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늦지 않은 시간에
화장실 정도 들를 수 있는 시간에
도착한 나는
플랫폼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무심한 역무원의 손짓을 따라
한층 내려간 탑승구에는
이미 내가 예매한 것인지 싶은 열차가 도착해 있다.
목적지를 확인하기 위해 열차 옆면을 확인한다.
제길, 적혀있어야 할 목적지는 보이지 않는다.
역무원에게 표를 보여준다.
역시 무심하게 이 열차를 가리킨다.
열차에 오르기 위해 문으로 향한다.
탑승 시 계단을 조심하라는 둥 내리는 승객을 기다려 달라는 둥 하는
말들이 빨간 글씨로 적혀 있다.
그걸 보고 나는 울화가 치민다.
반드시 있어야 할 목적지는 써놓지도 않는 놈들이
저런 건 잘도 써 놓았네.
그것도 빨간 글씨로.
열차에 올라탄 뒤 내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이런,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열차네 이거...
좌석마다 적혀있을 번호는 도무지 보이 지를 않는다.
13C...
열세 번째 줄을 세어보는데
이쪽부터 1번인지
저 끝부터 1번인지
그럼
창가 쪽이 A 인지 B 인지
이딴 걸 계산해야 되는 사실이 화가 난다.
대충 내가 있는 쪽에서 열세 번째 줄의 통로 쪽 자리를 차지했다.
눈을 감는다.
시끌시끌 짐 옮기는 소리
자리로 찾아들 가는 사람들 발소리
대체 이 인간들은
이따위 엉망인 열차를 저렇게 평온하게도 잘만 타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열차는 출발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인데 출발시간 따위를 지킬 까 싶어
시간도 확인하지 않았다.
목적지도 내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듯이
속이 메슥거려 바람이라도 쐬기로 한다.
통로칸에 가있으면 좀 낫겠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앞에 또 무언가 붙어있다.
손잡이를 돌리면 문이 열립니다.
이딴 걸 모를만한 인간도 있나
목적지도 좌석번호도 안 써놓는 놈들이
이런 건 왜 중요하다고 잘도 써놓는 건지.
그것도 빨간 글씨로...
치미는 화를 끌어안고 통로칸으로 향한다.
수화물을 놓는 선반이 있고
작은 음료자판기가 놓여있다.
그리고 화장실이 있다.
분실의 위험이 있으니 귀중품은 직접 소지하세요
고장 위험이 있으니 자판기에 기대지 마시오
열차가 흔들리니 화장실 사용 시 손잡이를 잡으시오
같은 것들이 좁은 벽면에 덕지덕지 쓰여있다.
그것도 새빨간 글씨로...
이 열차의 모든 게 맘에 들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빨간색으로 써놓은 멍청한 것들이 아니고서야 모를 수가 없는 것들부터
응당 써놓아야 할 것들은 빼먹는 멍청이들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가방에서 까만 펜을 꺼냈다.
통로칸에는 나뿐이었다.
목적지도 내 좌석도 모르는 놈들
나라도 정상이어야지
멍청이들을 위한 빨간 글씨들을 모조리 검정색으로 칠했다.
이따위 것들을 써놓을 시간에
목적지랑 좌석번호나 제대로 써놓으라고 생각하면서.
속이 시원했다.
빨간색을 온통 덮어버리려 꾹꾹 칠했던
검정 펜은 이미 붓이 다 망가져버려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하나 뽑아 마시기로 했다.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뒤져 집어넣었다.
버튼을 눌러도 응답이 없었다.
이 망할 열차는 고장 난 자판기에는 역시 아무것도 써놓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을 하였다.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내 자리라고 생각되는 자리로.
까만 펜 한 개와 음료수 값을 날리고 난 뒤라
속이 좀 후련하면서도 불편했다.
이 멍청한 열차 안에서
나는 그렇게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