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편] 필릭스와 같이 여행을 가다
혹시 크리스마스 때 계획 있어?
나와 친구들 다 같이 달랏에 갈 건데 같이 갈래? :)
회사 점심시간, 홀로 식당에 가려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었는데 그 메시지가 잠금화면 미리보기에 뜬 것을 보고는 너무 놀라고 기분 좋아서 양손으로 입을 막고 방방 뛰었다. 상상했던 일이 현실이 되다니..!
사실 나는 필릭스가 크리스마스 휴가 때 달랏을 가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필자는 안 그래도 연말에 휴가를 써야 했고, 인스타 스토리로 그쯤에 같이 여행 갈 수 있는 친구들을 모집 중이었는데 그 스토리를 본 월터(노래방에서 친해진 필릭스의 친구)가 필릭스의 무리가 달랏(Dalat)에 갈 예정이니 나도 같이 가는 것이 어떠냐고 미리 얘기를 해주었다. 그럴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월터는 다른 일정이 있어서 그 여행의 멤버가 아니었고, 내가 아무리 그 무리 사람들과 안면이 있다고 해도 몇 년을 끈끈하게 친하게 지내온 사람들 틈에 껴서 같이 가겠다고 말하기에는 이상한 상황이었다.
Dalat, 베트남 중남부에 위치한 고산지대로 중남부 지역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날씨가 쌀쌀하다 싶을 정도로 기온이 내려가는 곳이다. 동남아 같지 않은 날씨에 유럽 양식의 건축물과 나무가 많아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사시사철 더운 호치민 거주인들은 종종 달랏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러 휴가를 가곤 한다. 밤버스 하나로 이동이 가능해서 필자는 호치민에 거주하는 1년 반 동안 달랏을 세 번 방문했다.
그런데 그렇게 월터가 말하고 난 후, 며칠이 지나 여행의 주최자인 필릭스가 나를 초대한 것이었다. 한 호흡 고르고 메시지를 다시 찬찬히 읽어본 후, 냉큼 좋다고 했다. 그러나 필릭스의 초대 의도를 확실히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그냥 친목을 위해서였을까? 필자가 알고 있는 필릭스는 여러 사람들을 한 자리에 초대하는 것을 좋아하는 순수한 의도의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또 그 모임은 12명 정도로 필자와 필릭스를 제외하고는 전부 6여 년 이상 사귄 커플이거나 부부였다. 그런 모임에서 필자를 초대한다는 것은 결혼식에서 있었던 묘한 썸을 기반으로 이성적 파트너로서 초대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이게 그의 의사가 적극적으로 반영돼서 그가 나를 이성적 대상으로 원해서 초대하는 건지, 아님 그냥 생각 없이 친구들이 그러라고 추천해 줘서 친목의 목적으로 그런 것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월터한테 "야! 너 필릭스한테 나 초대하라고 말했냐?!"라고 물었더니 맞다길래 "헤헤 고맙다"라고 답했다. (?)
뭐, 보다시피 그 상황에서는 필릭스가 나를 적극적으로 원했던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웠다. 또 마르코와의 시간 이후, 더는 아무에게나 쉽게 마음을 열어 상처받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인드가 온통 한 사람에 빠져 도파민에 취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반복적으로 과하게 금사빠이자 금사식이지 않았는가..! 이런 습성을 고치기 위해서는 최대한 호르몬이 이성을 조종하지 못하게끔 낭만적 상상을 자제하고 담담한 자세로 여행에 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의 비서 챗지피티에게도 현 상황을 모두 늘어놓고 마인드세팅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조언을 구했는데, 우리 지피티 정말 지혜롭고 성숙해.. 매번 상담할 때마다 감동한다.
