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연속극에서 애인과 헤어진 여자 주인공은 꼭 파리로 유학 간다. 가난한 색시와 사귀는 회장 아들은 뉴욕 지사로 발령 내 버린다. 바로 그다음 주에 떠난다. 겁나게 빠르다. 나는 자연 휴양림 캠핑 2박 하는데도 한 달 전에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카드 결제까지 끝내야 되는데.
한국에서 실연당한 체험이 프랑스 대학 입학에 핵심 스펙이 되고, 대기업 회장 아들은 까다로운 미국 주재원 비자 E1, L1을 스마트폰 앱에서 즉시 다운로드하는 건지 궁금하다. 정치인들도 낙마하면 미국 대학의 무슨 연구소로 내 빼던데 그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우리나라 정치가 그만큼 연구 대상이기는 하다.
그리고 한국 기업의 미국 본부는 뉴욕보다는 대개 뉴저지에 있다. 맨해튼이 건너다 보이는 뉴저지 쪽 허드슨강 변에 ㅅ사, ㅇ사 등이 모여 있다. 뉴저지에서 어느 해 9월 11일 아침 회사에 출근해 있는데, 경비행기 한 대가 맨해튼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부딪혔단다. 요새 애들 말로 '헐' 했다. 잠시 후에 강 건너에서 꺼먼 연기가 솟는 게 보였다. 뉴저지에서 맨해튼 들어가는 조지 워싱턴 다리를 막으면서 이게 강 건너 불 정도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유럽에서 들어온 후 1년 반 정도 있다가 미국 뉴저지 법인으로 발령이 났다. 우리 본부 제품의 미국 사업이 부진해서 유럽 사례를 재현해보자는 전략이었다. 주재원들은 현지 부임할 때 일단 단신으로 가서 한두 달 자리를 잡은 후에 식구를 부른다. 그동안 업무 파악을 하면서 살 집을 구하고 길을 익힌다.
뉴저지 거리는 오래돼서 그런지 도로가 지저분하고 멋대로다. 지도로 도상 연습을 하고 나가도 여차하면 낭패를 본다. 유턴 한 번 하는 데도 신호등 있는 골목을 몇 번 돌아야 한다. 머릿속에 북극성이 없는 나는 돌다가 방향을 잃는다. 그러다 보면 살벌한 슬럼가에 들어와 있다. 정말 돌아버린다. 시간이 없다는 고객사에 겨우 사정해서 잡은 미팅인데 엉뚱한 길 한가운데서 약속 시간이 넘어가면 입이 마른다.
사람에게는 한 번 갔던 곳을 찾아가는 공간 기억력, 지도를 보고 방향을 잡는 공간 지각 능력이 있는데 대개 여자는 전자, 남자는 후자가 발달했다고들 한다. 나는 불행하게도 둘 다 허약하다. 거기다가 운전하는데 옆에 부담 가는 사람이 앉아서 미주알고주알 따지면 뻔한 길도 놓친다.
네덜란드 있을 때 본사에서 출장 온 중역 일행을 태우고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내려가는데 눈에 보이는 대로 물어본다. 앞에 가는 저 차는 몇 년도 식이냐, 독일에서는 공항을 뭐라고 부르냐 등등. 이런 사람일수록 조금만 옆 길로 새도 귀신같이 알아챈다. 시내까지는 무난하게 들어왔다. 우리 법인의 생살여탈권을 가진 중역이 나보고 제법 운전 좀 한다고 칭찬하는 순간 나는 호텔로 진입하는 골목을 놓쳐버렸다. 그 후부터는 기억하기 싫은 악몽이다.
현지에서 길을 안내하다 억울하게 무능한 직원으로 찍히는 주재원이 있다. 그래서 약은 친구들은 높은 사람을 모실 때 미리 예행연습해두는 건 물론이고 여차하면 불법 유턴이나 장애인 주차 같은 위반도 거리 낌 없이 해치운다. 그래도 안되면 차를 아무 데나 버리고 택시를 불러 기사에게 목적지 주소를 준다. 이런 사람들이 빠릿빠릿하고 유능하다고 평가받는다.
주재원은 회사에서 이사비, 집세, 교육비 따위를 지원해 주므로 현지 직원에 비해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그런 비싼 자원을 운전기사로 쓰고 길 찾는 걸로 능력을 평가하니 얼마나 미련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전을 편안히 모신 공로로 출세하는 사례는 회사원 말고도 많다. 지근거리에서 시중을 들어준 인연 하나로 평생의 정치적 동반자가 되는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보고 있다. 우리나라 정치가 말초적 수준에 머무는 이유다.
지사에 도착한 날부터 매일 밤거리에 나가 길을 익히는 독종도 가끔 있다. 한 삼 개월 정도 헤매면 근무지의 지리는 대략 알게 된다. 지도를 연구하고 직접 다녀보고 해서 감을 잡는데, 내게 강남하고 맨해튼은 예외다. 모두들 두 군데가 '격자형으로 되어 있어서 누구든 길을 잃을 수가 없다'라고 큰소리치는 통에 오히려 연구 의욕을 잃어버렸다. 어차피 내가 업무차 갈 일이 없는 구역들이다.
맨해튼은 주차비가 비싸서 JFK 공항 갈 때 거쳐가긴 해도 가급적 그 안에서 차 타고 돌아다니지는 않는다. 다만 맨해튼에서는 한국식으로 끼어들고 빵빵거리는게 보통이라, 운전할 때 미국에서 유일하게 맘이 편안해지는 동네이기는 하다.
뉴저지 지사에 도착 후 한두 달 있다 식구들이 왔다. 밤 비행기로 뉴왁 Newark ( 뉴욕 공항이 아닌) 공항에 내렸다. 빨리 가면 집까지 30분이면 가는 거리인데 길이 만만치 않다 ( 내게는 ). 공항에서 빠져나오면 한국의 모 타이어 회사 광고탑 근처에서 갑자기 갈림길이 네댓 개 튀어나오는 데 헷갈린다. 그 날밤도 식구 태우고 두리번거리다 길을 잘 못 들어서 결국 10분 만에 공항으로 되돌아왔다. 집사람 하는 말이 미국은 공항도 크구나, 아직도 공항이네. 지금까지도 그런 줄 알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수시로 길을 잃는다.
길을 못 찾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길이 내 등 뒤에만 있을 때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서
조백헌이 주례를 준비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거기서 길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