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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워서갈비 Jun 29. 2021

엄마의 덕질에는 이유가 있다

햄과 아파트 그리고 딸


엄마는 햄 반찬을 자주 만들었다. 계란에 부친 햄, 구운 햄, 감자채에 넣은 채 썬 햄. 거의 매일 식탁에 햄이 올라오길래(물론 초딩이었던 난 그게 매우 좋았다)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 햄이 그렇게 좋나?" 엄마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맛있다이가, 햄." 그리고 이어지는 말들. "어렸을 때 햄이 참 그렇게도 먹고 싶었그등..."


부산의 한 판자촌에서 바다를 보며 자란 어린 시절의 엄마는 늘 가난에 허덕였다. 점심시간, 배가 고파 허겁지겁 도시락 뚜껑을 열어보면 콩나물과 김치가 들어 있었다. 옆자리에서 동그란 햄을 집어 먹는 친구를 흘깃 쳐다보다 눈이 마주칠까 봐 고개를 급하게 돌렸다. 먹을 수 없기에 햄은 유독 더 맛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 후로도 도시락 반찬에 햄이 들어있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 엄마는 햄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자가 되면 질리도록 실컷 먹을 거라고 다짐했단다.


이제 구색 갖춘 부엌의 주인이 된 엄마는 정말로 햄을 자주 식탁에 올린다. 어린 란이(엄마의 애칭이다)에게 어른이 된 란이가 햄 한 접시 매일 대접하는 거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햄 말고도 엄마가 덕질하는 게 있다. 바로 아파트다. 아파트를 덕질해? 당연히 햄처럼 마음껏 사는(buy) 것은 아니다. 아파트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엄마의 덕질은 아파트 청약 브로슈어를 들여다보거나 부동산에 전화를 해보며 가볍게 시작된다. 때로는 직접 모델하우스나 건설현장에 답사를 가기도 한다. 놀라운 점은 실제로 아파트를 사려는 목적을 가지고 가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참으로 무언가 바라지 않는 순수한 의미의 덕질이 아닐 수 없다. 아파트를 구경하고 온 날이면 신나는 콧김을 내뿜는 엄마의 모습에서 나는 젊은 시절의 엄마를 떠올렸다.


우리 집이 될 아파트의 계약금을 부치던 날, 엄마는 세상 부러울 것 없었다. 괜찮은 인생을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는 기쁨이 물결쳤다. 그러나 그때 엄마의 인생 한쪽 끝에서는 다른 결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엄마의 남편, 그러니까 나의 아빠가 불러온 폭풍이었다. 남의 부탁을 잘 들어주던 아빠가 떠안은 빚은 엄마의 몫이 되었다. 버티고 버티다 엄마는 아파트를 팔았다. 그리고 20년 정도 더 낡은 아파트로, 투룸으로 몇 번이고 이사를 다녔다.



햄과 아파트,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그러나 엄마의 덕질 대상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어리고 젊었던 시절의 엄마에게 결핍되어 있었던 두 가지라는 점이다. 햄을 거침없이 먹고 싶던 욕망. 그리고 내 공간을 갖고 싶던 욕망. 이 욕망들이 엄마의 결핍 속에서 태어났다. 결핍은 사람을 성장시키기도 한다던가. 어쩌면 맞는 말이다.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서 엄마는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렇게 조금 더 좋은 엄마가, 조금 더 성실한 노동자가, 조금 더 도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우물처럼 남는 결핍도 있다


다만 모든 결핍이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사랑' 같은 결핍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성장은커녕 인생에 우물처럼 뻥 뚫린 구멍을 만들기에.


엄마의 부모들은 이혼 후 홀연히 사라졌다. 중학생이었던 엄마는 남의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엄마를 며느리감으로 점찍어 둔 어느 집에서 먹을 밥과 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엄마는 졸지에 군식구가 되어 6년을 남의 집에서 살았다. 세월이 흘러 엄마가 대학을 갈 때에도, 결혼을 할 때에도 부모들은 엄마에게 관심이 없었다. 첫 아이를 낳던 날에도 엄마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춥고 넓은 분만실에서 혼자 오돌오돌 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단다.


한때 엄마는 지독한 정서적 결핍도 노력만 한다면 다시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한참 뒤 엄마의 엄마를 다시 만났을 때, 어린 시절에 대한 원망을 드러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결국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것이 '어린 란이'에게까지 가서 닿지는 못했다. 게다가 엄마의 엄마는 이미 늙고 병들어버려서 엄마는 '이제 와 뭐 하는 건가' 싶었더랬다. 어린 란이가 받지 못한 사랑은 그 시절에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실한 관계를 잃는 것은 삶의 틈이 조금 벌어진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두고두고 가슴을 아프게 한다. 어떤 것도 잃어버린 관계를 대신하지 못한다.
- 조앤 치티스터,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그렇지만 엄마는 단단한 사람이었다. 나쁜 운명에게 곁을 쉽게 내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물이 완전히 메워질 수는 없어도 덜 깊어질 수는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자신의 딸을 오롯이 사랑하는 것이었다. 결핍의 흔적이 딸에게는 조금도 남지 않도록 노력했다. 나의 결혼식과 분만일에 나보다 열심인 사람은 늘 엄마였다. 온갖 것을 퍼주고도 더 주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게 엄마는 딸의 생을 덕질하면서 결핍의 몸집이 조용히 수그러드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받음으로써가 아닌 줌으로써 결핍이 채워지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것이다.


가끔은 엄마의 결핍 위에 세워진 사랑을 낼름 받아먹는 내가 뻔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엄마의 우물이 유난히 찰랑거리는 밤, 엄마를 더 깊게 안아주려 애쓰는 것뿐이다. 우물이 조금 마르기를 기원하면서. 나는 또 간절히 바란다. 진정 덕질이 엄마를 자유케 했으면 좋겠다고. 엄마가 앞으로도 햄과 아파트, 그리고 딸을 마음껏 좋아하길 바란다. 엄마의 덕질에는 이유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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