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린 라벤더 주머니의 향기로 기억하는 도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by 여행작가 Q

무색무취의 도시, 그러나 조금씩 본연의 매력이 보이는 자그레브 여행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서 밤 9시에 출발하는 야간 버스를 타고 수도 자그레브로 향했다. 10시간을 달려 다음날 오전 7시에 자그레브에 도착하는 긴 버스 이동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숙소로 가는 길, 역에서 멀리 떨어진 숙소여서 시내버스를 탔다.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 직원이 일찍 방문한 우리에게 얼리 체크인을 하게 해 주어 곧바로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밤새 버스에서 불편하게 자서 몸이 많이 피곤했지만 정신은 새로운 도시의 여행을 원하고 있었다. 숙소에서 조금만 쉬고 자그레브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는 여행할 준비가 되었지만 날씨는 준비가 덜 되었나 보다. 비가 한 두 방울 내리기 시작했다.


숙소에 나서자마자 비를 맞고 우산을 가지러 방에 갔다. 유럽여행 32일 만에 처음 꺼낸 우산이다. 두브로브니크와 달리 긴바지에 겉옷을 입고 출발해 자그레브 중앙역으로 갔고,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다. 새로운 도시 풍경에 매료되는 나는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자그레브에선 폭이 가늘게 쭉 뻗어있는, 키 큰 가로등이 눈을 사로잡았다. 끝이 살짝 안으로 말려들어간 작은 달팽이 모양의 가로등 꾸밈선이 참 귀여웠다. 두 가로등 불빛을 지탱하는 선은 내 눈엔 아담한 하트 모양으로 보였다. 그렇게 거리를 구경하는데 갑자기 비가, 굵은 빗방울로 후두 두두 내리기 시작했다.


로마에서처럼 잠시 처마 밑에 숨을 정도의 비가 아니었다. 우리는 비를 피할 겸 바로 앞에 보이는 카페에 무작정 들어갔다. 비가 그칠 때까지 이 카페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알고 보니 조각 케이크 집. 우리가 고른 조각 케이크는 초코 생크림 케이크였다. 얇은 초콜릿 케이크 위에 생크림이 높게 치솟아 있었다. 그 생크림을 다시 얇은 초콜릿이 살짝 눌러주는 모양이었다. 가장 위에 붉은 열매 데코레이션도 놓치지 않았다. 이 곳에서 보냈던 시간은 우리가 자그레브인지 한국인지 살짝 헷갈렸다. 수업 마치고 친구랑 학교 앞 카페에서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바로 옆 테이블에 커플이 앉았다가, 책 읽는 아저씨가 앉았다가, 이야기하는 학생이 앉았다가 그랬다. 창밖을 바라보며 비가 언제 그칠까 기다렸는데, 다행히 여기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비가 그쳤다.


비가 그친 후 여행은 반 옐라치치 광장에서 시작했다. 커다란 반 옐라치치 동상을 본 후 자그레브 대성당을 보러 갔다. 자그레브 대성당은 아쉽게도 한쪽 지붕이 공사 중이어서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도시를 자유롭게 걷다가, 예전에 사진으로 보고 자그레브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성 마르크 성당에 왔다. 성 마르크 성당은 1256년에 건설되었고, 자그레브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라고 한다. 지붕에 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마치 어떤 천에 자수를 새기고 붙여둔 것만 같다. 흰색, 빨간색, 파란색, 갈색 등을 이용한 자수가 흰 벽과 잘 어울리는 독특한 건축물이라 한눈에 눈길을 끌었다. 그 후 로트르슈차크 탑 안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가서 자그레브를 한눈에 바라보기로 했다. 자그레브도 두브로브니크처럼 붉은색 지붕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두브로브니크의 지붕보다 색이 좀 더 진했다. 뜨거운 햇살의 차이였을까, 혼자 상상해보았다.


여기까지 보고 내려와 도시를 걷다가 저녁을 먹는데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제법 굵은 비다. 오늘의 여행은 여기에서 마무리하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늦지 않게 숙소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흐렸고 비를 만났고 끝내 비와 마무리한 여행이었지만, 중간중간 여행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비가 와서일까 거리에 사람이 없어 살짝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밥을 먹으러 가도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카페도 군데군데 빈자리가 있었다. 여행 중 이런 분위기가 처음이라 신선하면서도 낯설었다. 그러나, 그다음 날 또 그다음 날은 조금씩 자그레브가 본연의 색깔을 보여주었다. 깊은 자그레브의 밤 아늑한 숙소에서 그런 점을 바라며 잠이 들었다.


SAM_1962.JPG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도착한 날 흐린 하늘과 섬세한 가로등




작은 라벤더 주머니의 향기가 지속되는 여행


하룻밤 푹 자고 나니 날씨가 좋아졌다. 개운하게 일어나 맛있는 조식을 배불리 먹고 사모보르라는 도시를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그리고 그날 밤에 어제 만난 자그레브를 다시 만났다. 자그레브에 도착해 테라스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둘러본 밤의 자그레브는 어제의 스산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광장과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훨씬 많았고 드디어 광장 분위기가 났다. 그렇지만 광장에 아무런 음악이 없어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음악이 없는 유럽이라니, 너무나 낯설었다. 그렇지만 어제 본 자그레브 대성당의 야경을 보고 어제 본 이 곳의 예쁜 가로등에 불빛이 들어온 걸 보면서 이 곳의 색깔에 적응했다. 반 옐라치치 광장에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마지막 날 부다페스트로 가는 버스가 오후 5시쯤 있어서 그전까지 자그레브를 편하게 둘러보기로 했다. 오전에는 돌라체 시장에 가서 걸어 다니며 방울토마토, 바나나, 블루베리를 구입했다. 또 여행할 때마다 도시별로 마음에 드는 나만의 기념품을 구입하는 루틴이 있는 나는, 이곳에서 말린 라벤더가 들어있는 작은 주머니를 샀다. 얇은 보라색 망사 주머니 안에 잘게 부서진 말린 라벤더가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지금도 내 방 커튼 고리에 대롱대롱 걸려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5년이 지난 지금도 그 라벤더 주머니 가까이 코를 대면 라벤더 향기가 은은하게 나서 기분을 좋게 만들어준다. 좀 더 머무른다면 저렴하고 싱싱한 채소와 과일을 더 사고 싶었고, 선물할 수 있다면 꽃다발도 한 아름 사고 싶었다. 돌라체 시장을 몇 바퀴 돌며 둘러본 후에야 이곳을 나왔다.


기분 좋은 돌라체 시장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근처 테라스 식당에서 립 요리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이제 헝가리로 이동하면 돈 단위가 바뀔 터이니 크로아티아에서만 쓸 수 있는 쿠나를 모아 만찬을 즐기기로 했다. 그리고 맑은 하늘 아래 좋아했던 산 마르코 성당에 다시 한번 갔다. 낮의 반 옐라치치 광장도 다시 걸었다. 맑은 날씨의 자그레브를 보니 마음이 좋아졌다. '무색무취의 도시'라고 메모해두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 곳은 '자그레만의 색과 향기가 있는 곳'이었다. 그 향기는 내게 작은 라벤더 주머니에서 풍겨져 나오는 향기다. 카메라에 담긴 쑥스럽게 웃는 아주머니의 표정과 그 옆에서 구입한 라벤더 주머니를 들고 웃고 있는 사진을 보면 웃음이 난다. 자그레브의 라벤더 향기가 지금도 코끝에 찡하다.


SAM_2015.JPG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라벤더 주머니를 샀던 돌라체 시장
SAM_2024.JPG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성 마르크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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