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소득 6천 불 때 네덜란드 주재원
혼자 자취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애로사항 중에 '나올 때 부엌에 오븐 껐는지 도무지 기억 안 남'이 있다. 네덜란드에서 혼자 살 때도 습관적으로 불단속을 잘하고 다녔지만 기억이 안 날 땐 집에 물어볼 사람도 없고 불안했다. 다행히 나는 사무실이 지근거리라 가보면 되지만, 그게 모스크바 출장 가는 비행기 속에서 생각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비행기로 모스크바까지 세 시간이 넘는 데다 도착하면 시차 두 시간을 감안해도 밤중이다. 동료에게 가보라고 부탁하기도 뭐 하다.
괜찮겠지 하다가도, 실화범이 되어 De Telegraaf (네덜란드 일간지)에 보도되고 그다음 날 한국 신문에도 긴급 뉴스로 실리는 악몽이 시작된다. '이 시국에 모 그룹 주재원, 해외에서 만취해 방화 후 소련으로 망명, 외교 문제로 비화' 헤드라인이 머릿속에서 막 타이핑되면서 공황상태가 된다. 집 열쇠를 가지고 있고 공동 이해 당사자인 집주인 아줌마한테 부탁을 하면 되는데, (나중에 집사람이 와서 관계가 정상화되기 전까진) 사이가 안 좋아서 아쉬운 소리를 하기 싫었다. 내가 주차하다 화단을 망가뜨렸다거나, 날 찾아온 인간들이 차를 아무 데나 세웠다는 둥 못 마땅해했다.
이웃에 사는 일본인 학교 선생님인 다카시 씨가 그나마 도움이 되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되는지는 모르겠다. 우선 그 양반한테 연락해서 내 배 집(boathouse)의 거실 창문으로 부엌의 오븐 상태를 확인하게 하고 만일 이상이 있으면 주인아줌마를 소환하는 전략이었다. 이 문제는 결혼 후에도 계속된다. 한참 지난 후 텍사스에 살 때 거실에 백열등(촉수가 높아 계속 켜놓으면 위험) 스탠드를 켜놓고 온 걸 식구들이 시애틀에 도착해서 생각이 난 적도 있다. 인천에서 라오스 가는 거리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된 이듬해 보리스 옐친이 정권을 잡고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자, 고삐 풀린 동유럽 국가들이 도미노식으로 시장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사업으로서는 기회인데 통신이 부실하여 현지 출장이 시장 개척에 필수였다.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구 동독 같은 동유럽 나라들과 구 소련의 유크레인, 러시아 지역을 내가 직접 맡아 영업하면서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현지에 도착해서 고객사로 이동할 때는 택시를 이용했다. 거래처에서 태워주기도 했지만, 같은 지역에서 경쟁관계에 있을게 뻔한 다른 고객사를 찾아가기에 불편해서 사양했다. 공항이나 호텔이 아닌 시내에서 택시를 기다리다간 코피 터진다 ( 진짜 코피). 그 당시 동유럽 나라 자동차들이 값싼 저질 연료를 써서 그런지 길거리에 매연이 심해서 나는 부다페스트에 가는 첫날 코피가 나곤 했다.
체제가 바뀌는 과도기라 질서가 어지럽고 택시 요금도 대중이 없었다. 나라마다 다른 통화를 현금으로 바꾸어 가지고 다니느라 헷갈리는 판에, 말도 안 통하는 택시 운전수와 요금 가지고 시비하다 보면 진이 빠져 되레 고객사에 가서 ( 뭐 이런 나라가 다 있냐는 듯이 ) 심통을 부리기도 했다. 특히 폴란드가 그랬는데 모든 게 바뀌는 때라 그랬는지 택시 미터기가 제각각이었다. 미터 요금에 300을 곱하기하고 1000을 곱하기도 하는데 종잡을 수 없어 손님을 골탕 먹이기 딱 좋았다. 그래도 스탬프까지 쾅 찍어가며 영수증을 발행해 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다음부터 우리나라 택시가 영수증을 끊어주기 시작한다.