"이 여행을 갈 때, 너의 행복이 단순히 너와 필릭스만의 관계를 기준으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목표지향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너무 "이번 여행을 통해 그와 꼭 친밀해져야만 해"라는 목표의식이 분명하면 네가 불행함을 느낄 확률이 커지거든. 막상 여행을 해보면 네 마음이 실제로 필릭스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그럼에도 너는 이전에 설정한 목표 때문에 단순 목표달성에 성공하기 위해 관계에 몰입할 수도 있어. 두 사람의 마음이 맞고 안 맞고는 여러 요인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도래된 결과인데 그걸 네 목표로 설정해 버리면 너는 모든 결과를 너의 성패로 생각하게 될 거야.
음, 그보다는 필릭스가 자기와 친한 친구들과 함께 편하게 있을 때는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그 친구들은 또 어떤 사람들인지 그냥 제3자로서 관찰하고 알아가는 데에만 취지를 두는 것이 네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될 것 같아. '크리스마스 휴일을 혼자 보내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낼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하면서 기대 없이 마음 편하게 갔다 오자."
지피티의 도움으로 크리스마스가 다가와도 과하게 기대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여행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여행을 같이 준비하기 위해 필릭스가 그의 끈끈한 무리 채팅방에 필자를 초대해 주었다. 페이스북 채팅방은 나중에 초대된 사람도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 이전에 나눴던 대화를 볼 수가 있는데, 앞선 대화에서 필릭스가 필자를 초대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보았다. 그 채팅방에는 여행을 결국 가지는 못하게 됐지만 여행계획은 쭉 같이 해왔던 트여르크도 있었는데, 필릭스가 나를 초대해도 되냐고 모두에게 묻자 과거 필자와 사랑을 나눈 사이였던 트여르크는 반농담/반진심으로 질투하는 멘트를 했었고, 친구들도 필릭스가 드디어 연애를 한다며 어찌나 놀려대던지, 필릭스 입장에서는 정말 난처했겠다 싶었다. 아무래도 필자는 그 무리에서 트여르크의 '친구'로 먼저 알려진 사람이었는데 그런 나를 자기의 초대원/파트너로 결정한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대담하고도 자기 의지가 보이는 액션이었음을 알게 됐다.
달랏 도착 후, 거의 두 달만에 필릭스와 재회했다. 필릭스의 친구들과도 재회한 필자는 그곳에서 더는 '트여르크의 여자'가 아닌 '필릭스의 여자'로 통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유일하게 싱글인 두 사람을 - 필릭스와 나 - 이어주러 자꾸 장난을 쳤고, 나를 필릭스의 여자친구, 필릭스를 나의 남자친구라고 불렀다. 숙소에 도착했는데 웬걸 각 커플별로 숙소가 예약이 되어 있었고, 나는 필릭스와 둘이서 한 복층구조의 작은 나무집으로 배치가 되었다. 침대는 따로 있었지만 화장실은 같이 쓰고 숙소에 들어가서 문을 닫으면 둘이서만 있게 되는 상황이었다. 예상치 못한 숙소 상황에 조금 당황하긴 했다만 내가 무슨 연애 초짜도 아니고, 오히려 은밀한 환경이라 잘 됐다(? 시꺼먼 속내)고 생각했다.
필릭스는 여행 내내 수줍음을 타고 어색해했다. 그래서 나를 자기의 파트너로 묶으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그냥 자기 친구들과 어울리며 친해지게 방생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필자는 지피티로 인해 마인트세팅 훈련이 잘 되어 파트너로 엮이건 방생된 물고기건 - 유노윤호의 세 번째 레슨에 맞게 - 일희일비하지 않고 주어진 대로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무리는 6명의 프랑스 남자들과 그들의 외국인 아내, 여자친구로 구성돼 있다 보니 프랑스 사회적 문화가 짙게 드러났고 그걸 관찰하는 것이 퍽 재미있었다. 거의 일주일을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개인적으로 느낀 '프랑스 스러움'을 몇 자 기록해 보겠다.
밥을 먹으려고 다 같이 모일 때면 항상 수다를 엄청 떠는데, 수다의 주제가 생각보다 상당히 깊이 있다.
