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또 Jan 09. 2017

네가 무엇을 하든
우린 신경 쓰지 않아.

인턴, 네덜란드 #3. 자유와 책임이란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다지만, 사람 일하는 곳은 다른가 보다. 나라 별로, 회사 별로 그리고 아마도 함께 일하는 사람에 따라서도. 아직 두 달된 인턴일 뿐이라 회사의 깊은 속사정과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첫 출근날부터 지금까지도 '회사의 첫인상'으로써 꽤나 멋진 점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 점이 지금 내 행복한 인턴 생활 중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한데, 바로 '개인의 책임'이다. 




첫 출근날, 내 자리에 가방도 놓지 못한 채 회사를 한 바퀴 돌며 인사를 하고 다녔다. 보스와 함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한 명 한 명 악수와 함께 자기소개를 하고 환영 인사를 받았다. 영어 이름이 있긴 했지만 굳이 내 한국식 이름을 물어보고 불러주고 싶어 했다. 한 번은 칠판에 한글로 쓰기까지 했었는데, 이것이 글자인 것인가에 대해 당혹스러워하던 사람들의 눈빛이 아직도 기억난다. 


사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았을 때 내 머릿속에 남는 것은 없었다. 분명 수 십 명과 인사를 한 것 같은데 얼굴과 이름이 모두 기억이 나지 않았다. 회사에 동양인이 별로 없는 지라 모두들 새로운 아시아계 인턴으로 날 기억했지만, 30여 분 만에 수십 명의 서양인을 만난 나로서는 보스 얼굴 만이라도 안 까먹는 게 다행이었다. 그리고 이 부족한 기억력엔 근무 환경도 한몫했었는데, 바로 개방형 사무공간이다.


개방형 근무 공간. 모든 책상엔 듀얼로 사용할 수 있는 모니터만 놓여져 있다.


널찍한 공간에 주인 없는 책상들이 가득하다. 파티션이 존재하지 않기에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맞춰 여러 팀이 한데 어우러져 함께 일을 한다. 사람들은 매일 아침 앉고 싶은 자리에 앉는다. 아직 다른 많은 회사에서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근무 환경 중 하나이지만, 이 곳에서는 나쁘지 않게 유연하게 활용되고 있었다. 이렇게 매일 자리가 바뀌고 팀 구분도 명확치 않으니, 사람 기억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그렇게 첫날, 모두에게 인사를 마치고 나도 빈자리를 찾아 조용히 앉아 노트북을 켰다.




첫 2주 정도는 특별히 내게 맡겨진 일이 없어 회사 구경과 함께 주변 관찰을 더 많이 했었다. 매일매일 주변 사람들이 바뀐다는 점과 더불어 또 발견한 눈에 띄는 점은, 정말 끊임없이 대화를 한다는 점이었다. 지나가다 눈이 마주치면 '커피?'라 물어보며 같이 커피 타임을 가지기도 하고, 근무시간 내내 사무실 내에는 수많은 잡담들이 오간다. 업무 관련 내용도 있지만 주말에 뭐했는지부터 유기농 식단과 전 세계 날씨 이야기까지 내용은 가지각색이었다.  


대화뿐만이 아니라 굉장히 자유로운 출퇴근도 눈에 띄는 점이었는데, 아침에 자전거에 문제가 생겨서, 퇴근 후에 어디 갈 곳이 있어서, 어제 일을 많이 했으므로, 혹은 오늘은 금요일이니까!라는 다양한 이유들로 출퇴근 시간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누구도 내게 회사 규율이라던가 근무시간을 정확히 알려준 적이 없었다. 결국 혼란에 빠져 동료들에게 물어봤지만, 그 친구조차 굉장히 고민 끝에 내게 했던 말은(마치 굳이 생각해본 적 없다는 것처럼),


"음... 공식적으로는 9시부터 5시지만... 보통 점심은 책상에서 간단하게 먹으니까... 그런데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회의 같은 상대방과의 약속만 없으면, 너 마음이야."이었다.


이 때문인지 평일에도 낮 혹은 저녁에도 카페에서 업무를 하고 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아니, 자기 책상도 정해져 있지 않아 출퇴근 확인도 가시적으로는 불가능한데, 심지어 근무 시간 동안에도 일상 대화를 많이 하고 회사는 이를 위한 커피 테이블을 홀 중앙에 만들어줬다. 직원들이 개인 일정으로 근무 시간을 조정하거나 재택근무를 하여도 어디에 보고하여야 할 의무는 없다. 실제로 주 1회 재택근무를 공론화시키는 직원들도 많다. 너무 자유로운 것 아닌가? 회사는 직원이 일을 하는지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지 않은 건가? 이 서로를 향한 근본적인 믿음은 무엇인지 너무 궁금했다.




회사는, 그리고 이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개인의 일상과 일을 동시에 인정하고 있었다. 일이 전부가 되지 않음을 이해해주고, 이와 함께 자유를 인정해준다. 물론 이러한 자유가 그냥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밑에는 나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보장하겠다는 약속과 믿음이 깔려 있다. 나는 자유와 함께 책임의 의무를 갖는다. 내가 근무시간 내내 커피를 마시든, 어느 날 갑자기 하루 모습을 보이지 않든, 3시에 퇴근을 하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내가 데드라인까지 나의 일을 충분히 수행할 것이라 믿기 때문에. 그리고 나 스스로도 그러한 책임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네가 무엇을 하든 아무도 신경 안 써"

처음으로 회사에 지각한 날, 내가 너무 눈치 보는 것처럼 보였는지 친구가 내게 말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삭막한 말이고, 때론 외롭게까지 느껴지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속엔 근본적인 믿음이 깔려 있다. 이 회사에 네가 다니고 있고, 그러기에 충분히 멋있고 성실하며 업무에 관련해 믿을 수 있는 사람 일 것이다라는 전제. 


회사는 하루 8시간, 주 5일 자신에게만 충실하고 맹목적인 직원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성장하기 위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는 직원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그 책임과 믿음을 져버렸을 때의 시선의 변화와 그에 따른 책임은 또 오롯이 본인이 받아들여야 하기에 양면성을 띄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 속에서 갖는 책임감과, 이에 따른 자유를 누리는 것에 대한 행복은 충분히 가치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평화롭고 여유롭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