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우니까 어쩔 수 없잖아

[제28편] 조단과 떠나는 하지앙 여행 (1)

by 하이디함


조단과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하지앙행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 정거장에 갔다.


그곳에서 조단은 베트남어로 능숙하게 미리 전화통화를 주고받은 버스 운전자를 만났고, 그와 트렁크에 오토바이를 넣는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도대체 오토바이를 어떻게 트렁크 안에 넣는가 싶었는데 여러 명이 오토바이를 들고 옆으로 눕혀 짐칸 안에 실었다. 아래 사진처럼 말이다. 하지앙 여행자들에게 절대 일반적인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단과 함께 있는 게 얼마나 낯설고 어색하던지! 우리는 실제로 딱 한 번만 만난 사이였고, 이후로는 서로 다른 대륙에서 살아가며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가끔씩 기타 연주를 올리는 정도로만 이어진 관계였다. 그가 영국의 한 시골마을에서 기타를 치다가 다시 이렇게 내가 있는 공간으로 들어와 있다는 것이 일종의 가상현실처럼 느껴졌다. 아직 그의 눈과 내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왠지 부끄러워져 자꾸 몸을 베베 꼬게 되었다. 아, 추가로 설명을 하자면 조금 춥기도 했다!


동남아에서 산다고 하면 보통 많은 사람들이 그저 더운 날만 상상을 한다. 일 년 내내 30도를 넘나드는 남부의 호치민과 달리 북부의 하노이는 경량패딩을 껴입어야 할 정도로 추운 계절이 찾아온다. 기온으로는 17도 정도로 한국인이라면 코웃음을 치며 그게 무슨 추위냐고 할 수 있겠지만, 한국의 겨울과는 달리 습도가 높아서인지 한 번에 바삭하고 샤프한 한기가 아니라 뼛속까지 으슬으슬 시려가는 냉기의 느낌이다. 특히, 베트남 중에서도 고산지대로 알려진 사파나 달랏은 가장 무더운 여름철에도 밤에는 긴팔 자켓을 필요로 하는 수준으로 서늘하다. 하지앙 지역은 사파보다도 더 북쪽에 있기도 하고, 하지앙 내에서 산 등선을 이동할 때는 내내 오토바이를 타야 하므로 상당한 추위가 예상됐었다.







버스 안에서


그 서늘한 밤, 조명이 몇 개 안 켜진 버스 터미널에서, 낯선 사람과 슬리핑 버스를 탔다. 얼마 전 작성한 필릭스 편(제26화)에서 슬리핑 버스가 주는 미묘한 로맨스 기류에 대해서 설명했었다. 그 미묘한 기류에도 필릭스와의 거리는 닿아지지 않아 아쉬움을 느꼈었다. 이번에는 애초에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 함께 2인용 자리를 나눠 타는 것이라 최대한 음흉한 마음을 억제하며 커튼이 쳐진 작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내가 안쪽에 조단이 바깥쪽에 자리를 잡았다. 늦은 밤에 출발해 이른 아침에 도착하는 슬리핑 버스라 얼마 되지 않아 대부분의 승객들이 잠들고 버스 엔진의 골골송에 맞춰 나지막이 코를 곯았다.



