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
봄이 한창인 요즘, 꽃망울을 터뜨린 나무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언제부턴가 봄이면 하얗게 피는 이팝나무를 가로수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팝나무 꽃은 잎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기를 덮어서 눈이 온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아팝’의 유래를 두고는 활짝 핀 꽃송이가 배고프던 시절에 마치 쌀밥을 고봉으로 담아 놓은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이 나무는 한 해의 풍년을 점쳐보는 ‘점쟁이 나무’라고도 알려져 있다. 꽃이 만발하면 풍년이 들고 잘 피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올해의 봄은 이팝나무의 꽃이 가득하다. 하얗게 핀 꽃이 눈부시기도 하고 바람이 강하게 불 때면 온 세상에 눈이 내리는 것처럼 꽃잎이 날린다. 5월의 봄날 꽃잎이 풍성한 걸 보면 올해는 풍년과 같은 기쁜 소식이 많이 전해질 것 같다. 이처럼 산과 들에 꽃이 피어나고 화창한 봄날이 오면 생각나는 그림책이 『흰눈』이 있다. 책의 앞뒤 표지에는 벚꽃이 만발한다. 마치 눈앞에서 꽃이 핀 것처럼 보는 순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런데 그림책의 첫 장면에서는 흰 눈이 등장한다. 겨울 하늘과 풍경 사이로 흩날리는 흰 눈이 정말 꽃잎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꽃잎이 흰 눈이 되고 흰 눈이 꽃잎이 되는 마술 같은 흐름을 보여준다. 겨울에 다 내리지 못한 눈이 봄을 알리는 매화꽃이 되고 다시 벚꽃이 되었고 이제 눈은 오뉴월에 조팝나무 꽃으로, 이팝나무 꽃으로 피어난다.
그림책의 제목은 『흰눈』이지만 책에서 꽃이 가득한 이유는 왜일까? 계절의 흐름에 따라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겨우내 내린 흰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눈은 식물을 차가운 바람에서 보호하는 역할도 하지만, 봄에 눈이 녹아 흘러내리면서 수분의 공급원으로 뿌리 호흡에 필요한 산소를 공급한다. 이 보이지 않는 노력들로 봄의 꽃들은 더욱 활짝 피어날 수 있으며 가로수에 심어진 아팝나무처럼 눈부시게 꽃잎을 피워 선물하는 것이다.
겨울에 다 내리지 못한 눈이
매화나무 가지에 앉고
그래도 남은 눈은 벚나무 가지에 앉는다.
그래도 남은 눈은
이팝나무 가지에 앉는다.
겨울에 내린 흰 눈이 있어서 꽃이 자랄 수 있었던 것처럼 내 인생의 풍경에도 부부라는 연결을 통해서 또 하나의 생명들이 봄날의 꽃처럼 만발한다. 남편과 내가 만나 가정이라는 것을 꾸리고 아이가 생겼다. 아이가 생긴 것과 더불어 결혼생활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임신 8개월 차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고 건강한 아이가 세상에 나오길 맞이하는 시간을 가졌다.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하면서 남편과 매일 2시간씩 걸으면서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을 가졌다. 이른 아침 진통이 시작되었고 진통 끝에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동시에 나는 엄마로 탄생했다. 뱃속에서 품고 있었던 이 아름답고 소중한 생명체를 품에 안는 순간,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시댁 어른들과는 서먹한 관계였다. 첫아이의 탄생으로 시댁과 더욱 가까워졌고 시부모님의 돌봄과 손주 사랑으로 그동안의 거리감은 녹아내렸다. 또한, 딸의 출산 전 과정에 함께 하며 산후조리의 시간 내내 나와 아기를 세심하게 챙겨주셨던 친정엄마 덕분에 난 자식 사랑의 대물림을 경험했다.
한 생명이 태어나기까지 설레며 기다리는 부모의 사랑은 정말 크다.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의 기도와 바램들이 모아져 전달이 되었는지, 그리고 한 생명이 주는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크게 작용하는지 느낄 수 있다.
부모는 마치 한겨울에 내리는 눈과도 같다. 자녀의 탄생과 건강한 성장은 봄날의 꽃 같은 새로운 기쁨의 연속이지만 거기엔 한겨울에 내리는 눈과 같은 보이지 않는 손길과 인내가 있다. 우리 큰 아이는 여러 식구가 늘 안아주고 있어서 그런지, 바닥에 내려놓으면 자지러지게 울었다. 그래서 잠을 잘 때도 배 위에서 올려놓고 재웠고, 밤에도 자주 깨서 우는 경우가 많아, 세심한 관심으로 아이를 돌봤다. 새로운 생명체가 이 세상에 와서 누구의 아들로, 누구의 딸로 가족이 되고 목도 가누지 못했던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 성장한다. 첫걸음마를 시작한 때, 혼자 젓가락질을 시작한 때, 학교를 입학하던 시절에도, 부모에게 아이는 그 시절 시절의 꽃과 같은 존재이다.
“산에 피어도 꽃이고 들에 피어도 꽃이고
길가에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아무데나 피어도 생긴대로 피어도
이름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봄에 피어도 꽃이고 여름에 피어도 꽃이고
몰래 피어도 꽃이고 모다 다 꽃이야.
아무데나 피어도 꽃이고 생긴대로 피어도
이름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국악동요 : 모두다 꽃이야]
따듯한 온기와 행복감을 가득 안고 봄날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오는 꽃들이야! 말로 우리에겐 봄의 계절이 주는 엄청난 선물이 된다. 이런 선물 같은 존재가 ‘아이’가 아닐 듯싶다. 부모에게 자녀의 탄생은 엄청난 선물이자 부모라는 인생의 봄날을 맞이하게 한다. 결혼 전 ‘나’라는 존재는 ‘우리’로 바뀌었고 ‘우리’는 ‘가족’이라는 것으로 확대됐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하는 기쁨으로 가족으로 공유할 추억들이 매일매일 만들어지는 것이고 자녀를 통한 새로운 미래를 꿈꾸게 된다.
자녀가 자신만의 꽃나무로 자라기 위해 부모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꽃 같은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동시에, 자신만의 향기를 내뿜으며 스스로 아름답고 귀한 존재로 자라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흰 눈이 흰 꽃이 되는 마술보다 아이를 키워내는 과정, 부모의 사랑이야말로 진짜 마술과 같다. 지금도 부모로서 사는 누군가의 엄마와 누군가의 아빠에게 당신도 정말 멋진 꽃이라고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