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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Dec 11. 2020

오나 가나 말이 안 통하는 사람

해외 주재원 이야기 


수년 전에 친구들과 미국 서북부에 캠핑 여행을 갔다. 가면서 친구들과 운전, 장비 등 일을 분담했는데 영어가 제일 불편한 친구가 여행경비를 맡은 이유는 ( 돈 버는 건 몰라도 ) 돈을 쓰는 데는 말이 별로 필요 없기 때문이었다. 주유소나 시장에 가서 카드가 아니고 돈을 내더라도 줄 거 주고 거슬러 받으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응용문제가 나오면 좀 복잡해진다.


미국 시골 주유소는 선불을 받는데 여유 있게 줘 놓고 기름을 가득 채운 다음 거슬러 받는다. 20짜리 지폐를 맡겼는데 기름값이 12.5 가 나왔다고 치자. 그 사람들은 빼기가 아니고 채워가는 방식으로 거스름돈을 계산한다.  0.5로 일단 13을 만들고 거기다 1씩 더하면서 14, 15.. 해서 20에 이른다. 거스름 동전을 피하려고 0.25짜리 동전 두 개를 더 던져주면 이 장면에서 멘붕이 오는 점원이 있다. 여기서 약간의 말이 필요해진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답답해하는 이가 있는데 그럴 것 없다. 계산 방법이 다를 뿐이고 쌍방이 동시에 거스름돈을 확인하는 이점은 있다.



해외에서 살면서 겪는 문제의 하나는 언어다.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소통하는 자체가 부담이다. 하지만 주유소에서 돈 계산하거나 이발소 가서 머리 깎으며 주고받는 평화시의 대화는 대충 넘어간다. ( 머리를 조금만 깎으라고 했는데 전달이 잘못되어서 조금만 남기고 다 깎아버리는 참사는 제외하고) 이해가 엇갈리는 사안을 가지고 다투는 전시戰時 상황에서 고뇌가 시작한다. 상대방이 억지를 부리거나 불이익을 강요하는 주장을 할 때 즉각적인 반격이 필요한데, 짧은 순간에 반격 논리를 구상해서 그걸 외국어로 옮기는 일이 버겁다. 물론 외국어에 능숙한 사람은 생각도 외국어로 한다고 하지만, 내게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핸디캡을 가진 불리한 싸움이 되었다.


거액이 걸려있는 건을 가지고 거래처와 붙는 논쟁은 긴장은 되도 대화의 현장이 해외냐 홈그라운드냐의 차이는 크지 않다. 그리고 비즈니스에서는 전략이 중요한 만큼 상대적으로 말의 비중은 덜하다. 곤혹한 상황을 임기응변으로 모면하는 기술이 빛날 때가 있기는 하다. 그래도 상대의 화법을 잘 알고 있는 선수들끼리는 상담 내용에 비해 소통하는 언어의 유창함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경험이 없는 해외 생활형 문제에 부딪히면 난감해진다.


전화 상으로 낯선 이와 말하는 경우엔 전화 음질이 '생방송'보다 떨어지므로 듣는 수고까지 더해진다. 교민 가정의 자녀들이 교민 1세 부모의 전화 소통에 큰 도움을 준다고 들었다. 브런치 insaengwriting 작가님이 올린 '호주 집에 전기와 전화 연결하기'는 매우 실감 난다. 그래도 그 작가님의 경우는 상대방이 도와주기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전화 대화에 응해 주어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개인이 전화로 기업과 다투는 경우 상황이 최악에 다다른다. 전문적인 콜센터가 영어가 서투른 고객한테 일부러 말을 빨리한다거나 무례하게 굴면서 힘을 빼기도 한다.


