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합천
계획의 여행: 절정의 붉은 가을, 해인사에서
가을이 절정으로 무르익어가는 날, 싱가포르인 친구와 같이 합천 해인사로 떠났다. 어느 날 친구는 내게 '해인사 템플 스테이'를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물어보았다. 새로운 경험이 될 것 같아 승낙했는데, 사실 돌아보면 기대했던 '새로운 경험'은 템플 스테이보다도 해인사가 보여주는 '가을 그 자체'였던 것 같다. 살면서 이렇게 멋진 가을 단풍나무는 처음 보았다. 가을이 선명한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일 수 있다는 걸 내게 분명하게 보여주었던 이 멋진 공간, 해인사가 있는 비봉산은 절정의 아름다움이었다. 가을의 최고조로 뽐내는 색깔이었다.
한국인 20명과 외국인 20명으로 이루어진 이번 1박 2일 템플 스테이팀은 해인사의 체험형 방식을 그대로 같이 소화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108배 중 90배를 기진맥진하며 소화하고 5시 30분에 꿀맛 같은 아침식사를 하러 갔던 그다음 날이 생각난다. 산책 삼아 경내 투어를 인솔받은 시간도. 템플 스테이 복장으로 스님을 따라 산책하며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을 보았고 해인사의 곳곳을 투어했다. 1박 2일 템플스테이가 끝났을 때 우리는 가방을 챙겨서 다시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으로 갔다. 우리만의 여행을 다시 시작했다. 진짜 가을여행이 시작되었다.
아홉 살이었을 때 가족끼리 해인사로 여행을 온 적이 있다. 그때 찍은 사진을 지금도 볼 수 있는데, 그땐 팔만대장경을 꽤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고 그 숨결을 조금이나마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1미터 정도 떨어진 간격에 울타리를 쳐서 가까이 갈 수 없다. 스님은 그 이유가 사람이 가지고 있는 화학제품이 문화재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했다. 팔만대장경은 역사책에서 자주 봐서 익숙했지만 역시나 백문이 불여일견이었다. 글자 하나하나에 담긴 간절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해인사를 나와선 쭉 걸어 내려오는 길에 단풍길을 원 없이 걸었다.
산속에서 만나는 가을은 울긋불긋 참 아름다웠다. 저 멀리 산을 바라봐도, 가까이 나무를 봐도 가을은 한결같았다. 흐르는 시냇물 소리, 사각사각 바람 소리, 토각 토각 나무길을 걸어내려 가는 발자국 소리. 이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참 멋지게 느껴졌다. 한국의 절정의 가을을 만났다. 앞으로 만나게 될 가을도 매년 얼마나 멋질지. 산속의 가을은 그 자체로 참 솔직하게 계절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해의 그 계절을 오롯이 만나 기뻤다.
무계획의 여행: 여행의 불확실성을 즐겨라! - 황매산 대신 영상테마파크로
또 한 번 싱가포르 친구랑 같이 합천으로 갔다. 이번엔 봄이었다. 황매산 철쭉제에 가자고 했다. 그렇게 철쭉제가 시작하는 날을 맞춰 여행을 계획했다. 황매산도 처음이고, 철쭉제도 처음인데, 작년 가을에 본 해인사 단풍처럼 또 얼마나 멋진 풍경을 보여줄지 궁금해하며 여행을 갔다. 그런데, 우리는 황매산에 가서 철쭉을 보지 못했다.
합천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는데 황매산 철쭉제에 대한 소개가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터미널을 빙 돌다가 버스기사 아저씨들을 만나 한 번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아저씨들은 이구동성으로 황매산에 갈 수 없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지금 황매산에 가면 돌아오는 버스가 없을 것이다. 둘째, 황매산에 가려면 지금이 아니라 오전 일찍 와야 한다. 셋째, 황매산은 해발이 높아 꽃이 거의 피지 않았다. 헉. 그렇담 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갈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아까 걷다가 터미널에서 본 포스터 한 장을 따라가기로 했다. 그곳은 합천 영상테마파크.
여행의 불확실성을 즐기자!
합천 영상테마파크는 1920년대에서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물 오픈세트장이었다. 실제로 이곳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찍은 경우가 많았는데, 열거된 작품들을 보니 내가 본 것도 꽤 있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내가 실제 촬영장을 방문하게 되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친구도 한국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라 하나씩 재밌게 둘러볼 수 있었다. 잠시 시간여행을 다녀온 것 같았다. 경성의 거리를 걸어보기도 하고, 해방 후의 거리도 걸어보았다. 근대사, 현대사가 녹아 있는 건물과 기둥, 벽이 모두 그 시대를 느끼게 해 주었다. 기차 안에 조심스럽게 들어가 보았고, 계단도 올라보고, 문고리도 살짝 만져보았다. 시대 영화 속 장면들이 이런 공간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걸 경험했던 것도 의미 있었다. 테마파크는 넓었고 둘러보느라 꽤 시간이 걸렸다. 다 둘러본 후 즐겁게 나와 터미널로 오는 버스를 기다렸다. 예상치 못하게 흘러간 하루였지만, 또 충분히 그 시간을 즐겼던 우리. 여행 중엔 이런 일도 있지, 하면서 웃어넘긴 재미있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