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주 (2)
하루가 꽉 찬 풍성한 하루, 경주에서
대학 동기 친구들과 당일치기 경주 여행을 떠났다. 설 연휴가 막 지난 2월,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버스터미널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먼저 도착해서 터미널에 잠깐 앉아 있으니 친구들도 이어 도착했다. 터미널 바로 앞 렌터카센터로 가서 예약해둔 우리의 하얀색 차에 시동을 걸면서 본격적으로 여행이 시작되었다. 경주여행의 중심점, 대릉원에서 여행을 시작했다. 두 번의 경주 여행 때도 대릉원에서 여행을 시작했던 기억이 나서 반가웠다. 천 년 전 신라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곳에 바로 입장하기 전에, 잠깐 근처 카페에서 목을 녹이기로 했다. 그 카페의 지붕이 경주 풍경과 어울리는 기왓장이라서 신기했다. 경주만의 매력을 카페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대릉원에 들어가서 천마총을 보고, 첨성대를 보고, 대릉원 사이의 여러 릉 사이를 거닐었다. 새삼 먼 과거의 세상과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역사와 대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더 심도 있게 생각을 이어나가기에는 감각이 이성을 압도해버렸다. 파고드는 칼바람에 맥을 못 추스르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러자 갑자기 현대로 널뛰기한 공간의 이동이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용어를 설명할 때 하나의 예가 되는 황리단길로 향했다. 한창 뜨고 있는 트렌디한 골목길답게 사람들로 붐볐다. 개성 있는 독립서점이 곳곳에 보여 그중 한 곳에 들어갔다. 아동서적 전문 서점으로 주인이 직접 그린 그림을 엽서에 담아 팔고 있었다. 도깨비 명당에서 신년운세 뽑기를 했고 골목길을 걸었다. 네 명의 신년운세는 다들 긍정적이었다나.
점심은 찜해두었던 한우 물회를 먹으러 갔다. 유명한 곳이라지만 1시간 30분을 웨이팅했다. 좀처럼 네 명의 자리가 나지 않았던 탓인데, 기다린 시간에 비해 음식은 빛의 속도로 먹었다. 나와선 키덜트 박물관에 갔다.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물건이 빼곡히 천장까지 전시되어 있었다. 아니, 전시라기보다는 보관해두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영상과 애니메이션에 관한 추억의 물건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지금이라도 작동하면 움직일 것 같은 타자기부터 화이트보드가 달린 핑크색 2단 필통까지 있었다. 살짝 당황스러운 곳이었지만 어렸을 때를 추억하며 하나하나 구경해보았다. 나와선 이 빌딩의 건물 모양인 경주 콜로세움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탈리아의 콜로세움 모양을 형상화한 건물을 한국에서 보게 되다니, 그것도 역사도시 경주에서. 언밸런스의 매력이 있었다.
나와선 마감하기 1시간 전의 불국사에 들어갔다. 초등학교 때 가족여행을 오고, 또 학교에서 견학을 간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다시 왔다. 해가 지기 전의 불국사는 고즈넉했다. 다보탑과 석가탑에 햇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어렸을 때도 느꼈지만 탑의 정교함과 단정함이 마음까지 정화시켜주었다. 시간의 흐름을 이겨낸 건축계의 고전 아닌가. 고전의 힘을 느끼고 있기에 이런 부분도 더 마음에 와 닿게 느껴졌다. 하늘이 맑고 청명해서 이 공간의 멋을 빛내주고 있었다. 이제 정말 해가 지기 시작할 때, 그리고 불국사가 마감할 때 다 같이 내려왔다. 1시간 남짓 짧게 둘러보았지만 인상은 그대로 남았다. 아마도 익숙한 조선시대가 아니라 신라시대를 오랜만에 만나서인 것 같다. 백제시대의 흔적이 남은 곳을 다시 가도 비슷하게 느낄 것 같다.
진보랏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드라이브해 다시 황리단길로 왔다. 분위기와 맛이 좋은 양식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역시나 웨이팅이 있었지만 아까보단 양호한 공간에서 대기할 수 있었다. 막 요리된 음식들은 자꾸만 손이 가는 음식들이었다. 촛불 같은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다 먹고 나선 밤의 골목길을 슥슥 둘러본 후 한옥카페로 갔다. 수플레라는 디저트를 먹어보았고, 각자 취향에 맞는 음료를 시켜 나눠먹었다. 그리고 아늑한 이곳에서 책을 꺼내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미니 사인회를 가졌다. 친구들의 행복해하는 눈빛에 내 마음이 터질 듯이 감사했던 시간이었다. 오늘 하루는 순식간에 흘렀다. 12시간 여행에 가까운 시간이었는데 정말 빠르게 흘렀다. 참 추웠지만 차 안에서의 아늑함, 계획대로 모든 일정을 클리어했던 우리, 첫 국내여행의 완성에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벅차게 즐거웠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