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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Dec 07. 2020

동유럽의 교통, 호텔 그리고 정치

국민소득 6천 불 때 네덜란드 주재원



내가 근무하던 90년대 초에 이미 서유럽 도시 간 교통은 큰 불편이 없었다. 독일, 프랑스 같은 주변 나라는 자동차 타고 다녔는데 독일 고속도로 아우토반은 속도제한이 없어 차가 안 밀리고 부분 제한이 없는 데서는 시속 250 kM 이상까지도 밟는다. 그런데 제한 구역이 많다. 예를 들면 bei Nässe 표시가 있으면 비올 때만 감속하라는 말인데 나는 처음 1년 동안은 이걸 모르고 이 표지판만 나오면 속도를 급히 1/3로 감속하면서 그냥 달리는 차들을 향해 욕을 했다.


독일 고속도로에서는 추월 시 차선 규정을 철저히 지킨다. 추월 차선이나 상위 차선에서만 추월해야 되는데 안 비켜준다고 왼쪽 상위 차선에 있는 차를 앞지르는 건 위험한 반칙이다. 그래서 추월선에서 앞 차가 느리게 가면, 뒤에 따라붙으며 오른쪽으로 양보하라고 다그친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뒤에 바짝 따라오는 차들을 골탕 먹인다고 운전석에 브레이크 등燈 스위치를 불법으로 달고 조작해서 뒤에 따라붙는 차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서유럽에선 항공망도 촘촘한데 중소 도시 간에는 소형 비행기도 더러 다녔다. 수요와 활주로 사정에 맞추느라고 그런다고 들었다. 사람들은 버스가 활주로에 내려놓을 때 비로소 타고 갈 비행기가 장난감 같은 20 인승 정도 프로펠러 기라는 걸 알고 얼굴이 굳어진다. 하지만 그 얼굴은 좀 있다 기내에서 조종사가 도시락을 나누어 주면서 조금 풀어진다. 그리고 내릴 때 돼서 다시 조종사가 뒤를 돌아보면서 조금 연착은 하지만 환승하는 승객들이 갈아탈 비행기들은 전화로 다 붙잡아 놓았으니 걱정 말라고 하면 엄지 척과 함께 미소로 바뀐다.


당시 동유럽 국가의 시장 수요가 늘고 거기다 호기심 관광객들까지 가세하면서 동유럽에 들어가는 항공편도 늘어났다. 그렇지만 동유럽 나라들 사이에는 아직도 비행기가 뜸했다. 예를 들어 프라하에서 바르샤바로 이동하려면 직항이 없어 프랑크푸르트나 비엔나로 나와서 갈아타야 했다. 그래서 일정이 안 맞으면 기차를 타고도 이동했다.


어느 날 부다페스트행 열차에 앉아 있는데 옆자리에 배낭여행 중인 일본 처자가 탔다. 내가 들고 있던 지도를 보고 말을 걸어와서 알았다. 그러자 앞에 마주 보고 앉아있던 40대가 끼어들었다. 스웨덴에서 왔다는 덩치가 갑자기 내게 한국에선 아직도 개를 먹냐고 물어본다. '이 사람아 왜 거기서 개가 나와?!' 하고 반박했어야 하는데 그냥 얼버무리고 말았다. 막상 그 장면에 들어갈 대사가 두 시간쯤 있다 생각 나는 게 나의 문제다. 나중에 돌아와서 고작 주차장에 있는 (영업이사가 타고 다니던) 사브 회사 차를 발로 차는 걸로 대신했다, 그것도 타이어만. (Saab AB : 스웨덴 비행기 회사, 자동차도 만듦)





모스크바 대학교


호텔


동구라파 지역의 숙박시설은 양적 질적으로 부족하고 불편했다. 그래도 장안의 고급 식당이나 술집은 호텔 안에 있었다. 그 시절 호텔은 주요 외화벌이 수단이었으므로 대부분 국가에서 운영했다. 외형은 공산국가 특유의 위압적인 스탈린식 고층 건물인데 안에 들어가면 미로식 구조에 빈 구석이 많았다. 공산당은 건물조차 인민을 기죽이는 형태로 지어 놓았지만 내용은 비효율적이었다. 사무실 건물도 마찬가지로 감시하기 좋게 폐쇄적이고, 공장에 가보면 둘 중의 하나 - 텅 비어 있거나 비닐도 벗기지도 않은 서독제 기계들로 가득 차있었다.


미국 부자 회사들은 사무실을 호텔 안에 차리기도 하고 아예 방을 장기로 (= 캠핑으로 치면 장박) 여러 개씩 잡아놓고 왔다 갔다 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공급이 달리니까 호텔 숙박료를 이상하게 매겼다. 이중 가격으로 외국인에게는 바가지요금, 그것도 달러로만 받는 깡패 같은 가격이다. 호텔에 체크인하면 으레 카운터에서 여권을 달라고 해서 보관했다. 아침에 급히 체크아웃하고 공항 가다 돌아온 적도 몇 번 된다. 그제야 여권을 돌려주면서도 미안하다 소리도 안 한다. 숙박객 감시하던 버릇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정치체제가 바뀌어도 사회가 변화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전시회


개발 도상국의 전시회는 EXPO란 이름의 종합박람회든 산업별 전시회든 역동적이다. 엄청난 사람이 몰렸다. 폴란드나 헝가리 전시회는 아침부터 장사진을 치는데 표를 사는 인 지 들어가는 줄인 지 분간도 안되고 나는 거기 서있을 시간도 없었다.