조단과 나는 긴장이 돼서인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우리는 다른 승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 속삭이는 목소리로 수다를 떨며 서로를 알아갔다. 좁은 공간이다 보니 둘 다 앞을 보면서 대화했었고 가끔 자연스럽게 조단을 확인하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했는데 그때 어둠 속에서 조단의 푸른 홍채가 슬리핑 버스 복도등의 조명이었는지 창문을 통해 비친 달빛이었는지 어떠한 빛을 살짝 머금어 투명하고도 맑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나를 침묵 속에서 잠시 바라보더니 뜸을 들이며 말했다, "Your eyes are really beautiful." 담담한 말투였다. 그럼에도 무언가 정말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 문장을 뱉었다. 눈이 예쁘다는 말이야 내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라면 쉽게 하는 칭찬이었는데 어째서 같은 문장이어도 조단이 말했던 순간이 그렇게 특별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기나긴 버스 여정에 조단도 나도 잠이 들었다. 왼편 천장에 붙은 에어컨이 내 쪽에 있었는데 몇 시간 동안 에어컨 바람을 쐬다 보니 꽤 추워졌다. 추워서인지 우리는 이미 잠결에 어깨와 어깨가 닿아 조금의 체온을 나누고 있었다. 조단은 눈을 감은 채로 뒤척거리며 내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긴 팔을 펼쳐 에어컨 노브를 돌려 닫았다. 그러고서는 그대로 그 팔이 내려왔다. 내려와 나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그전까지 나는 필릭스 때를 생각해 최대한 상대의 공간을 존중해 주려 어색하고 뻣뻣하게 누워 있었다는데 조단이 공간의 구분을 깨고 들어온 것이다. 조단의 제스처를 받자마자 나도 바로 스르륵 편안한 자세로 풀렸다. 내 오른쪽 눈썹 위에 그의 콧김이 닿도록 그의 쪽으로 머리를 살짝 기댔고, 그의 품 안에 더욱 폭 들어갈 수 있도록 자세를 교정한 뒤 감싸 안아준 그의 팔 위로 내 두 손을 살포시 얹었다. 조단은 감싸 안은 오른손으로 천천히 나의 왼팔 뒤쪽을 쓰다듬어 주었고, 우린 훨씬 친밀하고 아늑한 자세가 되어 잠에 들었다.







하지앙 시내


새벽이 밝아오고 5시쯤 하지앙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렸다. 하지앙 시내에 조단이 미리 알아본 숙소가 있어 본격적으로 주행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 눈을 붙였다가 가기로 했다. 한 방에 침대가 두 개가 있는 트윈룸이었다. 둘 다 각자 씻고 나는 굉장히 안 섹시하게 헐렁한 티셔츠와 츄리닝 바지로 갈아입은 뒤 내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갔는데, 조단은 샤워 후 웃통을 탈의한 상태로 자기 침대로 갔다. 에구머니나.. 눈을 가려야 예의였으려나.. 그러나 오.. 너무나도 탐스럽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배구선수 같이 길쭉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근육질의 상체였다. 오른팔에서 가슴까지는 대나무숲 타투가 울거져 있었는데 그 사이사이에 베트남어 문구가 쓰여 있었다. 왼팔에는 필리핀 고전문양과 라벤더 꽃 타투가 있었다. 왼쪽 허벅지에는 EVOLOVE 라는 알 수 없는 단어가 쓰여있었다. 나는 그 대나무숲 타투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여리여리 연하게 붓펜으로 그린 것 같은 대나무 숲이었는데 그의 근육과 팔뚝에 튀어나온 혈관과 아주 잘 어울렸다. 타투가 멋있다고 수줍게 칭찬을 해주고 잠이 들었다.



3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 아침을 먹으러 갔다. 조단이 찾아본 쌀국수집에 갔는데 베트남에서 먹어본 쌀국수 중에서 손에 꼽을 만큼 맛있었다. 조단은 워낙 베트남어를 잘하다 보니 여행 내내 어딜 가든 숙소 주인이며 길거리 할머니며 많은 사람들과 베트남어로 수다를 떨었다. 이 식당에서도 주인아저씨와 계속 얘기를 나눴는데 주인아저씨가 베트남어를 잘하는 서양인이 퍽 마음에 드셨는지 이 식당 쌀국수용 칠리소스를 본인이 직접 만들었다며 어찌나 열정적으로 구구절절 제조 방법을 설명하시던지.. 베트남어를 기본적으로만 하는 나도 대충 이해가 될 정도였다.










옌민으로 가는 길


배를 든든히 채운 우리의 첫 목적지인 '옌민(Yen Minh)'으로 떠났다. 나는 이 여행에 대해 미리 알아온 정보가 전혀 없었어서 여행동선도 모르고 그저 조단의 계획대로 따라갔는데 조단이 미리 예약한 우리의 첫 숙소는 오토바이로 3시간 정도 주행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출발하긴 했지만 울퉁불퉁한 산속 길을 가는 것이다 보니 안전하게 넉넉하게 해가 지기 전에 숙소에 도착해야 했다. 조단은 이미 여러 번 하지앙 여행을 해본 사람답게 여행의 모든 면에서 능숙했다. 예컨대 경찰이 어느 길에 보초를 서는지도 이미 알고 있었고, 국제 운전면허증 하나로는 인정해주지 않고 벌금을 물 것을 익히 알고 있어서 보충 서류까지 미리 다 준비해 갖고 왔다. 무엇보다 역시나 베트남어를 능숙하게 하다 보니 경찰 아저씨들이랑도 웃으며 신나게 얘기를 나눴는데 경찰 아저씨들이 나와는 무슨 관계냐고 묻자 너무나도 거리낌 없이 베트남어로 내가 자기의 아내(vợ)라고 소개하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조단이 해명(?)하길 베트남 문화 특성상 그냥 친구 또는 여자친구라고 말하면 로컬들의 개념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워 설명을 더 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말이 길어지다 보니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고 한다. 과연 이게 일리 있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하지앙 시내에서 예민까지 가는 거리. 거의 3시간 정도 걸린다.


