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지나간 인연, 강아지, 목표 - 세속사람의 고백

일기장에 끄적인 글쪼가리 중

by 하이디함

2025년 6월 15일 새벽 3시. 한국에 들어온 지도 이제 두 달이 됐다.


여행이 주는 기쁨도 고갈되고

오늘은 엄마와의 교토-오사카 4박 5일 자유여행에서 돌아온 날이다. 아, 12시가 지나 새벽에 초를 켜고 (비유적 표현 아니고, 진짜 초임.. 요즘 초에 꽂혀서) 일기를 쓰고 있으니 오늘이 아니라 어제구나 벌써. 힘든 여행이었다. 2주 전에 홀로 부산여행을 갔을 때도 '와, 너무 좋다'라고 생각한 순간이 없었다. 그렇게 여행을 좋아했었는데 이마저도 더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구나. 이제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느껴져 일컫기도 어렵게 되었다.




지나간 인연이 주는 아픔도 고갈되나 보다

사실 오랜 시간 일본여행을 외면해 왔다. 가면 정말 좋아할 부분이 있을 거라는 것도 예상이 됐지만 분명히 대학시절 만났던 리쿠토가 생각이 날 것이고, 그러면 그와 함께할 것이라 생각하고 상상하며 그려온 날들이 떠오를 것 같았다. 그래서 떠올라도 아프지 않을 만큼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헤어진 지 12년이 지나 그는 이제 유치원생 아들을 둔 아빠가 되었는데도 나는 여행을 하면서 종종 그의 생각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시큰거리거나 아프지는 않았다. 그런 날들도 이전에는 분명 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내가 봐도 정말 생소해. 어떻게 그렇게 매정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나간 사람들은 깊게 "지. 나. 간" 사람들로 각인되고, "미래를 함께 그릴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폐기 스티커가 붙여진다. 마음이 그런 게 아니라 머리가 그래서. 마음은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들이라면 온기를 나누고 싶어 하지. 그런데 술을 마시지 않는 이상 마음의 리모컨은 머리가 꽉 쥐고 있다. 만약에 그럼에도 내가 지나간 사람과 재회를 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미래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현재형으로 몸이 반응해서다. 나는 연인이 오래 없었어서 외로우니까. 정말 찌질하고 처연해서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날들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냥 인정한다 나는 엄청 외롭고, 정서적-육체적 애정에 목말라 있는 사람이다. 그게 지금 내 상태다.




술 - 비이성이 허락된 시간, 마음이 망나니 같이 포효한다

그래서 이전에는 안 그랬는데 술을 마시는 게 위험해졌다. 이성이 느슨해지자마자 마음은 포효를 한다. 사랑을 동네방네 과거현재 앞뒤 안 가리고 찾는다. 쓰레기장에서도 오물을 묻혀 가며 뒤지고 있는 나 자신을 보았다 (이건 비유적 표현임..) 제어가 되지 않는다. 그다음 날에 머리가 다시 리모컨을 쥐었을 때 느끼는 쪽팔림은 '자기 괴멸'의 수준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해 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이렇게까지 사랑에 진심인 내가 왜 사랑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걸까. 지난 몇 년간의 불안정적 애정 수요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버렸다. 내가 왜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는 너무나도 잘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지금의 내 상태를 사랑해 주기가 힘들다. 미래의 내 사랑아, 세상에 존재한다면 꼭 알아줘. 물론 내가 당신을 만나기 전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는 것을 알고 싶지는 않겠지.. 만 당신을 찾기 위해 길고 긴 고난의 여정을 겪어왔다는 것은 알아줘.


13년 전, 리쿠토를 만났을 때만 해도 내 인생에 챕터를 정해 각 챕터마다 숫자를 메기고 테마를 정했었다. 그때가 다섯 번째 챕터였나 그랬는데. 이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 이렇게 길어질 거라고는 차마 예상하지 못했지. 이 챕터가 너무 길어져서 더는 챕터를 지정하지 않게 되었다.




그 와중에 나의 강아지 하퍼는 신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어.

나의 강아지 하퍼는 이 기나긴 기다림의 여정에서 너무나도 고마운 존재다. 대체 왜 신께서 내 인생의 스토리를 이렇게 작성하시는 건지 도통 알 수는 없지만, 6-7여 년 전 진심으로 사랑했던 마지막 남자와의 이별 후로 하퍼는 내가 신께 받은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신께서 '이제부터 힘든 시간이 좀 오래 지속되긴 할 건데, 그래도 생을 포기할 정도면 안 되니까 옛다 구호물품(?)이다'하고 보내준 것만 같아. 나를 바다에 던져놓으시고 구명조끼 하나 딸랑 준 느낌이랄까? 하퍼가 나의 구명조끼다. 가족은 나를 구해주지는 못할 망정 다리에 감긴 미역처럼 나를 끌어내린 순간들이 종종 있었는데 하퍼가 나를 살렸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 바다에서 헤엄쳐 나와 땅을 밟을 것이고, 언젠가는 하퍼가 내 품에서 떠나는 날이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날을 학수고대할 수도, 지금의 날을 행복하게 받아들이지도 못하니 - 인생이 참 쓰디쓰다.




목표 없이 어떻게 살지..?

잠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취업준비를 하고 있는 지금.

인생이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조차 예상하지 못하겠다.

엄마와 여행을 하면서 가장 웃겼던 순간이 있었는데, 내가 엄마에게 여행 동선과 목표 시간을 말해주었더니 엄마가 나에게 "왜 우리는 항상 목표가 있어야 해?"하고 의아해했을 때였다. 그 질문은 어이없지만서도 두고두고 생각해봐야 할 질문이지 않나 싶다. 왜 나는 항상 목표가 있어야 하지? 부지런하려고? 성취를 위해서? 성취는 무엇을 위함인데?


결국은 자기만족. 돌고 돌아 첫 번째 단락에서 말한 '행복'을 위해서인데. 성취를 해도 (어린 시절 국제기구 취업을 꿈꿨고, 그것을 이뤘다) 그 행복도 잠시 오히려 더 큰 상실감을 떠넘긴다는 것을 느꼈으니 정말 이제는 '목표를 꼭 세워야 하나?',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하나?' 싶다. 세우지 않으면 남들 눈에는 경쟁력이 없는 가치성이 떨어지는 사람이 될 텐데.. 나는 그걸 포용하기에는 너무나도 세속의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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