언젠가 아이가 미국 주립공원에서 불개미에 물려 온몸이 붓는 응급상황이 되었다( 아이한테 알러지가 있다.). 911 ( 우리 119에 해당 )을 부른 지 5분도 안되어서 그 시설의 관계자가 나타나고 이어서 픽업트럭이 산소통을 싣고 와서 앰뷸런스 오기 전까지 응급조치를 해줄 때는 감동이었다. 아이는 앰뷸런스가 이동 중에 처치를 계속해서 병원 도착했을 때는 거의 다 나았다. 미국에서 병원 신세를 지면 두 번 놀란다. 높은 수준의 의료 서비스에 한번, 엄청난 치료비에 또 한 번. 그래서 의료보험료도 높다.


우리는 사보험에 들어 있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천오백 불 청구서가 날아들었다. 아이가 받은 초기 응급처치 중에 건강보험으로 안 되는 게 있으니 환자가 내야 한다는 거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럴 때 보험과 의료기관이 해결하는 데 미국에선 환자한테 연락한다.


청구서를 무시하니 독촉장이 왔다. 청구서에 적혀있는 콜센터에 전화해서 따지다 안되면 책임자 바꾸라고 하고, 다시 더 센 독촉장이 오는 악순환이 몇 달 계속되었다. 급기야 신용 불량자로 만들겠다는 빨간색이 들어간 '협박장'을 받았다. 이런 일에 이골이 나 있을 콜센터를 상대로 경험도 없고 말도 서투른 내가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이 되어서 할 수 없이 책임자 앞으로 편지를 썼다. 나는 이런 보험 규정을 몰랐다는 것, 당신 같으면 애가 호흡을 못하는 응급상황에서 보험 가지고 따졌겠냐, 한국에서는 이런 경우 병원과 보험사가 해결한다는 것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문제를 전문가와 상의하겠다는 내용 증명을 보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보험사에서 충분히 이해했고 청구를 취소한다는 회신이 왔다.


안 되면 이렇게라도 가까스로 해결한 사례가 있지만 말 때문에 겪는 사소하나마 불편, 황당한 일은 많다. 텍사스에 근무할 때 점심으로 가끔 맥도널드 같은 걸 사다 먹었다. 자동차 타고 ( 드라이브 스루 ) 주문해서 사무실에 와서 보면 봉지 속에 오인분이 들어 있는 적이 몇 번 있었다. 자동차에서 주문할 때 메뉴 번호를 불러주고 나서 추가로 매운맛으로 해달라든지, 뭘 빼 달라고 하면서 일 인분이 오인분으로 늘어나는 기적이 발생한다. 카드는 보지도 않고 사인하고. 그럴 때마다 나는 주문받은 맥도널드의 어린 아르바이트생을 저주했다. 쟤네들 수준이 떨어져서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그러면서 귀국하고 싶은 세 가지 이유 중에 '말 잘 통하는 ( 아 하기도 전에  하는 ) 내 나라'가 들어갔다. 나머지 두 이유는 포장마차, 그리고 추석 무렵의 햇빛이었다. 하지만 정작 귀국해서 이제까지 실현된 건 그중에 추석밖에 없다.




귀국해서 들어간 새 직장에서 동료들은 내가 웃기려고 한 말에는 심각해졌고, 엉뚱한 데서 웃었다.

그 동료들은 내가 외국에서 오래 생활해서 말이 잘 안 통한다고 수군거렸다.


요즘 코로나로 커피점에 앉아 얘기할 수가 없어 대안으로 친구들과 맥도널드에 갔다. 근데 나는 거기서 점원이 하는 말의 삼분의 일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생소한 용어와 어법, 억양 그리고 콧소리를 많이 사용하는 괴상한 발성까지, 그들은 내게 외국사람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오나가나 세계적으로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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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집에 전기와 전화 연결하기              

호주에서 29년 살며 | 불타는 얼굴 29년 전 호주에 도착하고 5일 만에 생긴 일이었다. 공중전화 수화기를 잡은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상대편이 알아듣지 못해 여러 번 발음을 하다 보니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졌다. 어떻게 발음을 해야 이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 결국에 떠오른 마지막 노선이 있었다. 스펠링을 하나나하 일일이 다 말해 주었고 결국에는 상대편이 알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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