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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원재 Oct 01. 2022

코미디와 화해하기

넷플릭스 스탠드업 코미디 <지미 카: 히즈 다크 머터리얼>

 오늘은 영화 비평이 아니라, 넷플릭스의 스탠드업 코미디를 이야기해볼까 한다. 영화에서 코미디를 만드는 방식을 말하기에는 모르는 게 많고, 기본적으로 코미디가 무엇인지,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 먼저 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사람은 웃음의 포인트가 다 다르다. 어떤 영화는 재미있고, 어떤 영화는 재미없다. 특히나 혼자서 재미있는 무언가를 볼때, 그것이 특히나 재미 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간혹, 스탠드업 코미디 등 신랄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장면에서는, 조금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댓글들이 보인다. 


  코미디는 맥락에서 작동한다. 예컨대 이런 말을 했다고 치자, "몇 살이세요?" 이건 의문의 발화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상대방이 "서른 살이에요" 등의 대답을 할 것이라고 기대를 한다. 하지만 대뜸 "몸살이요."라고하면 우리의 기대는 갑자기 엉뚱한 맥락으로 무너지게 된다. 이게 처음 만나는 상대와의 발화라고 하면 사실 우린 '미친놈인가?'하는 생각을 할 것이며, 전혀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과는 더이상 대화를 이어나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저 발화는 <무한도전> ep231 정총무가 쏜다 특집의 '웃지 않기 게임'에서 한 발화 내용이다. 우린 이런 코미디 프로그램이라는 맥락에서 웃게된다. 코미디는 맥락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를 더 발견할 수 있다. 코미디는 일반 사람이 하는 일반적인 기대와 상식에서 다소 엉뚱하거나 신랄한 방식으로 뒤틀릴 때 작동한다. 여기에는 바로 아이러니가 작용한다.


 코미디는 결국 맥락을 이용한 아이러니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영미권의 스탠드업 코미디는 바로 이러한 아이러니와 언어유희, 펀치라인을 이용한 신랄한 코미디를 잘 보여준다. 특히나 '지미 카'는 posh억양을 사용하며 굉장히 수위가 쎈 농담을 하기로 유명하다. 


 그는 굉장히 빠른 말의 빠르기로 언어, 개념을 가지고 농담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어가 함의하는 개념에 대한 농담이라는 것이다. 그가 건드리는 것은 '인종', '범죄', '학살', '젠더' 등 현대 사회의 갖가지 이슈가 되는 것들에 대해 과감하게 농담한다.


 이것이 농담이고 코미디가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그 범죄에 대한 피해자를 조롱하는 농담이 아니라, 범죄가 가지고 있는 일련의 개념을 가지고 뒤틀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우리가 그 '나쁜' 행위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게 만든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When people talk about the holocaust,  they talk about the tragedy and horror of 6 million jewish lives being lost to the Nazi war machine. But they never mention the thousands of Gypsies that were killed by the Nazis. No one ever talks about that because no one ever wants to talk about the positives."

  "사람들은 홀로코스트에 대해 얘기할 때, 유대인 수백만 명이 죽은 비극과 공포를 언급합니다. 그러나 수천명의 집시가 죽은 것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홀로코스트의 좋은 점에 대해서는 말하기 싫어하기 때문이죠."

 (넷플릭스 <지미 카: 히즈 다크 머터리얼>의 코미디다.)

 

 굉장히 끔찍한 표현이다. 만약 당신이, 광장에서, 이런 말을 크게 떠든다고 생각해보라. 아니, 베를린에서 확성기로 저런 연설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아마 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총을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농담이다. 끔찍한 것에 '대한' 농담. 사람들은 머뭇거리다가도 박수 갈채를 보내며 폭소한다. 왜 이것이 사람들에게 웃긴 농담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


 우선 이것은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자들에 대한 농담이 아니라, 홀로코스트에 대한 농담이다. 메타언어적인 특성을 지닌다. 이것으로 우리는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개념으로 맥락을 옮길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이 수백만명 희생된 끔찍한 비극'을 언급한다. 동시에 그곳에는 유대인만 존재하지 않았다는 새로운 사실을 굉장한 아이러니로 표현한다. 집시의 죽음이라는 문제로 말이다. (집시족 문제는 유럽 사회에서 꽤나 시끄러운 문제이며, 이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존재한다는 맥락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꽤나 신랄한 비판이 되면서 동시에 코미디가 된다. 사람들은 홀로코스트에 대해 비극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들에게 위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는 집시족의 문제에 대해선 암묵적인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꼬집으면서,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을 다시 사람들에게 각인시켜준다.


 이것은 언어적으로 긍정이 올 수 없는 자리에 긍정적임을 배치하면서 언어적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웃음을 자아내고, 상황적 아이러니에서 사람들을 풍자하고 해학적으로 표현한다. 이것이 바로 좋은 코미디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홀로코스트'에 대해 언급했다는 것만으로도 질색하며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 비극적인 사건을 웃기게 표현할 수 있죠?'라면서.


 하지만 우리의 인식은 그것을 언급하지 않으면 잊는다. 너무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인류사에서 가장 일어나서는 안될 비극을 우리는 그저 기억 저편에 남겨두고 말아야 하는가?  차라리 웃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코미디와 유머는 금기를 추락시킨다. 금기와 터부로 남는 것은 그것에 대한 논의 자체를 거부하게 된다.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금지라면, 그것은 영원히 치유될 수 없고 끔찍하고 무서운 것으로 남는다. 다시 누군가 그 금/기를 어기려고 할때, 우리는 대처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일단 코미디와 화해할 필요가 있다. 코미디의 소재를 과감하게 들여다 보자. 우리 삶의 논란거리는 사실 인간의 인식이 만든 개념이다. 우주론적인 개념에서 인간이 닿을 수 있는 우주는 한계가 존재한다. 우주는 우리로부터 굉장히 빠르게 멀어졌고, 광속을 초월해서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닿을 수 없는 우주가 존재한다. 결국 우리의 인식은 우주 차원에서 한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의 한계는 언어적 인식 안에 어느정도 갇혀있다. 절대적인 진리와 객관적 사실은 사실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진다. 


 과감하게 해체하고 추락시켜보자. 그리고 다시 그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코미디는 그것을 유머라는 인간적 무기를 가지고 과감히 시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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