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어제 술을 많이 마셔 아침에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우리 중 맏이인 진호 형이 제일 먼저 떠나는 날이라 아침부터 분주했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다 같이 기다려주기로 했는데 이대로 헤어지게 아쉬워 게스트하우스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기로 했다. 마침 우리에게 항상 맛있는 음식을 해주시던 이모님도 배웅에 동참해 주셨기에 겸사겸사 함께 찍기로 했다. 다들 늦게까지 마신 술로 부스스했지만 그런 게 대수랴? 좋은 시간은 간직 할 수 있는 순간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는 곧 우리 앞에 도착했고 연말에 서울에서 한번 모이자는 인사와 함께 형님을 태운 택시는 출발했다. 우리도 어서 준비해야 한다. 우리의 여행을 위해 택시 대절을 했는데 곧 있음 도착이어서 다들 방으로가 준비하기로 했다. 직원분께서 택시가 앞에 도착했으니 내려오라는 말에 서둘러 이동해 택시를 탔다. 오늘 우리가 갈 곳은 모라이, 살리네라스 그리고 기억이 나지 않은 관광지다. 사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기보다는 기억할 수 없었다. 나는 택시에서 내리지 못하고 계속 잤고 친구들만 내려서 관광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숙취가 뒤늦게 찾아온 것이다. 짐을 싸러 올라갔을 때부터 갑자기 상태가 급격하게 안 좋아 졌다. 머리는 빙빙 돌았고 자꾸만 눈이 감겼다. 아무래도 어제 마셨던 술이 이제야 효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마시면서 불안했는데 아무래도 고산지대여서 그런지 그 증세가 더 심하게 왔다. 캐나다에서 이삿짐을 하면서 지냈던 7개월간의 생활에서 술을 잘 마시지 않았던 탓도 있었는지 몸이 버티질 못한 것이다. 그래도 차 타고 가면서 좀 자면 괜찮겠지라는 생각은 울퉁불퉁한 길을 마주하면서부터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기이한 현상까지 경험하고서야 더는 움직일 수 없음을 직감하고, 첫 번째 여행지에서는 그냥 택시에 누워 기절해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친구들이 택시에 타면서 나를 깨웠다. 나를 걱정해주는 친구들에게 괜한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너무나 미안해 어쩔 줄 몰라 배려해준 덕분에 많이 좋아졌다는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이 나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나로서는 정말이지 어디 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그래도 친구들은 웃으면서 괜찮다고 나를 되려 안심시켜주었다.
택시는 우리의 다음 여행지인 모라이(Moray)로 출발했다. 잉카문명의 농업에 대한 정수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3,500m의 고산지대서 농작하기란 쉽지 않았기에 모라이 농법으로 많은 실험을 진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형으로 이루어진 형태에 계단형으로 층층이 높이를 달리하여 햇빛과 바람이 각 층마다 어떻게 다르게 작용하는지 또한 그를 통해 각각의 높이마다 다른 농작물을 심어 연구를 진행했다고 하니 그때 당시나 현대에 와서도 굉장히 뛰어난 기술이라고 한다. 도대체 고대 잉카인들은 어떤 두뇌를 갖고 있던 것일까? 세계 7대 미스터리인 나스카 문양도 그렇고 마추픽추나 쿠스코에 도시를 건설했을 때 이미 상하수도의 개념을 이해해있던 것 등 아마 우리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고 남은 기록이 많이 없어서 그렇지 현대의 문화, 예술, 산업 등의 기술을 만들었던 천재들에게도 비견 될 만큼 많은 인재가 있었을 거라는 짐작을 했다.
여기서는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구경을 할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계절의 영향인지 초록의 풀들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멀리서만 볼 수 없기에 우리는 동그란 모양을 따라 천천히 둘러보았다. 멀리서 보는 거와 다르게 가까이에서 직접 보니 생각보다 크게 조성이 되어 있었다. 두 눈으로 모라이의 규모와 정교하게 원으로 가꿔져 있는 형태를 직접 보니 더욱더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시간상 마을까지는 가지는 못할 듯싶었다. 다음 코스인 살리네라스로 이동해야 했기에 아쉬움은 뒤로하고 택시로 이동한다.
각각의 여행지는 거리가 꽤 있기에 구경을 하는 시간만큼 이동 시간도 길었다. 또한 길이 완벽하게 포장돼있는 길도 있고 아닌 길도 있기에 더욱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에도 차 안에서 새로운 풍경들을 만나고 감상할 수 있었기에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혼자 왔으면 이렇게 편안하고 안락하게 여행했을까? 라는 생각도 했다.
