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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원재 Apr 06. 2023

한국영화의 위기를 통해 스스로를 되묻다

영화를 어떻게 바라볼지 관점 점검하기

지금이 한국영화의 침체기라는 것은 사실상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난 한국영화의 전성기가 이미 훨씬 오래전에 지나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생충>이 그 기점이냐고? 전혀 아니다. 분명 한국영화의 쾌거는 맞지만 그것은 봉준호 감독이 이룩한 결과물이다. (물론 영화에 참여한 그 모든 분들의 결과물임을 잊지는 말아야 할 것이지만 편의상 얘기하겠다.) 한국영화는 그 이전에 이미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우리 영화가 세계에서 인정받았던 것은, 애석하게도 한국영화의 승리가 아니라 봉준호 감독의 승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거장으로 꼽는 감독들을 살펴보자. 박찬욱, 홍상수, 이창동, 봉준호.


홍상수(1995,<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박찬욱(1992, <달은...해가 꾸는 꿈>) , 이창동(1997,<초록물고기>) 이들은 90년대에 데뷔했고 봉준호 감독님은 00년 <플란다스의 개>로 장편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지구를 지켜라>로 독특한 세계관을 펼쳐준 장준환 감독님.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로 한국 멜로의 지평을 열어 준 허준호 감독님. <왕의 남자>로 인간의 뒤틀린 애정과 욕망을 조망한 이준익 감독님. <달콤한 인생>으로 스타일리시한 영화를 선보인 김지운 감독님.


이들의 영화 또한 90~00년대 초반을 거쳐 데뷔하며 한국영화를 이끌었다. 이러한 거장들의 뒤를 잇듯 나타나는 감독들을, 아직 나는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언급하지 못한 감독님들이 계시지만, 여하튼 중요한 건 많지 않다는 것)


물론 거장이라는 타이틀이 매번 밥먹듯이 등장하는 것도 있을 리 없는 일이지만, 상업성과 예술성을 잡고 독특한 작가세계를 펼치는 작가주의적 성향의 감독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 바다.


리고 이 결과로 보건대, 이렇게 작가적 야망을 지닌 감독들이 많지 않다는 것은 한국 영화의 지평을 넓혀줄 젊은 감독이 없어져가고 있다는 것, 노후되고 고여가는 생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현상의 원인은 복합적일 것이다. 한국 영화에 대한 지원문제, 산업적인 변화, OTT의 전성시대 등등. 거시적으로 등장할 수 있는 요인들은 정말 많을 것이다.


다만 나는 관객으로서의 자신 또한 되물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발전할 수 있는 목소리를 내었는지, 스스로의 관점을 점검하고 조정하는 열린 관객으로서 영화를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내가 영화를 보는 관점전환하게 된 계기는 장선우 감독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David bordwell의 <Film history> 한국 영화 섹션에 등장한 것을 봤었을 때였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으로 그는(장선우) 무성영화, 만화책 신화, 비디오 게임 미학을 융합하는 것으로 <매트릭스>를 뛰어넘었다."(Kristin Thompson, David bordwell, HS MEDIA번역팀 <세계 영화사>, 699쪽, 2011)


영화팬들이라면 알 것이다. 이 영화가 얼마나 망작인지를, 쓰레기 영화인지를. "짜장면으로 맞아볼래?" 하는 대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 연출 이전에 장선우 감독은 <경마장 가는 길>이라는 영화로 평단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는 감독이었다.


물론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좋은 영화라는 이야기를 할 생각은 아니지만,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이 영화가 왜 미국 영화학에서 다루어지고 있었는가를 주목해 볼 필요는 있다. 당신이 데이비드 보드웰의 견해에 동의하든 안 하든 이 미국의 영화학자는 사람들에게 잊힌 영화의 맥을 짚었고 의미를 살려내었다.


사람들이 그토록 쓰레기 영화라고 하는데 한국 영화사의 한 부분으로 소개되는 부분은 나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도대체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아야 의미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영화를 보는 관점의 전환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영화는 좋고 이 영화는 나쁘다는 개인 취향을 넘어선 어떤 의미를 나에게 주는가?를 되물으면서 동시에 순히 영화가 나쁘다고 해서 이 영화가 만들어져선 안 됐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정성일 평론가는 일찍이부터 별점을 매기지 않았는데, 이렇게 영화를 보는 "정량적"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은 영화를 단순한 소비재로써 취급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는 분명 상업적 상품이지만, 예술이다. 별점 제도는 굉장히 효율적인 상품선택을 돕지만, 그것이 지니는 가치를 제대로 매겨주는 척도로는 부적합하다.


지금의 영화는 그러나, 이러한 정량적인 분석에 매몰되어, 타인의 영화평에 기대고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잃은 평가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심지어 일부 평론가에게도 이런 정량적 평가에 매몰된 시각이 보이기도 한다. "여기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을까"의 태도는 영화계가 고이고 썩어가는 생태계임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다.


<헤어질 결심>이 불륜 미화라고 보는 시각에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지만(서래의 마지막과 해준의 정처 없이 떠도는 눈빛을 보라, 그것은 비극이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탐한 자의 파멸에 가깝다. 단순히 둘의 만남이 아름답게 보였던 적이 있다는 것이 미화의 근거로 보기엔 어렵다.) 그렇게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그 시각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런 시각을 통해 이건 쓰레기영화고 부도덕적인 영화니까 감독은 최악의 인간이고, 나쁜 사람이며 이런 영화는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쳐보자. 그리고 별점 0.5점을 부여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내놓은 결과물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더 이상의 논의가 불가능한 닫은 결말을 스스로 내버렸다. 이런 평가들은 어떤 부분에서 굉장히 무의미하게 보인다. 작품을 비난하는 것은 감정의 소모에 불과하다. 이미 만든 것을 처음부터 부정하는 것은, 굉장히 당혹스러운 평가다.


반면 데이비드 보드웰의 서술처럼,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진정 <매트릭스>를 뛰어넘은 영화인지에 대해선 알 수 없지만, 영화가 지니는 정성적인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는 시각에선 어떤 영화든 발전할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good or bad가 전부가 아닌 셈이다. 나에게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가치는 어떻게 느끼게 되었으며 아쉬운 것은 무엇이었는지, 개선점은 무엇이며 좋은 부분이 무엇인지 그것을 발견하고 서술할 수 있는 정성적 평가가 필요하다.


비싼 티켓값을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지불할 수밖에 없는 우리 영화팬들, 영화광들은, 스스로의 관점을 점검하고 영화의 의미를 찾는 보다 능동적인 관객으로 변모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영화는 쓰레기야 같은 평가는 더 이상의 의미를 찾지 못하게 한다. 이해가 안 가는 점, 의문인 점이 약점일 수도 있지만 개선의 여지가 보이는 부분일 수도 있다. 우린 그런 소중한 피드백을 통해 한국 영화라는 토양을 더욱 비옥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는 관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현재 한국영화가 봉착한 수많은 문제들 속에 관객으로서의 나 자신이 전혀 관계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지금의 문제를 진단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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