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슬픔과 분노만 따라오는 걸까?
2008년 4월 1일, 결혼 날짜를 받아 둔 그날 나는 공덕에서 중학교 1학년 여학생 과외를 하고 있었다. 아이는 그 나이에 맞는 짓궂은 장난을 했고 나는 거짓말이 나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그 아이 장난을 진짜로 만들었다. 내가 싫어서 과외를 관두고 싶다는 장난을 그대로 인정하고 관둬 버렸다.
5년 전, 어머니는 1년 시한부 삶을 선고받으셨다. 아들들은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같은 공간 항암을 같이 했던 비슷한 병증의 환우들이 1년 만에 모두 고인이 되며 어머니는 본인의 예상 여명을 짐작은 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5년을 버텨오신 시어머니가 2026년 4월 1일 만우절 날 거짓말 같이 돌아가셨다.
이혼 소송 중 맏며느리 위치에서 장례를 치렀다. 정유회사 임원승진 명단에 오르내리는 전남편과 대기업과 은행에 다니는 둘째 부부 덕에 장례식장은 빈 공간, 빈 시간 없이 바삐 지나갔다. 권사님이셨던 시어머니 덕분에 엄청 많은 교인들이 찬송가와 기도로 적막과 슬픔을 채워 넣었다. 나는 마치 이곳에도 저곳에도 속하지 않은 부유하는 존재 같았다. 그럼에도 시어머니와 오묘하게 연결된 느낌었다. 2025년 크리스마스 도넛을 못 받겠다고 얘기하시며 나와 대화대신 시동생을 통한 대화를 진행하며 간접적으로 며느리로서 나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후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만난 곳은 임종하는 입원실 안이었다. 부모의 마지막 숨 쉬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기회를 맞이했다.
시어머니와 나는 사이가 매우 좋았다. 항상 어머니는
“너 같은 딸이 있었을 수도 있었지.”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전 친정엄마보다 더 편하고 좋아요.”라고 말하곤 했다. 30대에 홀로 되신 어머니가 이성 교제를 한다는 걸로 충격을 받았다. 솔직히 말하면 시어머니 관계일 뿐인데 그 별일 아닌 사실에 충격받은 나에게 충격을 받은 게 맞다. 진짜 친엄마의 연애를 맞이하듯 상처받은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또 다른 엄마 같았던 시어머니를 보내드렸다.
그럼에도 곧 전남편이 될 사람과 나는 슬픔을 서로 나누지 않았다. 각자의 슬픔을 따로 위치에서 잘 감당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임종으로 슬픔이 우리 가족을 다시 뭉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내 가정 유지를 위해 기도하시는 구역장님은 그런 기대를 하셨다고 하신다.
그러나 이 슬픔을 통해 우린 독자적인 위치에서 슬픔을 잘 감당할 수 있다는 독립적인 나를 확인했을 뿐이다.
어머니의 임종은 슬픔의 재건이 아니라 이별을 향한 완벽한 마무리의 시작이었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기준이 있다. 예컨대 사람은 오래 사는 게 좋다. 그렇지만 시어머니는 말기 암 이후 극도의 고통으로 삶을 이어가는 걸 고통스러워하셨다. 아들들도 항암으로 생명을 연장하길 원하며 눈물로 애원하다 엄마의 고통을 같이 느끼며 항암 중단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도 그렇다 무조건 큰 문제가 없는 한 결혼은 유지해야 옳다고 생각한다. 이혼 요건에는 상대의 치명적 단점이나 유책 사유로만 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같이”보다 “따로” 독립됐을 때 더 행복할 수 있다면 결혼을 유지하지 않을 권리도 있어야 한다. 시어머니 생전에 인사 나누지 못했던 언니분이 시어머니처럼 챙겨 주셨다. 어렵게 그분에게도 내 이혼 사실을 알렸다. 우시며 이혼을 물릴 수는 없는지 얘기하셨다. 그분도 결혼은 행복 이혼은 불행이라고 생각하셔서 우셨을까? 나는 이제야 행복한데.
그러므로 어머니의 존엄한 생명이 끝났고 내 17년 결혼도 서로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