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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원재 Nov 25. 2022

영화를 좋아하세요?

영화관 매너에 관한 단상

 영화관이란 공간은 결코 안락한 공간이 아니다. 암흑의 극장 속에 보이는 것도 없어 언제 계단에 걸려 넘어져 다칠지 모르는 위험한 공간이며 음료수를 마시는 것조차 눈치 보일 정도로 불편한 공간이다. 팝콘을 집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 입에서 씹는 소리까지 신경 써야 할 정도로 제약이 많이 생기는 공간이다. 의자는 또 어떤가? 집중하고 있노라면 자세가 불편해지고, 움직이려고 하면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괜히 신경쓰인다. 코미디 영화라면 괜찮지만, 웃는 것 또한 자유롭지 않다. 나 좀 뜬금없는 웃음 포인트가 있다. 이를테면 츠카모토 신야의 영화 <철남>에서 드릴(...)이 솟아나는 장면이라든가 -나는 여기서 폭소할 뻔했다- 하는 조금 기괴한 웃음 포인트가 있다. 그러나 이를 드러내며 극장에서 크게 웃기는 어렵다. 일전에 <헤어질 결심>을 보다가, 물을 한 모금 마시는데 사레가 들어 기침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틀어막으면서 영화에 집중했다.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자유롭지 않다.

 그렇다. 영화관은 불편한 공간이다. 참으면 안 되는 생리현상을 참아가며 영화를 봐야 하는 공간이다. 굳이 왜 우리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까? 그 이유를 일일이 대기는 어렵다. 누군가는 영화가 좋아서, 기대하는 감독의 작품이라서, 좋아하는 배우의 작품이라서, 좋아하는 소재라서, 장르라서, 정말 다양한 이유가 있어서 우리는 영화관에 향한다. 어찌보면 영화관이란 각자의 욕망이 부딪는 장소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영화관 매너의 출발선일 것이다.

 어제는 <올빼미>를 보았다. 나는 영화에 대해선 욕심이 가득하다. 단 한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럴 것이다. 영화관엔 물 외에는 들고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먹는 소리에 방해받고 싶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부류의 인간이다. 나 자신의 먹는 소리조차 거슬리기 때문에 음식물을 잘 들고 가지는 않는 편이다. 당연히도 타인의 휴대폰의 불빛이나 떠드는 소리는 정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킨다.

 어제 <올빼미>를 보는 내내 떠드는 부부가 있었다. 정말 유해진이 나올 때마다 웃고 떠들며 휴대폰이 울리고 전화를 받고. 화가 머리끝까지 나지만 처음엔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영화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저런 '교양없는' 자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싫었다. 애초에 한 마디 말로 고쳐질 사람이라면 몰지각한 일을 잘 하지 않는다. '영화관에선 떠들지 않는다'라는 단순한 얘기를 말해줘야만 지키는 사람은, 미취학 아동이 아닌 이상 없다. 아니면 뭐, 80년정도 얼려진 캡틴 아메리카라던가-캡틴의 시대에도 영화는 있었지만 말이다.- 결국 강수를 두는 수밖에 없었긴 했다. 뒷자석으로 닌자처럼 이동해서, 의자를 툭툭 건들고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들은 곧, "죄송하다"고 했지만, 난 그게 더 화가 났다. 기껏 소리를 내지 말랬더니 또 말을 한다. 인간이란 도통 입을 다물지 못한다고 어느 작품에서 그러더니만, 정말 그 말이 맞다고 느낄 정도였다.

 영화관을 찾는 관객들은 누구인가? 생각해 본다. 다들 영화에 대해 기대하면서 오는 사람들일 것이다. 감독이 좋아서든 배우가 좋아서든 관심이 있는 소재나 장르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러 오는 곳이다. 그렇기에 불편함을 감수하며 거기에 앉아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여기 영화관 매너라는 것은 그런 관점에 있다. 나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그 2시간 남짓한 시간에 입닫고 있는 것은 정말 인간적인 행동이 아닌가?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같은 교과서적인 이야기는 별로 와닿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원래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 움직이는 존재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니다.

 이기적 이타주의라는 말이 있다. 요컨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곧 타인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난 이 말을 정말 좋아한다. 절대적인 도덕, 윤리는 오히려 추상적이다. 지켜야할 가치와 덕목, 십계명 등은 상황만 부여하면 언제든지 어길 수 있다. '살인하지 말라'는 얘기를 예로 들어보자.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암살한 안중근은 살인자인가?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윤봉길은 테러리스트인가? 우리는 그 분들을 "義士" 곧 의로운 일을 한 사람으로 이야기한다. 절대적인 선과 윤리라는 것은 여기서 모호함에 빠진다.

 영화관에서 '떠들지 말라'를 십계명으로 정한다 치자. 영화관에서 불이 났다. 우리는 떠들지 말아야 하는가? 우리는 조용히 침묵을 해야하는 것인가? 그런 멍청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타인을 위해서 해야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를 보고자 하는 욕망. 그 욕구와 희망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제발, 나를 위해서라도 떠들지 말자. 그것은 곧 모두의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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