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머니, 여기 고시원은 월세가 얼마예요?”
나는 상경을 꿈꿨다. 돌곶이역 근처 위치한 정형외과 면접에 합격했고, 10월경 첫 출근을 할 예정이었다. 졸업 후 첫 독립을 하게 부모님의 지원을 받기보다는 정말 맨땅의 헤딩으로 홀로서기를 택했다. 그 이유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앤 헤서웨이가 유명 패션회사에 입사하고 저널리스트로서 성장하고 화려한 세계에서 일하는 모습이 섹시하고 멋있어 보였다. 도시에서 폭 넓은 경험해보고 싶었던 나는 보증금 없는 창문 없는 고시원 생활을 시작됐다.
월세 28만 원짜리 창문 없는 고시원의 생활은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기분이었다. 노란색 벽지와, 누레진 바닥, 오래된 tv , 비좁은 싱글침대 하나, 성인 한 명이 통과할만한 좁은 통로에 한열로 따닥따닥 붙어있는 고동색 문짝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잠이 들려고 할 때면 방음이 되지 않아 온갖 소음들이 내 귀를 쏘아댔다.
특히 고시원 공용세탁기 문화는 찝찝함과 동시에 아찔 그 자체였다. 파김치가 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면 땀에 젖은 66 사이즈 연두색 유니폼과 각종 빨랫감들을 넣었다. 지금은 코인빨래방의 탄생으로 건조는 물론이요, 카톡 알림까지 편리함의 노예가 되어버렸지만 그땐 아니었다. 가끔 다른 사람 빨래가 있나 싶나 확인차 세탁기 뚜껑을 열어젖혔을 때 이름 모를 남자 사각팬티를 내 눈을 기습할 때면 종종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순조롭지 않았던 좁은 5평 방 한 칸의 생활은 내 마음을 서서히 우울함으로 적셔갔다. 바깥 풍경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고. 시곗바늘이 새벽 4시를 가리켜도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외로움에 굴복당한 기분. 창문이 없으니 서늘한 가을 바람조차 느낄 수 없어 갑갑해서 숨이 막혔다. 가족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아빠가 낚시해서 잡은 간장소스에 스며든 볼래기생선과 오동통한 계란찜이 나란히 놓인 엄마가 차려준 밥상도 생각났다.
멍한 눈을 끔뻑. 끔뻑
가족들과 집밥을 생각하니 눈물이 차올랐다. 독립한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예상치도 못한 향수병을 톡톡히 겪었다. 큰소리 떵떵거리면서 서울에 올라왔건만 기대했던 서울라이프는 녹록지 않았다. 많은 날 밤을 지새웠고, 다크서클과 함께 늘 같은 표정으로 출근길을 나섰다.
시골에서 올라온 어린애가 다 죽어가는 눈빛으로 세상근심 떠안은 표정으로 치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니 선생님들이 무슨 일이 있냐며 말을 걸었다
“같이 얹혀살고 있는 친구랑 싸워서 집 나가고 싶어요”
가난해 보일까 봐, 창피한 마음에 그 시절 선생님들께 거짓말을 했다. 당시 같이 일하는 직장동료 선생님들은 내가 창문 없는 고시원에 살고 있는 것을 몰랐다. 결국 선임인 10년 차 물리치료사 선생님이 직장 근처 좋은 컨디션을 갖춘 어느 고시원을 전화로 찾아봐주셨고, 그날부로 답답한 고시원을 도망치듯 나와버렸다.
혼자서 꿋꿋하게 버틸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상경한지 한달만에 산산조각 났다.
<창문 트라우마> 이후 나는 이사를 거듭 반복했고, 코딱지 만한 월급으로 생계를 책임지며 돈을 꾸준히 모았다. 9년이 지난 신축 오피스텔에는 큼지막한 창문에 맞춤제작한 하얀색 시폰 커튼이 찰랑거린다. 이젠 고시원에 살았던 내가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