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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원재 Sep 05. 2022

극장이라는 공간

영화와 관객의 만남 

오! 재미동의 상영관. 25석의 작은 상영관이다.

 충무로 역사 내에 위치한 오!재미동은 영상센터와 공간 대여, DVD 대여, 극장 등 여러 가지 시설이 구비된 영상자료센터이다. DVD를 보거나 구비된 책을 읽는 모든 게 무료이고 극장 상영도 신청시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상영관을 대관할 수도 있는데, 3시간에 8만원 정도라면 극장을 대관하여 영화를 볼 수 있다. 영화 동아리 활동을 한다면 이용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영화를 촬영하는 사람들이라면 영화 장비를 대여할 수도 있고 포스트프로덕션 작업을 할 공간도 마련되어 있는 듯하다. 그야말로 영화 놀이터 같은 곳이다.


 현재 이곳에서 하는 여러 프로그램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단편영화 개봉 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이 신설된 듯하다.  나는 8월 초 단편영화 마티네를 보고, 이번이 두 번째 참여다. 이번에는 관객과의 대화(GV)까지 마련된 꽤나 큰 행사로 개최되었다.


 사실 이곳 오! 재미 동의 극장은 사실 소규모 강당을 개조한 수준이고 스크린의 크기, 음향의 수준은 화를 위한 것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다. 좌석의 편안함도 만족하기 어렵다. 게다가 밑에는 지하철이 지나가고 있어, 방진 방음 작업을 해놨음에도 작은 진동과 소리가 이따금 들리는 것엔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단편 영화를 극장에서 만날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를 먼저 얘기할 필요가 있다. 단편은 분명 장편이 끌고 갈 수 있는 매력과 다른, 소소하고 정제되지 않은 원석 같은 매력이 있다. 감독 개인에게도 단편은 장편으로 넘어가는 단계 혹은 재치 있는 아이디어를 짧게 응축하여 전달할 수 있는 형식일 것이다.


 영화의 법적인 정의가 무얼까? 영화 및 비디오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1장 2조 (정의) 1항에서 “영화”라 함은 연속적인 영상이 필름 또는 디스크 등의 디지털 매체에 담긴 저작물로서 영화상영관 등의 장소 또는 시설에서 공중(公衆)에게 관람하게 할 목적으로 제작한 것을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는 몇 가지 단서를 제공한다. 영화는 사람들에게 '관람되는' 것이여, 영화상영관이라는 장소에서 상영되는 매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이 생긴다. 영화관에서 상영되지 못하는 영화는 영화가 될 수 없는 것인가? 나는 이 입장을 기어코 옹호하고 싶다. 요즘의 영화관들에게  책임을 씌우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 영화관은 영화와 관객을 만나게 해 줄 '법적인' 책임이 있다.


 OTT가 범람하는 시대에, 미국에선 심지어 유료 채널을 끊고 OTT를 구독하는 사람이 크게 늘고 있다는데, 시대에 뒤떨어진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을 던질 수도 있다. 하지만 법적으로 그렇다는데, 어쩌겠느냐 하며 반박하고 싶다.


 이 전제를 인정하고 난다면 몇 가지 문제에 봉착한다. 관객과 만날 수 없는 영화들, 유명하지 않거나 주류 영화계에 들어가지 못한 감독의 영화들은 영화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이 영화가 되기 위해선 극장이 필요하다. 영화와 관객이 만나야지만 비로소 영화가 된다.


 물론 물리적으로 영화관은 모든 영화를 상영할 수 없다. 게다가 극장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고,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재미있는 영화를 위주로 상영해야 한다. 당연하지만 관객 또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영화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소수자를 배려하는 사회로 가면서도, 돈이 아닌 것은 배척당하는 자본적 정신이라는 것은 굉장히 모호한 것이다. 최근에는 이데올로기적인 속성으로 다양성이 주목을 받지만 정작 관객은 <탑건>을 원하고 있다. 관객들은 더욱더 보수적으로 작품을 선택하려고 한다. 재미가 보장되지 않으면 보려고 하지 않는다. 티켓값이 15,000원, IMAX 등 특수 상영관으로 가면 20,000원이 훌쩍 넘어가기 시작한다. 분명 꽤나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잘만 할인받으면 얼마 차이 나지 않는 금액으로 롯데월드를 갈 수도 있다.) 게다가 쇼츠가 범람하는 시대에 상업영화는 120분을 훌쩍 넘어가기 때문에, 대부분의 관객의 영상 소비 패턴과 영화는 더욱 어긋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영화가 될 수 없는 영화들은 늘어날 것이다. 극장은 돈 안 되는 영화들을 상영할 의무가 없다. 스크린쿼터제는 여름, 겨울, 명절 시즌을 노린 빅 버짓(big budget) 한국 영화만 상영해도 충분하다. 그러다가 반짝 흥행을 하는 복병만 노려도 될 것이다.


 독립예술영화(다양성 영화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현재는 독립예술영화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를 상영하는 관은 줄어들고 그런 영화의 수요는 특수한 층에서만 유지될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나는 영화관이 영화를 지켜나갈 수 있는 권력, 의무를 지적하고 싶다. 위에 법률에 의거해 영화는 영화상영관에서만 영화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영화관은 영화를 지켜나가야 할 법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다. 영화를 지킬 수 있는 것은 극장이다.


 단편영화는 장편에 비해 더욱 관객과 멀리 존재한다. 영화제가 아니면 특별히 상영하는 곳도 마땅치 않다. 이런 영화들과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길 바란다. '단편소설집'같은 형태로 여러 영화를 묶어 하나의 영화로 상영할 수 있는 방식도 가능할 것이다.(얼마전 개봉했던 '우스운 게 딱 좋아'같은 영화가 이런 방식이었다.)


 물론 영화관이 모든 책임을 독박쓴 채 잔다르크 형의 영웅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객이 찾지도 않는(정확하게는 있는 줄도 모르는) 영화를 손해를 감수하며 틀어줘야 하는 것이 아니니까. 오!재미동이 이런 단편 영화 상영회가 가능한 이유는 서울영상위원회가 위탁 운영하는 서울시의 센터이고, 공공적 성격을 띤 곳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리 목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아니고 영화인의 지원을 위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프랜차이즈 영화관 및 독립예술영화관의 운영과는 결이 다르다. 


 결론적으로 영화관의 가장 주요 본질은 관객-영화의 만남을 이루는 장소라는 것이다. 영화와 관객이 만나기 위한 지난한 과정들을 견디고서 정말 끝에서 만나는 영화관이라는 공간은 열린 창으로써 더욱 다양한 작품-관객의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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