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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원재 Jan 26. 2023

영화관 예찬

영화관에 앉은 관객도 영화를 만들어 간다.

 일찍이 정성일 평론가가 퍼뜨렸던 트뤼포의 인용구- 영화를 사랑하는 세 가지 방법에 대한 트뤼포의 말이라고 일컬었던 - 가 있다. 그것은 바로 "첫번째는 영화를 두번 보는 것, 둘째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것, 셋째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이 말은 사실 정성일 평론가가 트뤼포의 말을 재해석한 말이다. (출처 :  http://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10214 [가짜명언 팩트체크] 각색된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광 3법칙’)


 이것이 '가짜명언'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정성일 평론가의 해석에 공감한다. 출처 기사에서 밝히고 있는 실제 트뤼포의 말 "영화의 선택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곧 영화를 만든다는 의미가 된다고 생각한다. 영화 감독이 되지 않더라도, 그 촬영 현장에 함께하지 않더라도 영화가 하지 않았던 그 수많았던 선택들을 고민해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르트에 따르면 "말하는 것은 언어이지 저자가 아니"다. 이는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을 의미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영화와 가상적 담론의 공간에 있게 된다. 독자인 관객은 영화 텍스트, 이미지와 직접 소통하게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각자의 영화를 시공간과 연결시키고 구성하게 된다. 거기서 영화의 선택을 생각한다.  그렇게 영화는 만들어진다.


 나는 '가상적 담론의 공간'의 실현태가 영화관이라는 물리적 실체에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물론 여기에, 마치 교회개혁시기의 이야기처럼, 영화가 있는 곳이 곧 영화관이라는 주장을 과감하게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영화관을 의미한다.


 혼자 집에서 보는 영화와는 다르게, 영화관은 수많은 사람들과 같은 스크린을 바라보며 함께 본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지도 않으면서, 묵묵히 타인의 시청을 배려하며 자신만의 스크린을 바라보게 된다. 이때 나의 생각은 '참 포근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어둠의 공간 속에서, 바깥 세계와는 단절된 공간에서 영화와 나는 마주한다. '자 이제 너의 이야기를 한번 들려다오' 하면서 말이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때는 평상시에 어떤 영상을 볼 때와는 다르다. TV를 통해 거실에서 명절특선영화를 볼 때와, 방에 혼자 불을 꺼놓고 모니터를 통해 영화를 볼 때, 또 스마트폰을 통해 영화를 볼 때와는 다르다. 각각의 보는 방식도 매체도 다르지만 무엇보다도 영화와 오롯이 함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상하게도 극장이다. 특이하게도 극장은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공간인데도 말이다.


 저마다의 스크린에서 저마다의 이미지를 자신의 현실과 결합시켜 나가는 공간이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아무리 일행과 함께 온 곳이더라도 영화는 스스로 보는 것이다. 시네마가 서사성을 지닌 이미지 형식의 연속체라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발산하는 해석체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영화를 보는 관객은 끊임없는 세미오시스로 시네마를 발산시키고 확장시켜나간다. 범람하는 이미지들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을 파헤쳐 나가는 것이다.


 같은 영화를 두번 보는 것은 여기로 다시 귀결된다. 이제 우리는 '같은 영화'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에드워드 양 <하나 그리고 둘> 속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불확정성'에 대한 인간의 고뇌는 곧 '영화'가 맞닥들인 고뇌가 된다. 매번 같은 영화, 같은 감독의 영화를 본다해도 당신이 과거에 본 영화는 이제 거기 없다. 현재화된 세계와 시네마, 삶만이 존재한다.


 영화관에 100명의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각기 저마다 100가지의 현실이 동시에 존재하는 셈이다. 그럼, 그곳에는 영화가 선택할 수 있었던 무한대의 세계-멀티버스-가 생성된다. 영화관의 거대한 스크린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실체적 물리적 장소가 된다. 이 비좁고 어두운 영화관은 그래서 포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감상한 영화에 대한 애정을 쏟을 수도, 비난을 쏟을 수도 있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관객을 통해 완성되는 게 영화의 본질이고, 그 담론의 장은 영화관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시네필이 되는 세 가지 방법에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 포함되어있다면, 영화관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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