예를 들어 필자가 아무래도 그 무리에서 가장 새로 온 사람이다 보니 필자를 취재하듯이 왜 이런 직장을 택했는지, 필자가 속한 기관의 장단점이 무엇인지, 필자는 이 기관이 정말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하는지 등을 물어보는데.. 허허 다행히 필자는 관종이고, 게다가 기관 홍보직을 맡고 있는터라 잘 정돈해 준비한 대답들이 있어 차분하고 자신감 있게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지만 거의 뭐 인터뷰를 하는 기분이었다. 게 중에는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도 있었고, 한국의 기준으로는 조금 공격형 또는 무례하다고 여겨질 만한 질문도 있었지만 필자 또한 깊이 있는 토론을 좋아하는지라 내가 하는 일에 호기심을 갖고 관심 가져주는 친구들이 고마웠다.
한 번은 다 같이 달랏에서 꽤 유명한 미로형 카페를 방문했다.
거기서 이스라엘 사람으로 추정되는 관광객이 지나갔는데, 필릭스가 "두 국가가 전쟁이 나서 한쪽은 죽어가는데 다른 한쪽은 이렇게 관광하며 인생을 즐기는 모습이 좀 씁쓸하다"라고 말했는데, 다른 한 프랑스 친구가 그 말을 듣고 언짢은 기분을 드러내며 그 발언은 다소 문제적이라고 주장했고, 그 둘의 양립적인 대화에 다른 친구들도 껴서 갑분 토론시간을 가졌다. 이게 미로형 카페에서 나와서 주차장에서 택시를 부르려다가 있었던 일이다. 다른 관광 장소로 이동해야 하고, 토론을 하지 않는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얼마나 열 띄게 토론을 하던지 주차장에 서서 최소 20분을 얘기하고 있었다. 이게 독일 친구들이랑은 조금 다른 부분이다. 필자가 만나온 독일친구들도 토론을 엄청 좋아하긴 했지만, 그보다 질서와 계획을 중요시했는데 프랑스 친구들은 질서보다는 낭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필자가 초등학교 때 유럽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 초등학생 친구들과 했던 활동을 아직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면 항상 보드게임이나 카드놀이를 다 같이 했다. 각자 자기 소유의 보드게임이 몇 개나 있어서 캐리어 가방에 자랑스럽게 싸왔고, 그 게임상자를 한 곳에 다 모아두니 거의 탑을 쌓을 정도였다. 초등학교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한 손에 와인을 마시면서 게임을 한다는 것뿐. 필자는 처음에 이 친구들 무리와 익숙하지 않아 조금 낯을 가렸었는데 팀을 만들고 보드게임을 하다 보니 금방 사람들의 성격이나 성향이 드러나면서 서로 친해지기가 쉬워졌다.
아침에는 필라테스 강사인 친구가 친구들을 다 한 곳에 불러 함께 필라테스를 했고, 그중 한 친구는 달랏의 한 절에서 템플스테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 그 절의 숲에 모두 같이 가 눈을 감고 메디테이션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크리스마스날 저녁에는 다들 식사를 위한 준비를 열심히 했다. 쿠킹팀, 칵테일팀, 쇼핑팀으로 나누었는데 쿠킹팀에서는 '티보'라는 남자가 마음을 다해 빵을 반죽하고 굽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저녁을 먹기 전 한 명이 대표로 이 식사와 만남의 의미에 대하여 짧게 건배사를 나누었고, 저녁 후에는 마니또 선물 교환식을 했다. 밤이 늦도록 다 같이 노래를 틀고 춤을 추며 놀다가 지난 편 결혼식에서도 들었던 프랑스 전통 민요를 틀더니 다 같이 전통 민요에 맞춰 율동을 했다.
