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
흰 눈이 하얀 꽃으로 피어나며 이름도 낯설었던 하얀 꽃들이 셀 수 없는 눈송이처럼 흩날린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깨끗하게 덮을 것 같은 책에는 마음 속의 흰 눈이 계속 내린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작가 모리스 샌닥은 그림책을 ‘눈으로 보는 시’라고 표현했는데,
이 책은 언어예술로서의 그림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고요하고 전해주고 있다.
아직도 춥기만 한 이른 봄에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하는 매화나무를 시작으로
온 세상을 봄으로 가득 채우며 축제로 만드는 벚꽃나무가 피어난다.
꽃이 피기 전에 좁쌀만 한 꽃봉오리가 알알이 맺어
조밥 같다는 조팝나무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다.
꽃송이가 사발에 얹힌 하얀 쌀밥처럼 보이는 이팝나무는
흰 꽃으로 뒤덮이면 소복한 한 겨울의 눈꽃송이로 피어오른다.
작은 나팔모양의 꽃에 은은한 향기를 자랑하는 쥐똥나무는 이름과 달리 아름답다.
넉 장의 꽃잎이 십자가를 닮은 성스러운 나무는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산딸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었다고 한다.
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피었네 ~~~ ♬
어린 시절에 즐겨 불렀지만 잊고 있던 동요가 떠오르면 향기로 가득할 것 같은 아카시아나무 길을 빨간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인다. 나무 가지에 송글송글 맺혀있는 빗방울을 보니, 어느새 비가 그쳤나보다. 찔레나무 사이에 있는 고양이에게 할머니가 인사를 건낸다. 꽃잎은 계속 눈처럼 흩어지고, 할머니는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꾹꾹 눌러 담은 쌀밥도 소복소복 흰 꽃이 되어 눈처럼 쌓여 있다. 할머니의 밥상에도 어김없이 여러 가지 꽃들이 내려 앉아 그림으로 피어있다.
어느 새 붉은 노을이 진 하늘을 할머니는 조용히 응시한다. 커다랗게만 느껴졌던 할머니가 너무 작아져 버린 우리 할머니의 뒷 모습과 겹치면서 오래 전 하늘나라로 가신 우리 할머니와 젊고 곱던 엄마에서 이젠 할머니로 불려지는 우리 엄마가 그리운 마음으로 떠오른다.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한국전쟁에서 월남하여 처음 얻은 생명이다. 너무 귀하다고 눕혀 놓지도 않고, 안아서 키우셨다고 한다. 학업을 위해 먼 나라로 떠날 때 다시 보지 못할까봐 눈물 흘리셨고, 돌아왔을 때 추운 겨울에 먼 골목까지 마중 나와 기다리시던 우리 할머니. 몸은 계속 쇠약해지는데, 출가할 생각도 하지 않는 나를 보면서, 조금해 하셨고, 손녀 중 가장 먼저 막내가 결혼 할 때, 손주 사위와의 만남에 기뻐하셨다. 5월 8일에 태어난 증손주를 안아보시더니 생명으로 전해진 어버이날 선물을 받아보시고, 장미꽃이 온 세상에 가득할 즈음, 일주일 만에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이제는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는 나이가 되었는데, 한 노래가 들려왔다.
동네 담벼락 피어있는 꽃들을 보면 아직도 걸음 멈추는 사람.
엄마의 사진엔 꽃밭이 있어 꽃밭 한가운데 엄마가 있어.
그녀의 주변엔 꽃밭이 있어 아름답게 자란 꽃밭이 있어.
초록빛 머금은 꽃송이였지. 나를 찾던 별과 사랑을 했지.
그 추억 그리워 꽃밭에 있지.
나는 다시 피어날 수 없지만, 나를 찾던 별도 사라졌지만,
나의 사랑 너의 얼굴에 남아, 너를 안을 때 난 꽃밭에 있어.
김진호, '엄마의 프로필 사진은 왜 꽃밭일까' 중에서
이 노래를 들으면서, 그림책에 그려진 할머니의 옷과 빨래 줄에 걸려있는 이불과 허리 굽혀 일할 때의 모자에도 그려진 꽃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하얀 꽃밭 속의 할머니도 아기로 태어나 꿈 많은 소녀였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는 엄마가 되고, 자식이 결혼해서 할머니가 되었다. 할머니는 얼마나 많은 봄을 맞이했을까? 의식하지 못했지만, 만개한 꽃을 보면 멈춰 서고, 핸드폰의 앨범에는 저장된 꽃의 사진이 늘어간다. 유치해 보이던 화려한 꽃들의 패턴이 좋아지는 나를 바라보며 추억이란 이름으로 눈부셨던 순간을 잠깐이나 떠올린다. 노래와 함께, 생명의 순환이 가져오는 여자의 일생을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 아름다운 책을 읽으면서, 빈센트 반 고흐의 「꽃 피는 아몬드 나무(Almond Blossom)」를 떠올렸다. 반 고흐가 사랑한 동생 테오 부부의 갓 태어난 아이를 위해 그린 그림이다. 유럽에서 아몬드 꽃은 긴긴 겨울을 이겨내고 초봄에 가장 일찍 피며 새 생명과 희망, 그리고 부활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자신의 조카에게 준 첫 선물이자 그의 37년 인생 마지막 봄에 그린 마지막 꽃그림이다.
이 작품을 받은 아기 빈센트는 이 그림을 평생 소중하게 간직했고, 훗날 반 고흐 미술관을 세워 삼촌의 모든 유작들과 함께 기증했다. 「흰 눈」과 함께 바라보는 이 그림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느낀다. 어느 봄 날 꽃이 피어나고 있는 그 찰나의 과정을 바라보며 새로운 생명으로의 순환과 아몬드 꽃의 부활을 떠올린다.
할머니 머리 위의 흰 눈은 「꽃 피는 아몬드 나무」가 되어 계절마다 조용하게 이야기를 건내고 있다. 이 책과 그림으로 그리운 계절을 언제나 펼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