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주재원이 집 구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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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 살 때 기준은 만족도와 구매력이다. 그리고 연비 같은 유지 비용도 조금 감안한다. 개인 취향에 따라 가지각색인 만족도가 자신의 경제력과 타협하는 선에서 구매가 결정된다.
집을 구할 때는 좀 복잡해진다. 만족도와 구매력 외에 투자 가치가 개입된다. 오늘의 만족도와 미래의 재산가치 중에서 어느 쪽에 무게를 두냐에 따라 사는 집이 달라진다. 재산 가치는 나보다 시장이 결정하므로 나의 주관적인 만족도는 뒤로 물러선다.
재산 증식 수단 위주로 살 집을 선택할 때, 미래의 이익을 위하여 오늘의 불편을 감수한다. 욕심내면 구매 능력을 초과해서 무리를 하기도 한다. 집과 주거 환경은 행복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안정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유보하는 현실은 부동산이라는 한정판의 가치 또는 그런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지금 부동산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럽다.
뉴저지에 와서 집 구하기 전까지 임시로 West Paterson에 몇 주일 살았다. Paterson 은 흑인이 모여 사는 지역이라서 주위에서 걱정들을 많이 해주었다. 사실 W. Paterson은 Paterson과 I-80번 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고, 집 마당으로 사슴이 걸어 들어오는 쾌적한 산 동네였다. 교민들은 흑인 동네에서 가게를 열고 영업을 할 망정 사는 건 백인 동네다. 애들 학교와 치안 때문에 그렇기는 하지만 흑인들 입장에서는 섭섭할 수 있다.
주재원이 집을 구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오늘 살고 살고 싶은 집이다. 어차피 몇 년 살다 돌아가는 데 미래 가치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회사에서 지원하는 월세 한도 안에서 각자의 취향대로 고른다. 우리는 애들이 어려서 학군도 관계가 없었다. 원하는 조건에 집중할 수 있는 배짱이 생긴다.
미국인 동료 B의 복덕방 하는 친구가 집을 몇 군데 보여주는데 그중 하나가 ( 내 ) 눈에 쏙 들어왔다. 중앙에 나선형 계단이 있는 이층 집인데 훌륭하다. 돌아다닐 시간도 없는데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집은 집사람이 최종 결정한다. 계약은 꼭 할 거니까 식구 올 때까지 2주일만 잡아 달라고 B의 친구에게 부탁했다. 칭찬받을 준비를 단단히 하고 식구들 오기만 기다렸다.
나중에 와서 그 집을 휙 둘러본 집사람이 상황 정리하는 데는 오분도 안 걸렸다. 실내가 어둡고, 실용적이지 않고, 애한테 계단이 위험하고.... 탈락.
그전에 네덜란드에서 근무할 때 드디어 한국 본사에서 동료 한 사람이 합류하게 되었다. 살 집을 미리 물색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복덕방을 통해 꽤 괜찮은 집을 하나 찾았다. 당시 드물게 바닥 난방이 되는 아담한 전원주택이었다. 하도 맘에 들어 이 집이다 싶어 찜해놓고 매일 그 집 앞을 거쳐서 출근했다. 그러다가 그 집 근처에서 교통사고까지 났다. 내 차의 측면을 박은 경찰 순찰자가 도랑에 처박혔다 ( 경찰차 과실로 결론짓는 데 2 년 걸림 ). 나중에 와서 그 집을 본 동료 부부는 다른 집을 택했다. 편리하지 않다는 이유. 집을 보는 안목이 나와 달랐다. 나의 안목은 외롭다.
아예 한국인 부동산 업체를 집사람한테 소개하고 나는 손을 뗐다. 한국인 상가 근처 짜장면 배달이 된다는( 한 번도 배달 안 시켰음) 동네, 벽난로가 있는 집으로 정했다. 장고 끝에 악수. 그 벽난로가 사고 쳤다.
난로가 얕아서 인공 연료만 태우게 되어 있었다. 불을 붙였다가 나갈 일이 생겨 끄는데 안 꺼진다. 물을 부었더니 불에 기름 부은 격이었다. 연막탄처럼 집안에 연기가 자욱하게 퍼지고 화재경보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경보가 점점 높고 세지는데 정신이 없었다. 911( 119)이 와서야 사태가 해결됐다. 결국 불이 아니라 경보 끄려고 소방서를 부른 셈이다.
