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 들려온다. 어느덧 우리는 달동네에서 내려와 시가지와 가까운 곳에 다다랐다. 넷이서 두런두런 내려오다 보니 생각한 것보다 더 빠르게 내려온 듯했다. 잘 정비된 길 중간중간 가로등을 안내 삼아 중앙광장 쪽을 향해 걷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사람들의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크게 들려 그곳으로 향했고 그곳엔 정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가까이 다 가보니 왜 이렇게 시끄러웠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야시장이 열려있던 것이었다. 나에게도 익숙하던 풍경인데, 어렸을 적 부모님과 다니던 그때의 야시장과 제법 비슷해 적잖이 놀랐다. 각종 먹거리와 놀이까지 다양한 부스가 마련돼있었다. 우리도 군것질거리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구경하기 바빴다. 한창 야시장에 빠져 있을 때 한 친구가 아! 맞다! 우리 오늘 다 같이 모이기로 했지? 라는 말을 해서 순간 잊고 있던 약속이 떠올랐다. 우리 넷은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나 게스트 하우스로 향했다. 이미 게스트하우스에는 호진이와 다영이 그리고 큰형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술을 사야 했기에 다 같이 장을 보러 마트에 가기로 했다. 마지막 밤이라고 하니 못내 다들 아쉬웠던지 함께 나왔다. 한팀은 술을 사러 한팀은 안줏거리를 사러 갈라졌고, 나와 혜진 누나만 광장에 남아 두런두런 이야기 할 수 있었다. 누나하고는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더욱 빨리 친해질 수 있었는데 그러면서 서로 여행을 시작한 계기와 어땠는지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어나갔다.
내가 책에서만 보던 사람을 여기서 만나네? 라며 나는 신기한 듯 누나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누나는 6년간 정직원으로 있던 은행에 다니다 회의감과 함께 이 일이 나에게 맞는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이 있었다고, 그러던 중 이대론 안되겠다 싶어서 어느 날 사표를 냈다고 한다. 같이 일했던 동료직원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그런 누나를 응원해 줬다며... 그러면서 예전부터 떠나고 싶었던 남미로 가는 티켓을 끊었고 첫 번째로 간 나라가 내가 예전부터 제일 가보고 싶었던 나라인 쿠바였다. 누나는 밤에는 무서워 외출을 자제했다고 한다. 그래서 낮에 해가 떠 있는 시간에는 최대한 많이 돌아다녔다고, 그리고 습도도 높아 새벽에 깨는 일이 잦아 그시간엔 일기를 주로 썻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온 나라가 페루였고, 지금 우리가 머무는 쿠스코 게스트하우스에서 3주간 머물면서 직원분에게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었단다. 다음 여행은 아마 볼리비아를 거쳐 칠레로 갈 것 같은데 정확히 얼마나 더 있을지는 모르겠다며 웃어 보였다. 나는 그런 누나의 얼굴을 보면서 좋아 보였다.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었던 용기와 새로운 경험 하며 앞으로 내 길을 천천히 찾고 싶다고 하며 웃어 보이던 그 여유가 멋있었다.
멀리 친구들이 오는 게 보인다. 양손에는 먹을거리와 술이 가득 차 있다. 쿠스코의 대표 술인 피스코와 쿠스코 맥주가 눈에 보인다. 아마 오늘 우린 늦은 밤까지 이야기꽃을 피울 듯싶다. 다들 모여 돌아가려다가 이렇게도 모인 것도 인연인데 우리 다 같이 사진 한번 남겨 보자며 제안했다. 다들 흔쾌히 좋겠다며 응했고 우리는 그렇게 추억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진 한 장을 찍게 되었다. 사진 속 나와 친구들의 얼굴은 부스스하지만 그래도 풋풋했던 여행자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었다.
늦은 밤 우리는 2층의 숙소 대신 1층 잔디밭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였다. 사장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 시간 장소를 허락해 주셨다. 1층에 머물고 계셨던 손님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우리의 마지막 밤 이야기가 시작됐다. 첫 대화의 시작은 Pisco(페루산 알코올 90%의 브랜디)를 한잔 들이키며 시작됐다. 이 독하던 독한 술이 왜 이리 달게 느껴지는 것 모르겠다. 더욱이 여긴 고산지대여서 아직 완벽하게 적응을 하지 않으면 숙취가 심하게 생길 수 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나는 이 밤을 맨정신으로 보내는 건 낭만에 대한 배신으로밖에 볼 수 없다며 연신 한 잔씩 들이켰다. 그리고 술기 운이 알딸딸하게 내 몸에 체온을 높여준 시점부터 우리의 대화는 꽃을 피웠다. 각자의 여행 얘기와 여행을 시작하게 된 계기 그리고 앞으로의 일정들을 우리 두서없이 난장으로 주고받으며 분위기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순간 이 자리가 별빛처럼 반짝이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대화는 끝날 줄을 몰랐는데 밤늦은 시간 다른 분들에게 피해가 될까 2층으로 옮겨 2차를 이어가기로 했다. 1층은 직원분들과 이모님들 그리고 가족 손님이 머물고 계셨고, 2층은 도미토리룸과 2인실이 있었다. 우리 모두 2층에서 지내고 있었기에 공용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2층엔 우리 말고 새로 오신 남자 세 분이 있었는데 잠깐이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입사 동기 3명이 첫 출근 전에 여행 왔다고 했다. 두 눈에는 여행의 설렘들이 가득해 보였다. 우리는 쿠스코 정말 좋고, 여기 게스트 하우스도 너무 좋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술은 거의 떨어졌지만 우리의 수다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늘 그렇듯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행복한 시간은 어느덧 그 끝에 향했다. 하나둘 다음 여행을 위해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기 때문이다. 나와 몇몇 친구들도 내일 모라이, 살리네라스 여행을 위해 택시 대절 예약을 해서 더 늦게까지 시간을 보내기엔 무리일 듯 싶어 자리를 정리하기로 했다.
방안에는 그간의 여행길을 알려주듯 친구들의 거친 숨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왠지 시끄럽다기보단 정겨움에 더 가까이 있는 듯하다. 잠귀가 밝아 깊은 잠을 이루기 힘든 나이지만 여행길에서만큼은 언제나 깊은 잠을 잤었다.
늦은 밤 아직 새벽이 오기에는 시간이 많이 남은 어중간한 시간, 침대에 몸을 뉘고 나니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금방이라도 눈꺼풀은 내 두 눈을 가려 세상과 잠시 차단하고 밤보다 더 깊고, 영화보다는 더 화려한 이야기를 선사할 것이다. 오늘 나의 꿈엔 어떤 이야기가 쓰일까? 사뭇 궁금하기도 했지만 아마 꿈은 없을 듯하다. 이미 꿈같은 시간을 보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