추워서 미라처럼 꽁꽁 싸메고 이동했다.



날씨가 꽤 추워 꽁꽁 싸매긴 했지만 오토바이 주행 특성상 바람을 많이 맞아 추위에 노출되기 때문에 중간중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쉬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쉼터에서 쉴 때마다 얘기를 나누며 서로에 대해 더 잘 알아갈 수 있었다. 우선 나이 공개..! 필자는 이미 조단의 인스타그램 아이디의 숫자로 조단이 몇 년생인지 대충 추측하고 있었지만 조단은 필자가 몇 살인지 모르고 있었다. 내가 그보다 7살 위라고 말하자 그는 제법 놀란 모습이었다. 뭐 서양인이라면 흔히 보이는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서양인의 기준으로는 동양인이 많이 어려 보이니.. 그 외에도 조단은 영어 선생님으로 일할 때 한국 학생들을 많이 가르친다며 애들한테서 배운 한국 인사법을 보여줬다. 누가 봐도 외국인 같은 말투로 "Annyeonghaseyo" 하면서 앞으로 숙여 인사하는데 이제 내가 제법 편해졌는지 자꾸 앵무새 같이 고개를 계속 숙이며 인사를 반복했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 찍어 놓은 영상이 있는데.. 얼굴이 드러날 테니 공개할 수가 없네!



우리는 1시간 주행 후 휴식을 갖기를 반복했다. 마지막 세 번째 주행에서는 추워서 몸이 굳기도 하고 한 자세로 계속 운전해 경직되다 보니 뒤에 탄 필자가 조단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어찌나 작은 스킨십에도 리액션이 찰지던지 마사지해 주는 맛 나더라. 부지런히 안정적으로 주행한 덕에 이른 시간에 숙소를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의 첫 도착지인 옌민의 봉방홈스테이(Bong Bang Homestay)는 리뷰가 1천2백 개가 넘을 정도로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많이 알려진 파티 게스트하우스였다. 그래도 우리가 머문 방은 제법 한적한 구석에 있는 트윈룸이었다.



아래 좌측 사진은 조단이 찍어준 내 뒷모습







과속방지 요소: 필기시험


필자는 하필 이 시기에 이직 필기시험을 봐야 했었다. 일주일 기간 동안 제시된 문제에 맞게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는데 하필 유럽 소재 기관이라 설연휴는 전혀 고려도 안 한 것인지 조단과 여행을 떠나기 직전날 공지된 것이다. 그나마 여행 도중이 아니라 직전에 공지된 것이 다행인 걸 지도 모르겠다. 조단한테 불가피하게 여행기간 내내 필기시험을 보는 데 하루에 2-3시간 정도 보내야 할 것 같다고 양해를 구했고, 여행 내내 노트북을 잡고 있어야 했다. 썸남과 가는 첫 여행에서 필기시험을 매일 저녁에 해야 한다니..! 참 인생 쉽지 않다. 결과부터 얘기하자면 그때 작성한 필기시험 보고서가 붙어서 여행 후 그다음 달에 면접을 보게 된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았다. 우선은 이미 한 번 껴안아본 남자가 옆 침대에 있다는 것이 엄청난 유혹거리였다. 심지어 이미 그 아름다운 대나무숲을 보지 않았는가!.. 하..! 그의 품속에서 긴 주행으로 차게 굳은 몸을 풀고 싶었다. 저녁을 먹기 전이니까 아주 잠깐만 몸 좀 녹이자는 생각으로 그가 누워 있는 따뜻한 이불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극-락! 우리는 꼭 붙어 껴안았다. 그러고는 버스에서보다 더 긴밀한 둘만의 공간에서 처음으로 입을 맞추었다. 입을 맞추다 보니 당연히 열이 올랐다. 조단의 눈과 얼굴이 온통 붉어졌고, 그는 뜨거워진 입김을 내뿜으며 나를 위아래로 바라보더니 "세상에, 네가 서른다섯 살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아.. 그럼 뭐, 15년 동안 이렇게 한결같이 핫했다는 거야?! 말도 안 돼.. (Holy shit, I can't believe you're 35. Does that mean you've been hot like this for like what 15 years?! What on earth..)"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빵 터졌다. 얼마나 자신감이 상승되든지! 괜스레 섹시해진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젊고 아름답구나 싶어 더욱 자신감 있게 그에게 애정 표현을 할 수 있었다. 다행히 우리의 열기는 저녁시간이 되어 적당한 타이밍에 끊겼다.



