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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워서갈비 Aug 09. 2021

상사에게 할 말 다 해보았더니

'사이다'에도 준비가 필요해


회사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가던 어느 날이었다. 불합리한 지시, 잦은 야근, 업무 외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몸이 망가져 갔다. 잠을 잘 자지 못해 하루 종일 머리도 멍했다.


가장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상사의 행동이었다. 그는 대외적으로 능력이 출중하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하지만 능력이 있는 것처럼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있는 것뿐이었다. 그가 윗선에 내미는 성과물들은 대부분 부하직원들이 한 것이었다.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부하들을 닦달해야 했다. 틈만 나면 직원들을 불러 모아 이것저것 지시를 했다. 특유의 온화한 목소리로 누구는 이거, 누구는 저거, 하면서 일을 배분했다. 중간중간 큰 배려를 해주는 듯한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주말이었다. 나는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었다. 앉은자리에서 단숨에 마지막 장까지 모두 읽고 책을 덮었다. 마음속에 불꽃이 일렁였다.



단적으로 말해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일세. 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어.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도 있어야 하네.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미움을 불사해야 한다. 책 속의 이야기가 내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불합리함을 뻔히 알면서 상사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던 내가 머릿속에 떠다녔다. 머릿속의 내가 용기를 내어 상사에게 할 말을 하고 있었다.



다음 날, 회의 시간이었다. 상사는 또다시 직원들을 불러 모으더니 일을 배분했다. 이번에는 타 부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끌어온 외부 일이었다. 다들 가뜩이나 일이 많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타 부서 일까지 얹어주다니. 원망스러움과 함께 의식 저 편에서 책 속 철학자의 말이 떠올랐다.



의식상에서 대등할 것, 그리고 주장할 것은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단 말이지. 그 자리의 분위기를 보고 수직관계에 종속되는 것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무책임한 행동이네.



바로 지금, 내가 용기를 내야 할 타이밍이었다. 미움받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 내 생각을 당당하게 주장하고 미움받게 된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자.


"저, 부장님. 그런데 이건 저희가 해야 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묘한 침묵이 흐르고 상사는 여전히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회사 일에 니 일 내 일이 어딨겠어? 자네는 원래 그런 것도 참고 못하나?"


아, 그다음엔 뭐라고 말해야 하지.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럼 상사가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할 줄 알았던가. 나한테 화살이 돌아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가. 당황한 나의 입으로 전혀 생각지 못했던 말이 튀어 나갔다.


"지금 저를 나무라시는 거예요?"


아아, 이게 아닌데. 아들러가 말한 건 분명 이런 게 아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상사가 나를 보며 이번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지."





나는 30분 동안 상사의 나무람을 듣고서야 겨우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감정의 배설을 했다면 시원하기라도 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았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건강한 방식으로 표현해야 통쾌한 것이었다. 생각보다 '사이다'가 아니었다.


'에잇, 괜한 책을 읽어가지고.'


당장 속상한 마음에 애꿎은 책을 원망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움받을 용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건 상사의 말에 대한 내 반응에서 알 수 있었다. 진짜 미움받기로 작정했다면 상사의 말에 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흔들리고 말았다. 미움받고 싶지 않았던 거다. 나의 행동은 자유를 위해 용기를 낸 것이라기보다는 허울 좋은 대들기에 가까웠다.



잘못된 행동에 대해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상처로 되돌아오지 않게 하려면 최소한의 준비 역시 필요하다. 나의 행동 때문에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더라도 괜찮을 수 있는 마음. 나에겐 이것이 최소한의 준비이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거다.


내 행동에 대한 이유를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유가 바로 섰다면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면 된다. 아들러가 말했듯, 그 이후에 따라오는 것은 타인의 몫이다. 타인의 반응까지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다. 단지 나는 용기를 냈고 미움받을 것을 각오했으며 그로 인해 자유로워진다는 것만 생각하면 된다.


정의감에서 터져 나온 설익은 용기는 나에게 해롭기만 할 뿐이다.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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