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화 탐구 일지
프랑스 넷플릭스 영화 'MILF' 리뷰
어제 '해변의 밀프 (MILF)'라는 프랑스 넷플릭스 영화를 봤는데 머릿속에 남아 글을 몇 자 적을까 싶다.
참 과감한 제목이다. MILF는 보통 야동에서나 볼 수 있는 단어다.
챗지피티의 정의에 의하면
예, 그렇습니다. Friend는 사실 순화해서 한 말이지 본래는 F*** 으로 성행위를 의미한다. 필자는 영화 보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씨네필(cinephile,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판 치는 이 세상에서 필자는 필자 외에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기에 이 발언이 얼마나 비호감 발언인지도 잘 인지하고 있다.
그런 필자가 영화를 봤어요?
예, 봤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필자의 현재 일상에 직접적으로 감흥을 주고 있는 사람이 프랑스 사람이기 때문입니다요. 좋아하는 감정까지는 아니고, 탐구 대상이에요. 이 사람을 향한 관심은 이 '특정인물'에 대한 집중된 관심이라기보다는 필자 본인의 자아를 찾기 위한 관심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어린 시절 독일어권 유럽국가에서 8년을 살고, 그 외에 대한민국에서 학창 시절과 사회생활을 하면서 제3문화권의 아이(Third Culture Kid), 즉, 이도저도 아닌 문화적 돌연변이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서적 문화적 스펙트럼을 하나의 긴 수평적인 선으로 그려내어 설명할 수 있다면 아래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왔거든요. 다시 일기식 문체로 돌아갈게요.
필자는 독일과 대한민국 그 어디 사이에 있는 초록색에 속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색에 프랑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오랜 시간 알지 못했다. 프랑스도 서유럽권이니 그저 독일, 벨기에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사실 그 특유의 콧대 높고 까다롭게 구는 첫인상이 정말 비호감이었달까. 그런데 2016년 벨기에 대학원 시절 프랑스 일렉트로닉 음악을 처음 접하게 되면서 프랑스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달라진다.
독일의 하우스 음악은 기계적이다. 둠 둠 둠 둠 두두두두 둠 둠. 박자 위주에 단순하고 짧은 멜로디를 반복적으로 입히는 느낌인데 이런 음악을 선호하는 독일인들이 대한민국의 발라드를 들으면 거의 곡소리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필자가 독일에 있던 고등학교 시절 MP3를 혼자 듣고 있자 독일녀석 중에서도 좀 호기심이 많던 알렉스가 다가와 이어폰 한쪽을 뺏어 들었는데 그때 노래가 '더원'의 '보낼 수 없는 너'였다. 알렉스는 의아해하며 왜 이렇게 슬프고 우는 소리를 내는 노래를 듣냐고 물었다. 이렇게 극과 극의 노래 장르 사이에서 프랑스 일렉트로닉 음악은 적당한 비율로 그 두 문화권의 선호사항을 섞어 놓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중심을 담백하게 잡아주는 가벼운 박자에 과하게 감정적이지는 않되 인간적인 흐름이 있는 멜로디라인이 데코를 이루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Roche Musique 음반사의 아티스트들을 (유명한 예시로는 FKJ, Darius 등) 애정하게 된다. 당시에 열심히 듣던 노래는 Cherokee의 Don't Matter였다. 그때는 홀로 벨기에에서 대학원 다니느라 좀 외로움을 덜 타야 해서 프랑스 일렉트로닉 음악 중에서도 살짝 드라이한 노래를 들었다.
아무튼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가자면 영화 비애호가로서 그래도 가끔 애정하는 영화가 있는데 우연찮게 종종 프랑스 영화가 그랬다. 아무래도 할리우드 영화는 너무 뻔하게 느껴지고, 뭔가 미국스러운 이분법적 영웅서사, Happily ever after 결론 또는 웃어넘기며 시간 때우기 좋은 소재가 껄끄럽게 다가왔는데 (아닌 영화도 있겠지만!) 프랑스 영화는 예술병에 걸린 필자에게 미학적으로 눈길을 사로잡았고, 영화 이후에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 개인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드 인디고'는 최악의 영화로 손꼽는다. 보고 난 이후로 너무 기분이 안 좋았음..!!!
이‘해변의 밀프’라는 영화가 그런 예술적인 류의 프랑스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영화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은 자극적인 영화 제목과 선정적인 트레일러 씬들을 보며 야시꾸리함이 주는 아드레날린 폭탄을 기대했을 수도 있다 (필자 또한 부분적으로는 그러했으니).
그럼에도 필자는 영화를 보고 딱히 야하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세 여성은 40대라고 한다 (사실 검색하기 전에는 40후반에서 50대초인줄 알았음..). 이 영화의 가장 인상 깊은 점은...
엘리제의 수년간 관리 잘한 탄탄한 몸매와 수많은 경험을 통해 갖춰진 노련미든
소니아의 젊은 가수를 키울 수 있는 매니지먼트 능력과 사회적 지위든
세실의 거대한 집 소유자의 재력이든
연륜이 가져다주는 여성의 매력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다. 이는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어린 여성을 선호하는 성향이 더 짙은 것과 반대되는 면모라 신선하게 다가오는 부분이었다.
필자가 미국 영화보다 프랑스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고정된 답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인데 이 영화에서도 세 여성이 훨씬 어린 세 남성과의 관계를 그려내면서 세 가지의 관계가 전부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즉, "나이 있는 여성과 어린 남자가 만나는 것은 OO 하다"라는 파편적인 단언을 피하고, "이런 연애 유형에서도 사람마다 다르게 여러 가지의 방식과 결과를 가질 수 있다"라고 말해준다. 이 영화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 대한 일반화도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폴은 엘리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현재형으로 즐기고, 여름 그 이후의 날들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 하고
줄리앙은 소니아와 아이를 가지는 먼 미래의 모습까지도 상상하고 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거기에 마르쿠스는 앞선 두 남자와 달리 세실과의 관계에서 육체적이고 성적인 교류를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손잡는 장면 하나 정도가 전부다.
영화가 이렇게까지 Equality를 외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정말 이상적 이도록 평등하게 여성상과 남성상을 그렸다는 것 -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박수받아야 할 만하지 않나 싶다. 이런 점이 바로 프랑스 문화의 세심함인 것 같다.
또 몸 섞는 행위에 별 의미를 부여할 것 같지 않는 노련미의 대사인 엘리제가 자신의 딸에게 잘 대해주는 폴의 모습을 보고 결국 감정이 생겨버려 마음고생하고 눈물을 흘리는 다소 아마추어 같은 모습은 우리 모두 인간으로서 불완전한 존재들이고 나이가 아무리 들어서 경험이 많고 감정이 무뎌져도 인간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는 강한 여성이 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딱히 짜릿하고 통쾌한 장면은 아니었지만 묘하게 위로가 됐다. 결국은 섹스를 소재로 해 관심을 끄는 영화지만 섹스가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순수(?)한 영화라고 느꼈다.
아아, 필자는 이런 게 프랑스 문화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이상을 추구하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의 불완전함으로 엉망진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그리고 그럼에도 엉망진창인 인간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예뻐하며 보듬어주는 문화. 씁쓸한 와중에 따뜻한.. 아메리카노 같은 문화! (비록 아메리카노는 프랑스의 것은 아니지만..) 이상 어제 본 영화 리뷰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