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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원재 Sep 01. 2022

<에무시네마>의 기억

영화관이라는 공간에 담긴 영화 같은 기억

 서울에는 꽤나 많은 독립예술영화관이 있다. 나는 주로 노원에 위치한 더숲 아트시네마와 경희궁 외곽에 위치한 에무시네마를 자주 간다. 나는 이 두 영화관이 좋다. 일을 하고 있지 않는 지금은 정말 각 영화관은 일주일에 한두 번 이상 가는 듯하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독립예술영화관 중 "나만의 영화관"같은 게 있을 것이다. 나에게 <에무 시네마>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은 이유가 있다.


 에무시네마에선 별빛 영화제라는 이름의 야외 상영회를 한다. 날씨가 좋아지는 5월 무렵부터 가을까지 여름밤에 어울리는 영화들을 상영하는 프로그램이다. 나는 작년 왕가위 작품이 4k 리마스터링으로 개봉되어 한 해 내내 상영할 당시 이 별빛 영화제의 예매를 몇 번인가 시도한 적이 있으나 엄청난 인기로 인해 번번이 실패했다. 나는 수강신청이나 티켓팅 같은 일에는 영 재능이 없는 편이다.


 올해는 꼭 야외 상영을 보리라는 결심이 있었다. 별빛 영화제라는 이름이 알려주듯이 그야말로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에 영화를 본다는 로망이 나의 감성을 강하게 자극한다. 마침 회사를 그만둔 백수이기도 하고, 정말 영화나 실컷 보자는 마음으로 영화관을 매일같이 다니고 있는 와중이었다. <초록밤>이라는 독립 영화가 야외상영과 GV를 진행한다는 것을 듣고, 너무도 마음에 들어 바로 예매했다. 예매 오픈 시간보다 늦었지만 독립영화고 다소 무거운 주제처럼 보여서인지 쉽게 예매에 성공할 수 있었다.


 에무시네마에는 북카페가 마련되어 있다. 나는 영화 시간에 딱 맞춰 가기보다는 거기에 먼저 가서 음료를 한잔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카페에 앉아 책을 읽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글을 쓰며 영화를 기다리는 그 시간은 마치 연인과의 데이트를 기다리는 심정과도 같은 설렘이 있다. 마침 야외상영회가 아닌가! 정말 오늘은 특별한 추억이 깃드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티켓을 발권하면서 증정 포스터를 받고 내려오다 북카페 입구에서 그녀와 마주쳤다. 언뜻 평범한 작은 체격과 달리 비범한 몸의 문신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저 사람도 같은 영화를 보러 온 걸까' 생각하며 좁은 문을 열어주었다. 때론 그런 호기심 같은 직감이 들어맞을 때가 있다. 영화 시작에 맞춰 옥상에 입장하며 자리에 착석하는데, 마침 아까 마주쳤던 그녀가 옆자리에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대화할 것도 아닌데, 오늘 운이 좋은 것 같다 따위의 생각을 하며 앉았다.


 윤서진 감독의 <초록 밤>은 그리 낭만적이거나 유쾌한 영화는 아니었다. 무겁고 힘겨웠으며 아련했다. 초록이 주는 싱그러움보다는 초록밤이 주는 적막함과 녹진함이 정서적으로 깊은 울림을 주는 영화였다. (꼭 사운드에 신경 쓰며 볼 것을 추천한다.) 한참을 집중하며 보다가 영화 막바지에 들어섰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비가 많이 오진 않았지만 비를 맞는다는 것 자체는 썩 좋은 일은 아니었으리라. 정말 대단한 것은 관객 어느 한 명도 이탈하지 않고 사전에 에무시네마에서 준 우비를 꺼내 입고 영화를 놓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것보다 더 대단한 것은, 내 옆자리 앉은 그녀는 우비조차 꺼내지 않은 채 영화에 빠져있었다.

 

 보통은 영화를 볼 때 옆을 잘 쳐다보지 않는다. 영화관이라는 공간은 소통의 장이 아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보면서 때로는 함께 웃거나 탄식을 하지만 그것을 소통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때문에 옆을 쳐다보며 얘기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정신없이 영화를 보며 그럴만한 여유를 느껴본 적도 없고, 사실 거의 혼자서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옆자리에 아무도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녀에겐 눈길을 가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 GV 행사를 진행하면서도 눈길이 갔지만 장소를 옮기며 꽤나 멀리 떨어진 좌석 탓에 무언가 얘기를 해볼 기회가 없겠다고 생각한 나는, 조금은 미묘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감독님과 배우분들의 말들을 귀담아 들었다. 내가 했던 질문이 채택되고 그것에 답해주는 그런 시간이 참 즐겁게 느껴졌다. 이 과정에선 영화가 하나의 독자적 텍스트로서 확장되어 나가는 기분이 든다.


 GV 행사가 끝났을 때도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챙겨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에무를 나선다. 비가 내리는 여름밤. 습하고 끈적이는 날씨지만 경희궁 자락에 위치한 언덕을 내려가는 길은 어딘가 산뜻한 기분이 든다. 영화를 생각하며 영화관 밖을 나서려고 할 때, 우산 없이 서 있는 그녀가 눈에 밟힌다. 우산이 없는 것일까. 비가 꽤 오는데, 괜찮을까, 누군가 마중 나오는 사람이 있는 걸까.


 생각이 많은 것은 나의 버릇이고 행동에 신중을 기하여 행동할 나이가 되어가면서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은 더더욱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를 이기는 나의 호기심은 충분히 행동할 여지를 준다.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우산 없으신 거 같은데, 가까운 버스정류장까지 같이 가실래요?


 영화 <클래식>의 조승우, <늑대의 유혹>의 강동원이 아니어서 정말 죄송한 마음뿐이지만(지금 그들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녀는 상당히 밝은 얼굴로 고맙다며 같이 쓰고 가자고 했다.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니 굉장히 순수한 사람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잘 웃고 밝은 에너지가 있는 사람. 가까이서 보니 꽤나 어려 보였고,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 사람 같았다. 문신을 보고 지레 겁먹고(?) 긴장했던 것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얘기를 나누면서 중요한 것이라면 중요한 것, 그러니까 이름이나 나이 전공하는 일 같은 걸 전혀 묻지 않고 영화 얘기만 잔뜩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굉장히 새로운 느낌이었다. 마치 <어바웃 타임>의 블라인드 카페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영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참 재밌는 일이었다. 밤과 영화와 비, 언덕길의 그리 밝지 않은 가로등.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길이 평소에는 조금 멀었는데 오늘만큼은 너무 가까운 기분이다.


 여기까지 읽으면 기대할 법한 로맨스는 없다. 그저 버스를 타고 우리는 헤어졌고, 못다 한 말들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또 한 번의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에무시네마에서 다시 우연히 만나 또 한 번 영화 이야기와 여러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으면 하고 바란다. 영화관은, 우연을 초대하는 영화 같은 공간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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