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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Dec 09. 2022

그렇게 한달살이 여행

  


2019년 12월 처음으로 긴 여행을 시도해 보았다. 해마다 주어지는 두 달의 방학 중 6월과 7월에 걸친 기간엔 한국을 방문하여 여행 아닌 여행을 하고 12월부터 1월까지의 기간엔 짧은 여행이나 자카르타에 머물렀는데, 아이의 방학과 나의 방학이 엇갈린 탓이었다. 아이가 한국에 있는 대학에 입학해 돌아간 뒤 12월은 온전히 나의 시간이 되었고 그렇게 한 달 살이 여행이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에어비엔비를 이용하고, 현지인들의 집에서 느긋한 하루를 시작했다. 여행하는 지역의 아침과 저녁의 모습을 호기심과 여유를 지닌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보았고 지친 일정을 견디며 다음 일정을 위해 힘에 부친 하루를 시작하지 않았다. 그런 여행을 하고 보니 지난 여행의 분주함과 조바심이 얼마나 고단한 것이었는지, 그래서 즐기기보단 쉼 없이 주어 담기 바빴다는 것이 새삼 잘 보였다. 특별한 이벤트 없이 종일 거리를 배회하기도 하고 숙소 앞 카페에서 책도 보고 도서관에 가서 느긋하게 책 구경도 했다. 어쩌면 긴 여정이 빌미가 되어 더 많은 곳을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그 여행이 좋았다. 지역의 슈퍼에서 장을 보고 가까운 공원에서 산책을 하며 여행자의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여행지의 시간과 공간을 음미하는 것. 긴 여행이란 그런 여유를 선물하고 있었다. “그래! 12월은 온전히 나를 위한 긴 여행을 하자”라고 결심했다. 교사라는 직업이 주는 최대의 수혜를 놓칠 수 없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한달살이를 꿈꾸는 사람이 되었다.

Australia

 나름의 야심 찬 계획이 있었다. 호주를 시작으로 2020년에는 나의 그리운 벗이 있는 뉴욕에서 한 달을 지내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반전은 늘 계획 따위는 가볍게 비웃는 법. 코로나로 인한 펜데믹은 나의 굳은 의지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란 걸 깨닫게 했고, 그렇게 한달살이 여행은 무기한 연기. 2020과 2021년을 거치는 두 해 동안 나는 한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계속된 온라인 수업과 자카르타의 불안한 의료체계를 핑계 삼아 한국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겨울엔 보일러로 난방이 된 뜨끈한 마룻바닥에 누워 엄마 밥을 축내며 책을 읽고 친구들을 만났다. 자카르타와 한국을 오가는 텅 빈 비행기를 타고 왠지 나는 조금도 힘들지 않던 자가격리도 네 번이나 했다. 그 누구도 쉽게 하늘길에 오르지 못했던 시간에도 나는 꼬박꼬박 비행기를 탔으니 감사하고 미안하다. 모두가 여행을 목말라하는 시기에도 나는 나름의 여행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감사는 잠시의 감사일뿐, 나에게 주어진 12월의 시간이 내내 아쉬워 조바심이 났고 자카르타에 사는 나에겐 국내여행이라 할 수 있는  '발리 한달살이'를 감행했다. 2021년 12월은 아직 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시기였고 유명세에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발리에도 관광객은 소수였다. 발리에서 붙박이로 살고 있는 서양인들과 나와 같은 인도네시아 거주 외국인들이나 인도네시아 현지 관광객이 대부분인 2021 12월의 발리. 그 12월의 한 달을 나는 발리에서 보냈다. 인도네시아에서 거주하면서 수도 없이 방문한 발리였지만 한달살이를 하는 동안 보는 발리는 또 다른 곳이었다. 원래도 가장 좋아하는 휴양지였지만 한달살이 동안 더 좋아진 발리. 보아도 보아도 볼 것이 줄어들지 않는 그 섬에서의 한 달은 쉼이었고 행복이었다.


Bali  Island


그리고 거의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치앙마이로 가려고 한다. 꽤 많은 사람들이 한달살이를 꿈꾸는 도시로 ……. 예전 같지 않은 체력과 시력 탓에 비행기 티켓팅도 숙소 예약도 버겁고 귀찮았지만 큰 산을 넘고 나니 설렘이 꾸역꾸역 올라온다.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그곳에서는 또 다른 시간과 공간을 경험할 것이다. 하루에 서너 번씩 치앙마이 맛집과 관광지를 찾아보면서 나는 또 그렇게 새로운 도시에서의 한달살이를 꿈꾸고 있다. 여행의 실체는  사실  너무 많은 변수들에 당황하고 낯설어서 지치고, 일정에 차질이 빚어져  짜증이 나고, 언어 장벽의 긴장에 신경이 곤두서는 일들의 연속이다. 여행지에서의 행복은 그야말로  찰나이다. 그래도 여행을 떠나는 건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매력을 포기할 수 없을뿐더러 그 찰나의 행복이 한 달을 아니 일 년을 풍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한달살이는 계속될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새 여권 들고 치앙마이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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