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기억법

by 혜윰

다시 미국 땅을 밟았을 때 처음 쿠스코에 갔을 때보다 내 행색은 더 거지꼴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익숙했던 나는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입국심사를 하는데 내가 영어가 짧아 대답을 천천히 했었다. 그렇게 심사가 끝난 뒤에 통과하는데 다른 직원 나를 다시 불러 세웠다. 나는 순간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이번엔 가방을 검사하겠단다. 아... 그때 나는 LA를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는데 경유 시간이 1시간도 채 남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나는 직원분에게 지금 나가야 한다고 핸드폰에 있는 내 티켓을 보여주겠다며 얘기했지만, 개인 프라이버시 상 내 핸드폰을 볼 수 없다고... 그러면서 천천히 하나씩 내 가방의 짐들을 다 꺼내놓았다. 그리곤 별것이 안 나왔는지 나보고 짐 다시 정리해서 가라고 말했다. 순간 기분이 매우 안 좋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빠르게 짐을 담고 국내선으로 뛰어갔다.


그렇게 뛰다 보니 무언가 깜박한 느낌이 들었다. 바로 다영이다. 나와 다영이는 한국으로 귀국도 같이했는데 옆에 있어야 할 다영이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미 국내선에서 체크인한 상황인데 연락도 안 되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나는 일단 비행기가 출발할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얼마 후 매표는 시작됐고 사람들이 한두 명씩 비행기에 타고 있을 때쯤 멀리서 다영이가 급히 뛰어온다. 왜 이렇게 늦었냐고 물어봤는데 입국심사장에 갇혀 있다가 왔다며, 한 무리의 중국인들이 있는데 자기도 거기에 휘말려 함께 잡혔다고 오도 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다행히 같이 잡혀 있던 분 중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이 잘 설명해서 같이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가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은 둘 다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렇게 잘 해결됐으니 정말 다행이다.


처음 비행기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던 그때와 같이 나는 밤하늘을 날고 있다. 하지만 방향은 다르다. 처음 떠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중이다. 창밖은 어둡고 고요하다. 나는 지난 7개월간의 시간 동안 많은 경험을 했다. 하루하루가 어색했지만 새로웠다. 그리고 알아갔다. 마치 갓난아기가 첫발을 내디디고 아장아장 걸어가는 모습처럼 나도 그랬다. 그리고 나는 많이 변해 있었다. 지금껏 살아왔던 나의 시간은 여행이 끝나는 기점으로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첫 비행기를 탔을 때의 긴장감 어느새 잊고 대신 설렘 가득한 마음을 얻었으며 언어라는 커다란 두려움은 어느새 나를 표현력 풍부한 사람으로 바꿔 주었다.


나와 다영이가 떠나던 날 게스트하우스에는 혜진 누나만 남고 문석이, 호진이, 승재도 함께 각자 여행을 위해 떠났다. 우리는 숙소 앞에 모여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며 아쉬울 겨를 없이 서서히 멀어졌다. 내 인생에 있어 큰 부분을 차지했던 이 여행은 나에게 많은 선물도 안겨주었는데 그중 가장 큰 건 바로 사람이었다. 사람 만나는 걸 좋아했던 나였지만 얼마 되지 않은 기간 동안 이렇게 끈끈하게 유대가 생긴 친구들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주었던 진호 형, 혜진 누나, 성윤이, 호진이, 승재, 문석이, 다영이까지 모두 다 나에게 있어 소중한 선생님이자 친구가 되었다.


나는 좋은 기억만을 갖고 돌아갔는지도 모르겠다. 당시에는 힘들었던 일도 지나가니 너무나 좋은 추억으로 남겨진 그래서 일기장에는 힘들지만 좋았던 추억을 더 많이 남겼던 것 같다. 아마도 그렇게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심 있었는지도 나의 여행은 지극히 감성적이었다. 그래서 좋은 장면으로만 편집되어 남겨 두었다. 여행자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짧은 여행을 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여행자의 삶은 이제 시작되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힘든 삶 속에도 버티게 해줄 수 있는 무기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데 나에게 있어 그 무기가 바로 여행이 되었다.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이 하나하나의 추억으로 채워지고 있다. 공간들은 나의 여행 이야기로 새롭게 빛나 채워질 것이며, 그 영롱하고 아름다운 빛들이 모여 하나의 책으로 완성되어 갈 것이다. 아무리 힘든 환경에 놓여 있다고 해도 나는 꿋꿋이 견뎌 나가 미래의 나에게 나만의 소중한 역사가 담긴 책을 선물을 주고 싶다.


여기에서는 짤막하게 언급만 했던 캐나다에서의 생활과 경험하면서 느꼈던 일들 그리고 인연들은 다음 일기장에 남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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