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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Dec 31. 2021

피로사회, 그리고 OKR

2022년을 준비하며...

 사내 인사와 조직 개편, 코로나의 확산세, 그리고 연이은 숙취로 피로가 마를날 없는 연말이다. 인적없는 사내 도서관을 둘러보다 무심하게 꽂혀있는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읽게 되었다.


 책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이제서야 이 책이 눈에 들어온건, 당시에는 그다지 피로하지 않았다는것이 그나마 적합한 사유이겠다. 2014년. 치열한 생존 경쟁과 타인의 간섭으로 가득찬 사회를 벗어나 힐링과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던 때였다. 그에 나의 삶은 다소 무던했다. 숫자를 중시하던 당시 정부 정책으로 취업의 바늘 구멍이 바인딩 구멍 정도로 늘어난 덕에 어찌저찌 일자리를 얻고, 몸도 마음도 안정을 찾아가던 3년차. 그맘때면 한번씩 찾아온다는 매너리즘도 잊게해준 오래간만의 로맨스. 당시의 나는 그다지 피로를 느낄만한 일도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또 3년이 지나고 또 한바퀴 돌아, 2021년. 신년도 런칭하는 신제품 프로젝트도, 30대 중반이 오기 전 해내고 싶었던 내집 마련도, 인생의 중대사인 결혼도 제대로 준비하고 있지 못하는 나는 이제서야 허덕이며 피로를 느끼고 있다. 올해도 또 이렇게 지나가고, 내년에는 되려나. 올해는 코로나 팬데믹 핑계로 어찌저찌 넘어갔는데, 내년에는 어떻게 될런지.  연초 성과 인센티브가 잘 나오면 좀 잘 풀릴수 있으려나. 적어도 자꾸만 배터리가 나가는 이 고물차라도 내년엔 바꿔야 할텐데. 답도 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아침에 먹은 김밥이 얹히는 것 같다. 속이 답답하고 어깨도 무겁다. 아... 갑자기 그리운 그 곳, 인도로 돌아가고 싶다.


2019년, 인도 다람살라




  "트렌드 코리아 2022(미래의 창 펴냄)"에 따르면, 차년도 트렌드 중 하나는 "바른생활 루틴이"라고 한다. 그들은 자기 관리에 철저한 신인류로, 스스로 바른 생활을 추구하며 루틴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근로 시간의 축소와 코로나로 인한 재택근무의 확대로 생활과 업무의 자유도가 높아지며 오히려 자기 관리에 대한 욕구가 커졌고, 스스로를 통제해 생산성을 높이고자 하는이들 늘고 있다고 한다.


2022년 트렌드 코리아의 주요 키워드인 바른생활 루틴이(출처 - mk.co.kr/today-paper/view/2021/4981484/)
바른생활 루틴이들이 자기관리 셀프바인딩을 위해 사용하는 대표 서비스 "열품타(열정 품은 타이머)"  


 흥미로운 점은 젊은 인재들의 눈치를 보는 국내 기업들 또한 "바른생활 루틴이"들의 니즈를 조직 및 인사관리에도 적용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기업들은 개인의 성과를 평가하는 지표로써 기존에 고수해오던 KPI(Key Performance Index, 핵심 성과 지표 관리)대신 OKR (Objective and Key Results, 목표 및 핵심 결과 관리)를 도입하고 있다.


 OKR이란 인텔과 구글을 선두주자로 실리콘밸리 대부분의 기업들이 선택하고 있는 성과관리의 기법이다. OKR의 가장 큰 장점은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핵심 "결과"들을 정의하고 추적하는 framework라는 점이다.  회사가 정한 "목표의 방향성"에 최대한 도달하기 위한 "방법"과 필요 "행위"을 파악한다는 점에서, KPI 일정 기간 달성해야할 성과 "지표"위주로 관리하는데 비해 훨씬 도전 목표 및 행동 지향적이다. 특히 회사의 목표에 따라 부서와 개별 직원간 협의하에 스스로 자신의 목표를 설정할수 있기에, 요즘 "바른생활 루틴이"들의 입맛에 맞는 자발적인 목표 설정/관리 또한 수월해진다.


