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룽하룽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는 핸드폰 속의 사진 한 장을 바라보고 있다. 딱딱한 나무로 된 검은 겉표지에 선명히 빛나고 있는 금빛 글씨. 몇 회 졸업, 지도교수 누구누구, 책의 제목, 그리고 그 책의 저자.
이제는 거울 속의 나를 똑바로 마주 본다. 부드러워진 표정, 단정한 눈동자, 웃음기마저 느껴지는 입가. 겉모습은 분명 나인데, 무언가 낯설었다. 하지만 그것이 나임을 이내 곧 알아채고 가슴이 뛰었다. 새로 만난 나. 낯설고 궁금한 나.
논문을 쓰기 전과 후의 나는, 이제 완연히 다른 결의 사람임을 인정해야 할 시점이 온 것 같다.
논문을 드디어 써 보기로 결심하고 써 내려갔던 시간들은 나를 부수고 재건축하는 실험의 장이었다. 한 사람의 기억 속에서 잊히기 전에, 그 과정을 기록해보려 한다. 괴로워했고, 부딪혔고, 깨어졌으며, 덕지덕지 붙여나갔던, 그 무수한 밤들을 말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브런치의 마지막 글 즈음에서 분명히 논문을 쓰지 않겠다는 선언마저 했었다. 물론 그때는 진심이었다. 사람의 결연한 다짐이란 게 대부분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절필(?) 다짐 후에도 나는 여전히 괴로웠다. 나는 결코 10년 넘게 해 오던 일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계속 나에게 질문했다. 너는 공부를 싫어하느냐고.
그 시기에는 나에게 여러 질문을 하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놓친 것이 하나 있었다. 혼돈 속에 있을 때 지나치게 자신을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린 결론은 엉터리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논문을 쓸 거라고 말하든, 그렇지 않다고 말하든 그건 믿을 만한 것이 못 되었다.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은 연달아 일어난 의외의 사건들이었다. 아침부터 번뜩 눈이 떠진 어느 날. 영화 속에서처럼 복선이 있거나 무언가 암시하는 내적 배경음악이 깔린 것도 아니었던, 평범한 날. 그날부터 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리상담이 있는 날이었다. 상담가를 만나자마자 불쑥 말했다.
“저, 아무래도 떠나야겠어요.”
어떤 계획도 상의도 없이 나의 직관만으로 이루어진 대범한 결심.
나와 헤어질 결심.
상담가는 어디로, 그리고 왜 떠나냐고 물었고, 나는 또 준비한 사람처럼 술술 말했다.
“아이를 돌보아 줄 분들이 계신 곳으로 갈 거예요. 그리고 저 훨훨 날아다녀 볼래요. 딱 1년만요.”
말을 마치자 가슴이 1년 만에 쿵쾅댔다.
집으로 달려왔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다급하게 합의를 했다. 홀린 듯 시댁 근처 어린이집에 전화를 걸었다. 원아모집이 모두 끝난 2월이었다. 아이 연령대 반에 자리가 있었다. 엊그제 결원이 생겼단다. 급기야 얼굴마저 빨개지며 나는 ‘이거구나’ 싶었다. 온 우주가 나를 밀어주고 있다!
다시 시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역시 빠른 전개로, 하지만 진심을 담아 상황을 말씀드렸다. 한참을 들으시더니 짧게 말씀하셨다.
얼른 올라오너라.
그렇게 시댁에서 3분 거리 아파트에 덜컥 집을 계약하고, 나는 3주 후 그 지역 주민이 되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무모하고 멋지며 미친 짓이었다.
나는 나에게서 떠나고 싶었던 것 같다. 지루하리만큼 오래된 나. 틀에 박혀 있고, 지나치게 열심히 살며, 몸을 못살게 구는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조력자가 있는 곳으로 가서 아이를 맡겨 놓고 동네 서점도 다니고, 사람들도 만나고, 유튜브나 팟캐스트도 해보고 싶었다.
아니 아니. 그냥, 긴긴 내 시간을 갖고 싶었다. 엉터리가 아닌 판단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일단 나를 돌려놓고 싶었다. 그렇게 내가 세팅되고 나서야 무엇이든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걸 안 순간, 잠깐의 숨도 돌리지 못할 정도로 간절해졌다. 다급했다.
내 입 속에는 자꾸 어느 시의 구절이 맴돌았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룽하룽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이형기, <낙화> 중 일부.
떨어지는 꽃잎이 꼭 마지막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와 헤어지길 결심한 순간부터, 나는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다 아래 축축하고 차가운 땅을 박차고 서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