줄 서기는 정치이자 경제다. 질서이면서 다른 한 면은 배급이다. 배급제로 주민을 통제하는 공산권 국가에서 줄 서기는 일상이다. 마스크를 배급받기 위해 약국 앞에 서는 줄과, 군산 이성당 빵집 앞에서 서는 줄의 성격은 다르다. 양쪽 다 시간까지 정해놓고 구매 수량도 제한한다. 하지만 생필품 (= 생명 필수품 )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사람들과, 안 먹어도 그만인 단팥빵을 사려고 줄 선 사람들의 표정은 많이 다르다.


그럴 땐 전시장의 '관계자' 출입용 좁은 쪽문을 찾아서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드나드는 사람처럼) 일단 막무가내로 시도한다. 문지기가 폴란드 말로 '쯩' 같은 거 보여달라고 잡을 땐, ( 당신 시방 실수하고 있는 거라는 얼굴로 ) 한 15초 정도 일방적으로 떠들면 통과다. 실패한 적이 없다. 러시아어 말고 외국어 하는 사람이 드물고 영어가 개방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사회 정서를 악용한 나의 방자한 행위였다. 미리 부탁하면 업계 관련 인사에게 주는 초대권을 받아서 줄 안 서고 입장할 수 있었다. 서양 사람이 우리나라 전시회에 와서 그런 식으로 입장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지금 든다.


우리도 해당국 주재 코트라 지사의 도움을 받아 동유럽 국가 전시회에 부스를 열고 몇 번 참가했다. 전시회는 엄청난 입장 인파에 비하면 상업적인 효과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지역의 사업을 현지 딜러한테만 의존하는 위험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전시회 운영은 독일에서 매년 해봐서 어려운 점은 없었는데 기념품이 문제였다. 전시회 때마다 방문객들한테 볼펜이나 메모지 같은 기념품을 나누어 줬는데 독일에서는 안내 책상에 쌓아 놓아도 싸구려 볼펜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 불가리아 소피아는 상황이 달랐다. 현지 전문가가 기념품을 전시장에 비치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충고하는 걸 귀담아듣지 않은 게 실책이었다. 우리 전시장으로 인파가 구름같이 몰린 이유는 볼펜을 받기 위해 섰다. 어떤 사람은 몇 번씩 줄을 서서 받아 갔는데 아까 주지 않았냐고 하면 자기 동생 갖다 준다고.. 급기야 몰리는 인파에 우리 전시 부스 가벽이 무너지고 나서야 상황이 끝났다.


거래처 고객들에게는 회사 로고를 새긴 손목시계를 선물했다. 고객사 당 한 개씩 줬는데 값싼 전자시계라 그 사람들이 집에 가서 애들한테 던져주는 정도였다. 전시회에서 상담하고 나서 고객사 직원 두 명 앞에 전자시계 하나를 내놓았다. 내 옆에 있던 동료가 귓속말로 옆엣 사람 눈을 보라고 한순간 나는 무서워서 전율했다. 그의 안광眼光이 시계를 철撤하기 전에 얼른 시계 한 개를 더 올려놓았다.




얄타 8일간의 외교 전쟁  세르히 플로히 저/허승철 역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낙후된 동유럽 국가들을 다니면서, 과연 무엇이 잘못되었나, 아니면 이 사람들 조상 탓인가 그것도 아니면 팔잔가 하는 생각을 했다. 흔히 유럽 주도 과학과 문화 발전에 대한 기여도를 지금 국력 기준으로 상상하는데 꼭 그런 건 아니다. 퀴리 부인을 프랑스의 물리학자로 부르는 건 반 고호를 프랑스 화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쇼팽만이 아니고 코페르니쿠스도 폴란드 태생이다. 폴란드는 2차 대전 패전국과 승전국 양쪽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기구한 역사의 희생국이다.


동독의 감옥에서 3명의 죄수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A: 나는 근무에 5분 지각했다고 감옥에 들어왔지. 태업이라고.
B: 나는 5분 일찍 왔다고 잡혀왔어. 스파이로 오인받아서.
C: 나는 정시에 왔다고 잡혀왔다네. 서독제 시계를 갖고 있는 게 틀림없다면서.

나무위키/동독과 서독을 각각 소련과 미국으로 대입해도 됨


1945년 초 2차 대전 전쟁 끝물 얄타 회담에서, 만일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스탈린에게 동유럽을 퍼주지 않았다면 하는 가정을, 역사에 가정은 없다는 말로 덮어야 할까? 가정은 꼬리를 문다. 만일 얄타가 아니고 회담을 서방 어딘가에서 했다면, 그래서 만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몸 상태가 좀 좋았더라면, 그래서 다시 만일 미국이 어차피 원자탄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거면서 나약하게 소련한테 대 일본전 개입을 간청하지 않았다면..


동구권의 개방 초기엔 경제적으로 혼란이 심해서 예전 공산권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나와 가까운 거래처 대표도 그랬는데 걸핏하면 '빌어먹을 미국 자본주의 ( god demned...)'라면서 투덜거렸다. 그런데 그 사람하고 말싸움이 붙으면 내가 불리하다(지금도). 인간의 본성과 대척점에 있는 사상을 정당화하려고 그러는지 이론이 탄탄하다.






내가 자주 타던 네덜란드 국적기 KLM은 어떤 때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대한항공과 같은 탑승구 ( satellite)를 썼다. 출장에서 돌아오면서 파리 공항에서 KLM을 갈아탈 때 옆 게이트에 대한항공이 서 있으면 미친 척하고 그리로 들어갈까 하는 유혹을 느꼈다, 비행기 색깔도 비슷하다. 집에 가야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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