 또한, OKR의 경우 기존에 활용되던 KPI기반의 MBO(Management by Objectives) 방식과 달리 일정 관리가 유동적이다. 즉, MBO의 목표가 "연간 지표 달성"으로 설정 된다면, OKR에서의 목표와 성과 달성은 "단기적"이며 "무한적"이다. 내가 설정한 단기의 목표에 대해 성과를 낸다면, 그와 연동되어 있는 다른 성과를 달성하기 위한 미션에 바로 착수가능하다는 점에서 요즘 트렌드에 맞게 Agile하면서도 Progressive 하다. 성과 달성 목표 수준에 있어서도 반드시 100%를 달성할 필요도 없다. 기간 내 실현해야 할 목표의 100% 달성을 기조로 하던 KPI와는 달리, OKR은 도전적 목표(Stretch goal)를 세우고 그의 60~80% 측정 성과만 달성해도 되도록 설정된다. 물론 그 취지는 도전 목표의 100% 달성에 대한 열린 가능성과, 보장된 최소한의 60~80% 목표치에 대한 자기 자책적인 달성이겠지만. 제도 자체는 얼마나 유동적이고 자율적인가.


KPI와 OKR의 차이 (출처 - https://www.whatmatters.com/resources/difference-between-okr-kpi)


 한편 한병철의 피로사회에서는 현 시대를 "성과 사회"로 규정한다. 오랜 시간 개인은 타인에 의한 지시, 금지, 처벌의 지배를 받는 "규율 사회"에서 살아왔다. 규율 사회는 "~해서는 안된다"가 지배적인 조동사로, 즉 금지의 부정성으로 규정되는 사회이다. 21세기가 되면서 이런 규율 사회는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시대의 조동사는 무한정한 긍정의 "할 수 있음"이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과거 규율 사회에서 지배 시대의 규율은 생산성을 최대화하는데 한계가 있지만, 현대 성과 사회에서 성과의 패러다임에는 한계가 없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의 생산 관계는 완결을 가로막고 있다. 사람들은 열려있는 방향으로 일을 해 나간다. 시작과 끝이 있는 완결의 형식은 사라져버렸다. 최대 성과를 산출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 이 사회의 발전 경향에는 제동을 걸 방법이 없다.


 성과 사회의 주인 또한 더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 주체"로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성과 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로부터 자유롭다.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 점에서 성과 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그러나 지배 기구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활동 사회라고도 할 수 있는 성과 사회는 서서히 도핑사회로 발전해간다. 그 와중에 "브레인 도핑"처럼 부정적인 표현은 "신경 향상"으로 대체된다. 도핑은 말하자면 성능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언젠가부터 자기 관리와 끝없는 성과 추구는 의심할 여지 없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팬데믹 이후 더욱 급변하는 사회적 기류와 예측 불확실성의 강화로 인해, 성과 관리에 있어 소위 "물 들어올때 열심히 노젓자"는 신속하고 유동적인 대응의 중요성은 높아지고 있으며, OKR의 framework은 그것을 정당화하고 가속화한다. 그 frame속의 개인은 무언가를 달성하고 나면 더 높은 퀘스트를 수락한다. 도전적인 목표를 모두 달성할 필요는 없지만, 미달성의 자책과 도태의 늪을 벗어나기 위해 그것은 자발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비즈니스의 "무한 성장궤도"속에 놓인 개인은 마치 게임처럼 끊임없이 목표 달성과 보상에 중독된다. 이 게임 안에서의 이탈은 자유이지만, 오히려 쉬지 않고 정진하는 플레이 속에서 우리가 "살아있고" "발전하다고" 있다고 느낄 뿐. 게임의 알고리즘에 대해 생각할 여유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한 투입 시간으로 대체되곤 한다.



피로사회 (한병철 저, 문학과 지성사 펴냄)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바른생활 루틴이들은 자기만의 의미 있는 일상을 설계하고 정해진 생활 루틴에 따르며 자기 관리에 철저하나, 치열한 경쟁사회가 요구하는 자기 개발이 아닌 힐링을 도모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미세 행복을 추구하는 특성을 보인다고 한다. 미디어에서 말하는 소위 M세대 사람이라 그런지, 대부분 Z세대일 루틴이들의 "힐링"과 "미세 행복"이 무엇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바른생활 루틴이들은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고 하니, 그들의 힐링과 미세 행복은 2014년의 젊은이들이 말하던 "미움받을 용기" 갖기, 이불속에서 귤 까먹는 것과 같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찾기는 아니겠지. 한 해를 마무리하고 신년을 계획하는 요즘. 바른생활 루틴이들도, 그리고 나 또한 우리에게 진실로 "바른 생활"이란 무엇인지, 나의 "루틴"은 누구와 무엇을 위해 필요한 것인지 고민하는 시간을 갖기를, 그리하여 다가오는 신년에는 새로운 시각과 마음가짐을 가진 바른생활 루틴이 v2.0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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