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 당신의 가슴을 덥혀준 사랑은?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어릴 적 성탄 연극을 보러 교회에 간 거 말고는 종교와 무관하게 살아왔지만 나 역시도 늘 이때쯤이면 괜시리 마음의 온도가 조금은 올라가곤 한다.
아마도 머리맡에 남겨졌던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이 준 행복이 내 뇌리에 깊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선물을 받을 즈음이 되면 착한 아이가 아니었던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산타 할아버지는 늘 선물을 주셨다.
그렇게 기억들은 시간이 흘러서도 우리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만든다. 샤를로트 문드리크, 올리비에 탈레크의 <무릎 딱지> 역시 그런 '기억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내가 어떤 아이든 늘 선물을 주시던 산타 할아버지의 빨간 색과 달리 안타깝게도 <무릎 딱지>의 빨간 색은 '아픈 상처'의 빨간 색이다. 엄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엄마가 떠났다
유치원생쯤이나 됐을까, 꼬마 남자 아이의 독백으로 이야기는 이어진다. 심리학자 존 볼비는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자신의 가장 가까운 주양육자와 '애착'을 형성한다는 '애착 이론'을 주장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애착을 형성하는 상대와 함께 하고자 하며 그런 욕구가 허용되지 않았을 때 '상실'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엄마가 영영 떠나게 될 거라고 말하자 아이는 처음엔 기다리겠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그러자 아이는 화를 낸다.
엄마가 자꾸 그러면 엄마 아들이 아니라고,
이렇게 빨리 가버릴 거면 나를 낳지 말지 . 뭐 하러 낳았냐고.
엄마는 그 말을 듣고도 웃었지만 아이는 울어버린다. '엄마는 저 세상으로 영원히 떠났어'라고 아빠가 말하자 아이는 '흥 잘 떠났어. 속 시원해'라며 소리친다. 아이는 화가 난다. 엄마가 가버리는 바람에 아침마다 지그재그로 빵에 꿀을 발라줄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어디 빵때문이었을까.
인간은 평생에 걸쳐 애착 대상인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살면서 만나는 여러 사건을 경험하고 애착 대상에게 돌아와 안전감을 회복하고자 한다. 마치 인생의 베이스 캠프처럼.‘
심리학자 존 볼비가 내린 ‘애착’의 정의다. 아이는 자신의 베이스 캠프인 엄마를 잃었다. 애착은 꼭 아이와 엄마와의 관계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다. 이론을 발표하던 초기에 모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볼비도, 만년에 이르러서는 인생 전반의 '애착'을 강조한다. 우리는 살아가며 '베이스 캠프'를 만들고 또 그 베이스 캠프를 잃는다. 내 마음의 베이스 캠프를 잃었을 때 제일 처음 나타나는 반응은 아이처럼 화를 내는 것이다. 나에게 있던 것이 없어진 상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매일 아침마다 지그재그로 꿀이 발라진 빵처럼 익숙했던 관계의 습관들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아니라고 해도 가슴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른다.
사랑은 그곳에 있다.
몇 밤이 지나자 아이는 엄마가 그립다. 그래서 엄마의 기억들을 붙잡으려고 한다. 엄마의 냄새를 잊지 않으려 한여름인데도 집 안의 창문들을 꼭꼭 닫는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게 귀도 막고, 입도 막는다. 그런데도 자꾸만 엄마가 희미해지는 거 같다. 그런데 아프니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괜찮아, 우리 아들. 누가 우리 착한 아들을 아프게 해?"
눈을 감으면 엄마가 팔을 활짝 벌리고 아이를 안아주는 거 같다. 엄마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 아이는 뛰다가 넘어진 상처의 딱지를 손톱 끝으로 긁어서 뜯어낸다.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오려 하지만 엄마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다. 자신의 몸에 피를 내서라도 '기억'을 되살리려는 아이의 모습이 그려진 붉은 색 톤의 그림은 아픈 아이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사랑이 가고 간 시간에 비례해서 기억은 흐릿해진다. 아이가 붙잡으려는 '냄새'만큼 휘발성이 큰 게 있을까. 아이처럼 상처를 내서라도 엄마를 붙잡으려 한다. 무릎 딱지를 뜯으며 흘리는 눈물은 그저 아파서만 흘리는 눈물이었을까.
그렇게 스스로 상처를 내서라도 엄마를 붙잡으려는 아이, 그때 엄마의 엄마, 할머니가 오셨다. 오자마자 창문부터 여는 할머니, 아이는 꾹꾹 닫아 눌렀던 마음을 터트려 버리고 만다.
'안돼, 안돼, 엄마가 빠져나간단 말이야.'
할머니께서 아이를 다독이신다. 아이의 손을 가슴에 올려주고는,
여기, 쏙 들어간 데 있지? 엄마는 바로 여기에 있어. 엄마는 절대로 여길 떠나지 않아.
아이는 달린다. 심장이 쿵쿵 뛰어서 숨 쉬는 게 아플 때까지. 그러자 엄마가 가슴 속에서 아주 세게 북을 치고 있는 것만 같다. 가슴 속에 엄마가 있다는 걸 느낀 아이는 이제 더 이상 무릎 딱지를 떼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가슴 위 쏙 들어간 곳에 손을 올려놓고 엄마를 느끼며 편하게 잠이 든다. 그림책의 초반 상실의 빨간 색은 이제 아이가 편안하게 잠든 마지막 장이 되면 엄마의 사랑을 나타내는 색이 된다.
누구에게나 상실의 시간은 고통스럽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관계'들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사회적 격리'의 시간을 겪으며 이런 상실들은 도처에서 우리를 울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깨닫게 된다. 어린 시절 산타 할아버지에게서 선물을 받았던 아름다운 기억이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그 시절이 되면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처럼 관계로 비롯된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이의 가슴 속 오목한 곳에 있는 엄마처럼 우리 마음 속에 켜켜히 쌓여있다는 것을. 사랑은 때로는 피범벅이 된 무릎 딱지 같은 붉은 색으로 우리를 아프게도 하지만 그 아픈 상처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의 붉은 마음은 남아있다. 사람이 간다고 해서 내가 사랑했던 시간마저 가는 건 아니다.
얼마 전 <방긋 아기씨>, <우주로 간 김땅콩> 등 그림책의 작가 윤지회 작가님이 영면하셨다. 인스타로 그 분의 씩씩했던 투병 생활을 지켜봤던 터라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아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남겨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모티콘 작업을 하셨다. 톡에서 윤지회 작가의 이모티콘을 쓸 때마다 그분은 가셨지만 떠나는 그 순간까지 의연하던 그 분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듯하다. 사랑하는 아들과 꼭 안고서 '사랑해'하는 이모티콘을 볼 때마다 아이의 가슴 속 오목한 그곳의 엄마처럼 윤 작가님이 떠오른다. 아마 작가님의 아이도 오래오래 그럴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고립'된 마음으로 힘들었던 한 해 , 그리고 고즈넉하다 못해 쓸쓸 하기 까지 한 크리스마스, 외롭다하며 힘들어 하기보다 자신의 가슴 오목한 곳에 숨어있는 '사랑'을 확인해보는 시간이 되면 어떨까. 나 역시도 올 한 해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그 외롭고 힘들었던 시절의 내 마음 속에도 충만한 사랑의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아이의 곁에 있는 아빠와 할머니처럼, 또 다른 ‘베이스 캠프’들이 나를 지탱하고 있다. 모두가 사랑이 충만한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되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무릎 딱지>를 권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