협곡 사이를 지나 내리막길이 시작될 때쯤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에 그만 넋이 나갔다. 건조하고 메마른 붉은색의 토양만이 가득한 곳에서 새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 듯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마치 저 멀리 보이는 높은 산 꼭대기에 있는 눈처럼 말이다.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도 마음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어서 내려서 직접 눈으로 보고 만지고 싶었던 마음이 컸었는데, 아뿔싸 또 하늘이 빙빙 돈다. 아까 모라이에서 조금 괜찮다고 무리를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뜨거운 태양 빛을 쐬인 나는 몸에서 식은땀과 함께 기운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살리네라스가 바로 보이는 입구에서 쉬기로 했다. 다들 걱정스러운 눈빛을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잠깐만 쉬면 괜찮아 질 거라며 친구들에게 어서 구경하고 오라며 손짓했다. 참 술이 문제다... 아니다 내가 문제였다. 이런 좋은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을 정도로 몸 상태를 만든 나의 잘못 나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눈앞에는 넓게 다랑논처럼 펼쳐진 소금밭이 눈에 들어온다. 어떻게 해서 이 고산지대 산꼭대기에서는 눈처럼 하얀 소금이 나왔을까? 그 이유는 바로 지구의 지각변동으로 인해 생긴 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바다였던 이 지대는 지각변동으로 인해 땅이 솟아나 지금의 고산지대로 변했지만 오랜 시간 바닷속에서 터를 잡고 있던 탓이었는지 땅속에서는 계속해서 연분이 나온다고 한다. 아직도 옛날 방식 그대로를 유지하며 가업처럼 이어가고 있는 이 소금 농장은 졸졸 내려오는 투명한 물을 일일이 사람의 손길로 하여 새하얀 소금의 결정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농부들의 검게 그을린 피부에서 그간의 노력과 역사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멀리 친구들이 소금밭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점점 작아지는 모습이 마치 자그마한 인형들을 보는 것 같았다. 멀리서 나를 보면서 손을 흔들어주는 게 참 고마울 뿐이다. 나도 그런 친구들을 놓칠 수 없어 카메라로 친구들의 시간을 담아주었다. 그러다 작은 움직임을 느껴 렌즈를 다른 방향으로 옮겼는데 너무나 인상적인 장면이 포착되었다. 하얗고 높은 중절모에 양 갈래로 길게 땋은 머리카락 붉은 카디건과 감색의 팔랑 치마를 입고 한 손에는 소금을 담을 포대를 말아 움켜쥐며 힘찬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가시는 어르신이 눈에 띄었다. 하얀 백지 같은 곳에 붉은색 꽃이 피어난 듯한 모습으로 너무나 아름다워 갖고 있던 줌렌즈로 계속해서 따라갔다. 그렇게 몇 분 동안 눈을 떼지 않고 따라가던 중 나는 깜짝 놀라 셔터를 눌렀다. 한참 걷던 어르신은 갑자기 길을 멈춰서 고개를 뒤로 돌려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렌즈를 통해 보던 나는 눈이 마주친 거 같아 순간 놀랐다. 나를 바라보는 것이 확실하진 않았지만, 렌즈를 통해 느껴지던 시선은 결코 다른 사람을 본 것이라고는 느낄 수 없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살짝 돌아선 후 나를 바라보며 웃으며 인사하는 듯한 그 장면은 내 카메라에 담겼고, 사진을 확인하는 순간에는 확신이 들었다. 마치 본인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아셨던 것처럼 나를 바라보며 짓던 그 미소는 쿠스코를 떠나던 비행기 안에서도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다행인 것은 직업 정신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장면을 사진에 담았다는 것이다.
먼발치에 있던 친구들이 어느새 코앞까지 왔다. 이제는 다시 택시를 타고 쿠스코로 돌아가야 한다. 이는 나의 짧았던 여행이 끝에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너무나 허무하게 보내버린 마지막 여행이 가슴에 맺혀 응어리로 남을 뻔했지만 마지막 사진 한 장 때문에 모든 게 눈 녹듯이 사라졌다. 뒤를 돌아 천천히 한걸음씩 발을 뗀다. 떠나야 하는 게 아쉬운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천천히 걷던 중 계단을 오르던 어르신이 눈에 띈다. 전통 복장을 한 모습이 아마 여기에 사시는 듯했다. 힘이 드셨는지 오르던 계단 중간에 서서 한숨 돌리신다. 나는 그 뒷모습에서 나오는 무수한 인생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사람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을 촬영하는 걸 좋아한다. 정면으로 바라보며 촬영 하다 보면 가끔 인위적이거나 어색하게 느껴 원래 갖고 있던 얼굴이 아닌 게 익숙하지 않은 표정이 나오게 되는데 뒷모습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움에서 나오는 개개인의 특징들 그 사람의 내면에 숨겨진 마음이 뒷모습에 투영되어 보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잠깐의 생각을 끝내고 앞을 보니 할머니는 어느새 홀연히 사라지고 텅 빈 계단만이 있다. 이제 내가 그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나도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삶이 버거워 힘이 들 때는 한 번씩 중간에 서서 쉬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리하게 가기보단 조금 늦더라도 조심스럽고 정성스레 한 걸음씩 내딛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