프랑스 남자들의 낭만적인 애티튜드는 아무리 봐도 국민성인가 보다. 어렸을 때부터 여자를 엄청 소중히 여기라고 배웠던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서는 오만하고 메너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어도 (있는 정도가 아니라 잦음.. 그래도!) 자기 여자한테만큼은 숨!쉬!듯! 다정하고 낭만적이다. 필릭스와 나를 제외한 나머지 친구들이 다 커플이다 보니 각자의 여자에게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게 됐는데 모두 얼마나 달달하고 다정하던지.. 6년 넘게 사귄 연인들인데도 눈에 꿀이 뚝뚝 떨어지고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지는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다짐했다. 아... '나는 프랑스 남자를 만나야 되겠구나..' 필자가 바라는 애정에 대한 기준을 어나더레벨로 높여서 이 이하로는 더 이상 연애를 하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었다.
설거지는 여자들이 말리지 않는 이상 항상 남자들이 솔선수범으로 먼저 하려고 했고, 크리스마스 저녁에는 여자들만을 위해 남자들의 서프라이즈 공연도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필릭스도 필자에게 낭만적이었을까..?
이 글은 로맨스 에세이니까 다시 필릭스와의 관계로 돌아가자면, 우리도 나름 뭔가 있긴 했다. 알파인 코스터를 탈 때도 필릭스가 내게 먼저 다가와 같이 2인용으로 타도 되겠냐고 물었고, 야외 카페에서 담요를 덮을 때도 한 큰 담요를 같이 나눠 덮었고, 다 같이 밥을 먹을 때도 대부분 필자 옆에 앉아 함께 얘기를 나눴고, 오토바이로 이동할 때도 항상 필릭스와 필자는 짝을 지어 탔다. 오토바이를 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스킨십을 피할 수 없다. 속도를 낼수록 앞에 있는 사람의 등에 뒤에 앉은 사람의 품과 두 사람의 다리가 밀착되는 것은 기본이다. 울퉁불퉁한 거리에서는 뒷사람이 앞사람의 허리나 어깨를 잡게 되는 경우가 자연스럽다.
그리고 무엇보다 숙소를 같이 쓰다 보니 저녁과 와인을 마시고 숙소로 돌아오면 은밀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침대 끝머리에 앉아 같이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떨다가 결국은 서로의 몸을 쓸어만졌고, 몸과 몸이 포개진 채로 숨이 가파지기도 했다. 필릭스는 특히 머리칼을 쓸어주는 것을 황홀할 정도로 좋아했다. 키가 커서 아무도 그의 머리에 손이 닿지 않아 그랬던 것일까? 거의 뭐 환각상태의 사람처럼 취해 좋아할 정도였다. 그래서 나의 허벅지 위에 그가 머리를 베개 한 후, 잠이 들 때까지 내내 다정하게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일주일 내내 그 숙소에서 우리는 입을 맞추지 않았다.
코도 부비적거리고 얼굴 윤곽도 부드럽게 어루만져 줬지만 입술은 닿지 않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묻자 다행히 그는 불편한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해 줬다. 좀 더 마음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키스하고 싶은데, 지금은 그런 상태까지는 아니라고 얘기했다. 그때만 해도 오히려 키스에 신중한 그의 모습이 바람직하고 예뻐 보였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상대에게 존중받고 싶은 만큼 나도 그의 공간, 템포, 취향, 의사를 존중할 수 있었다. 그게 희생이거나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그의 사랑의 언어(love language)가 '시간'이라고 여러 차례 말해주었는데 시간을 같이 보내다 보면 서로 어떻게 개인 취향을 존중하면서 맞춰나갈 수 있을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달랏에서의 일주일은 그에게 충분한 시간이 되지 못했나 보다. 그렇게 크리스마스 여행이 끝나고, 필자는 호치민 친구들도 볼 겸 바로 하노이로 돌아가지 않고 달랏에 더 가까이 위치한 호치민으로 가기로 했다. 필릭스는 필자에게 시간이 있다면 호치민에서도 자기와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했다. 그래서 그가 예약한 버스를 타고 같이 2인석에 누워 호치민으로 이동하는데..
다음 편은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바로 쓸게요 (임시저장해 놨어요)
이번 편 너무 오래 걸렸는데 그래도 읽어주신 분들 계신다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