 쏟아질 것 같아

서둘러 산책을 나선 길에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비라면 그런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난무하는 눈발 속에 제대로 눈조차 뜰 수 없었지만

'눈의 세례'를 받는 것 같았다.

꾸물꾸물 대던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나풀나풀 나리기 시작하면 맘속의 어떤 끈이

툭 풀리는 거 같은 경험, 다들 해보지 않았을까? 눈으로 하얗게 '도포'된 세상은

1분 후에 도로 사정을 걱정할지언정 잠시 잠깐이라도 눈만 보면 뛰어나가 반겼던

순수했던 동심의 시절로 우리를 인도한다.

아마도 그 '흰' 색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을 하얀 색으로 덮어버리는

그 '맹목적인 순수'의 지향이 우리로 하여금 잠시 세속의 삶을 잊도록 만드는 것이리라.

공광규 시인이 굳이 겨울에 미처 내리지 못한 흰 눈을 이야기한 건,

그저 다하지 못한 삶의 미션을 다하자 만이 아니라,

어떻게 다할 것인지에 대한 '지향'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겨울에 미처 내리지 못한 눈이 다음 해 내내 눈꽃이 되어 날리기를 바라는 마음은

눈으로 뒤덮인 세상을 마주했을 때 우리가 느끼는 바로 그 '정화'된 삶을 향한 소망이리라.

그리고 올 한 해 우리가 이루고자 했으나 미처 이루지 못했던 삶의 순수한 목표를 다시 한 번

살피고 그것들이 꽃이 되어 피어나도록 노력해 보자는 '결의'가 아닐까.

내 머리에 흰 눈이 피어날 그 시간이 부끄럽지 않도록.

한 해가 저문다.

<흰 눈>의 책장을 덮고 바라보는 한 해의 끝자락,

아쉬움 대신 2021년 내내 세상을 하얗게 덮어줄 흰 꽃들에 마음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