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대신, 결혼 대신 밴 라이프를 선택한 이유
런던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손님으로만 가던 민박집에서 짐을 풀자마자 일을 배우기 시작했고, 적응한 뒤로는 한국에서 그리기만 하던 나날들이 실제 내 삶으로 펼쳐졌다. 매일 밤 여행의 흥에 취한 사람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지새웠고, 사람들과 주고받는 에너지를 통해 민박집 일이 나에게 천직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됐을 정도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한 달을 보내고 나니 익숙해짐과 동시에 불안감이 찾아왔다. '나 정말 이렇게 지내도 되는 걸까?'라는 물음 속에서 흔들리는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살아보자는 다짐을 수 없이 했지만 20년 넘게 바삐 살아가는 것에 훈련된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새로운 목표와 동기부여가 필요한 시점이 온 것이다.
혼자 있게 될 때마다 책상에 앉아 스스로에게 '진짜 원하는 삶'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시작했다. 답답한 날엔 카페에 가서 고민스러운 생각들로 다이어리를 가득 채웠고, 모두가 잠든 새벽엔 노트북에 글을 적어가며 생각하고 또 고민했다. 앞으로의 삶은 스스로 찾아낸 조각들로 이어가고 싶었기에 정말 간절했고 그만큼 혼란스럽기도 했다.
어느 정도 답이 나오는 것 같으면 다시 한번 질문을 더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구체화시켜나갔다. 한 달 넘게 이런 시간을 갖다 보니 결론보다 확실히 알게 된 것이 있었는데, 내가 원하는 삶의 목표엔 절대 '결혼'과 '취업'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한국에선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아무튼 사춘기 시절 했을법한 생각의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27년 동안 알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던 '밴 라이프(Van Life)'가 되었다.
내가 찾아낸 '원하는 삶'은 이러했기 때문이다.
- 광활한 자연 속에서 가만히 존재하기.
-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보고, 잠들기 전엔 하염없이 달과 별을 보기.
- 하나님이 만든 멋진 세상을 최대한 많이 누벼보기.
-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다양한 경험하기.
- 정말 내 기준대로 나다운 삶을 살기.
-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 살기.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고 정리했지만 다시 한번 쭉 훑고 나니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현실감 없고 추상적인 목표를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겠으며, 내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 알아버렸는데 현실적인 이유로 저버린다면 절망은 배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캠퍼밴(Camper Van)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캠퍼밴으로 여행하며 일상을 보내는 '밴 라이프'는 화물용 밴을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개조한 뒤, 그 차를 타고 다니며 가고 싶은 곳을 마음껏 다니고, 머무는 곳이 집이 되는 또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하지만 인스타그램에 'vanlife' 해쉬태그만 검색해도 엄청난 인테리어와 기술로 자신만의 캠퍼밴을 가지고 여행과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이런 방식으로 산다면 꿈만 같은 리스트가 현실이 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도 될 것 같았다.
'나'라는 사람은 취업을 위해 내가 가진 체력과 열정을 쏟아붓고 싶지 않았고, 결혼을 위해 여행 갈 돈을 저축하고 싶지 않았다. 주어진 인생을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만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에서 답이 나왔고 용기가 생겼다. 해외에 고작 3개월 나와있었다고 생각이 트인 것인지, 원래 내가 이런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민할 시간에 [실천]하고 [경험]한 뒤 [선택]하자는 생각이 들었고, 나에게 밴 라이프를 알려준 오빠와 함께 각자의 삶을 위한 긴 여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내 통장에 있던 돈은 50만 원도 채 되지 않았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또 한 가지에 꽂히면 다른 건 보지 않는 성격도 한몫했다. 그 당시의 나는 내 앞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보다, 나를 위한 선택을 했다는 것이 중요했을 정도로 27년의 세월 중 삶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가장 많이 넘쳐나는 시간이었다.
평소에 호들갑 잘 떠는 내가 생각보다 꽤 잔잔하게 무언가를 시작했다.
2018년 3월 28일 민박집을 나왔고, 다음날 29일. 런던의 한 주자창에서 밴 라이프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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