소방차가 3 대는 온 듯했다. 생전 처음 그것도 객지에서 부른 소방차 비용이 얼마나 나올지 걱정됐다. 교민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911 비용은 기본요금 2000불에다 출동한 소방차의 바퀴 하나에 100 불 씩 추가로 올라간단다. 소방차 뒤 바퀴가 2 열에다 한 짝에 타이어가 두 개씩 달려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얼추 계산해도 차 한대당 천 불, 기본 포함 오천 불이다. 연기만 난 건데 좀 버텨 볼 걸 그랬나 후회가 되었다.
친구는 그 농담을 믿는 나를 보고 도리어 놀랐다고 놀렸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119 출동은 무료다. 다만 방화나 실화는 벌금을 물린다. 미국엔 일 년에 한두 번 소방대원들이 소방차를 타고 마을을 행진하는데 나중에 커서 소방대원이 되겠다는 아이들을 설레게 한다.
그다음에 이태리계 주민들이 많이 산다는 Ridgefield Park 조용한 주택가의 이층 별채 (duplex house)로 집을 옮겼다. 사람 좋은 집주인 토니가 아래층에 살았다. 그 집에서 둘째도 낳고 자리 좀 잡으니까 텍사스로 이동하게 되었다. 계약을 중도 해약하면 남은 기간 월세를 다 물어내야 한다. 뉴저지에서는 군인들처럼 공무로 주거를 옮기는 거 외에는 좀처럼 면책 (diplomatic clause)을 인정하지 않는다.
휴스턴으로 이사 가게 되었다고 하니 토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며 무슨 그런 회사가 다 있냐고 분개한다 (아니 내가 저지른 일인데...). 아오지 탄광으로 유배나 가는 듯이 위로받으면서 집 계약 잔여기간 건은 자동으로 해결되었다. 토니 말고도 동부 사람들의 공통적인 질문이 휴스턴은 에어컨 없는 시절엔 어떻게 살았냐는 거였다( 왜 나한테 물어?). 미국엔 의외로 다른 지역에 안 가본 사람들이 꽤 있다. 산호세 사람이 미국 동부는 어떤 곳인지 궁금해한다. 재미있는 건 휴스턴 가니까 거기 사람들이 하는 말, 사람들 성질머리 급하고 날씨 을씨년스러운 동부에선 살라고 해도 못 산다는 것.
사람이 다 그렇지만 특히 미국 사람들은 자기 사는 데가 제일 좋고 자기중심적이다. 지네들이 축구 잘 모른다고 월드컵 Wolrd Cup을 변두리 월드컵 Rest of the World Cup 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휴스턴으로 이사 가기 전 주일에 집사람은 혼자서 맨해튼 일일 관광버스를 탔다, 그동안 내가 안 데리고 나간 걸 원망하면서. 분당 사는 아줌마가 전라도 광주로 이사 가기 전에 혼자 서울로 관광하러 간 셈이다.
우리 식구는 귀국해서 이제까지 십여 년 주재원 식 기준으로 구한 집들에서 살고 있다.
'오늘 살고 싶은 집이 우선이고, 미래 가치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집을 빌려 살면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쫓겨나도 도리어 기회가 된다. 운이 좋았는지 모르지만 원칙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니까 큰 불편이 없었다.
지금 사는 집은 우리 소유지만 우선 순위 원칙에 따르다가 우연히 획득 방식을 그렇게 선택했을 뿐이다.
집을 '얻는다' 라는 동사를 쓴다. 집을 사면서도 '빌린다' 또는 '거저 주는 것을 받는다'는 뜻인 '얻었다'라고 하는 이유는 영원한 내 집은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책을 빌려서 읽은 사람과, 책을 사서 안 읽은 사람 중에 책의 진정한 소유자는 누구일까?
한 세상 살다 가는 거, 주재원 조금 길게 하다 돌아가는 거라고 하면 너무 썰렁한 비유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