하지앙 여행 중에는 산속 마을에 식당이 별로 없는 관계로 숙소에서 저녁을 차려준다. 조단과 머물렀던 세 곳의 숙소는 다 음식이 진...짜 맛있었다. 하... 베트남 로컬음식 언제 어떻게 질리는데.. 심지어 중국 국경과 가까운 동네라 그런지 음식 간도 한국인한테 더 잘 맞는 것 같았다. (남부는 양념이 좀 달큰한 편이다.) 맛있는 음식과 더불어 '해피 워터(Happy water)'라고 지역에서 또는 집에서 직접 대대로 만들어온 옥수수 또는 쌀 증류주를 제공한다. 최근에 라오스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메탄올 술을 마시고 사망하는 경우가 보고되면서 화제가 됐다. 그 당시 나는 베트남에서 2년 3개월 살면서 음식으로 장난을 치는 경우는 본 적이 없어 신뢰하고 한두 잔 정도 마셨으나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좀 더 신중할 것을 권하고 싶다. 해피워터든 맥주든 운전을 하면서 여행을 하는 코스이다 보니 과음은 금물!



그래도 베트남은 음식과 술을 사랑하는 국가라서 외국인 관광객에게 "하나 둘셋 짠! 둘셋 짠짠! 둘 셋 마셔라! (Một, hai, ba, dzô! Hai, ba, dzô dzô! Hai, ba, uống!)"라고 말하는 법을 가르치고 다 같이 외치며 여러 잔을 털게 했다. 필자는 본래 흥이 많은 편이고 술도 상당히 즐기는 편이라 조단과 함께 다른 숙객들과도 친해지며 유흥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몹시몹시) 그러나 필기시험을 봐야 하는 관계로 딱 한 잔으로 자제하고 밥만 먹고 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필자가 필기시험을 보는 동안 조단이 다른 미모의 외국인 관광객과 엮이면 어쩌나 하고 괜한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1시간 정도 작성하다가 몰래 방에서 나와 홀을 내려다보았는데 조단은 얌전하게 남자들이랑만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십분 지나지 않아 우리의 방으로 돌아왔다. 나였으면 훨씬 오래 놀았을 것 같은데.. 찌질하게 여행지에 와서 시험 보고 있는 내가 걱정되서인지 와서 잘하고 있는지 물어봐주었다. 시험을 보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그날밤 나는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을 텐데.. 시험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조단과 나는 서두르지 않고 서로를 천천히 알아갈 수 있었다.







다음 날, 조식을 먹으려고 기다리는 동안 조단이 하모니카와 책 한 권을 갖고 왔다.


부모님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준 거라며 멋들어지게 작은 하모니카를 불었다. 책도 한 챕터 낭독해 줬다. 어떤 책이었더라? 음악을 예찬하는 삶에 대한 에세이 책이었던 것 같은데.. 짧은 에세이 단편이 여러 개 있어서 하루에 하나 두 개 정도를 낭독했었다. 솔직히 집중해서 듣지는 않아서 뭔 내용이었는지 기억도 못하지만 그의 진한 영국 억양과 목소리를 듣고 집중하는 표정을 보는 것이 좋았다.



다음 목적지는 1시간 반 거리의 동반(Đồng Văn).



과연 필자는 조단과 다투지 않고 여행을 끝까지 이어갈 수 있었을지!

하지앙 여행썰은 다음 편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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