이러니까 택시만 타면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실수도 있었다. 하루는 체코슬로바키아 (슬로바키아가 분리되기 전)의 파르두비체 시에 있는 거래처를 당일치기로 방문하게 되었다. 프라하에서 차로 두 시간 걸리는 경마로 유명한 도시다. 공항에서 택시 운전수와 수첩에다 액수를 적어가며 왕복 요금의 흥정을 마쳤다.
일을 마치고 공항으로 돌아와서 합의한 택시 요금을 주니 그 두 배를 달라고 한다. 공항에서 떠날 때 요금 갖고 얘기한 수첩을 흔들어 보이며 다그치니 그건 편도 요금이란다. 한물간 바가지 수법인데 선수끼리 그러지 말자고 달래도 자기는 그런 짓 하는 젊은 모리배 (gang)가 아니라고 가슴을 치며 우긴다. 오십 대 중반 정도의 중년이었다. 주기로 했던 요금만 택시 안에 던져주고 비행기를 탔다.
그 후에 거기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운전수 얘기한 금액이 맞는다는 거 아닌가? 프라하에 있는 거래처한테 수첩을 보여주자 거기에 편도라고 표시한 거 같단다. 아뿔싸. 국민학교 때 학교에서 집으로 보내주는 통지표마다 어느 구석엔가에 '경솔하다'가 있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데 그 버릇 고치려면 아직 수십 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 후 프라하 공항에 내릴 때마다 택시 운전수들을 유심히 봤는데 그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다.
보리스 옐친이 충격요법을 써가며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통에 90년대 초 IMF의 최대 채무국이었던 러시아의 경제는 혼란스러웠다. 물자가 귀해 말보로 담배나 스타킹이 최고로 환영받는 선물이었다.
택시요금도 들쭉날쭉이라 아예 러시아어 숫자를 외워서 다녔다. (정확한 금액 단위는 기억을 못 하는데) 한 번은 요금이 끽해야 예를 들어 10 정도 나올만한 거리를 택시로 가면서 속으로 20까지는 참고 양보하기로 작정했다. 도착해서 얼마 주랴하니 운전수가 오른손 날手刀로 자기 왼 손바닥을 가른다. 50을 달하는 거다. 나의 관대한 상한선인 20을 두 배나 넘어가는 횡포에 화를 못 참고 너 그럴 줄 알았다 하며 '폴리스'를 선언했다. 경찰한테 가자는 얘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사람은 50 이 아니라 5를 부른 것이었다. 한심했다.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화가 복받치며 눈물이 핑 돌았다. 나 자신한테, 그리고 톨스토이, 라흐마니노프의 멀쩡한 후손들을 이렇게 만든 그 망할 자식들한테 갖은 욕을 퍼부었다. 멀리서 앰뷸런스인지 경찰차 인지에서 나는 사이렌 소리가 심야에 배경음악처럼 흐르고 있었다.
바르샤바 시내에서는 택시비 시비가 싫어서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버스 요금은 안 낸 게 아니라 못 냈다. 만원 버스에서 요금 내는 방법도 몰랐고 어차피 사회주의 끝물이라 공공요금은 얼마 안 되었을 터였다. 지방에 갈 때도 기차를 탔다. 밤중에 반대 방향 열차를 타고 그다니스크 ( 바웬사 대통령이 조선소 노조 위원장 하던 그 도시 ) 쪽으로 한참 가다 중간에 내려 돌아온 적도 있다. 이게 와전돼서 내가 출장비를 아끼려고 동유럽에서 버스 타고 다닌다고 '미담'으로 소문이 났다. 아니라고 해도 굳어져 버렸다. 에효..
사실 동유럽의 택시비는 그때 당시 서유럽의 버스 요금 수준이었다. 액수보다 속는 게 싫어서 바득바득 따진 거였는데 어리석고 위험한 행동이었다고 생각된다. 짧은 선입견을 가지고 일부 선량한 택시 기사를 협잡꾼으로 몰면서 내가 갑질을 한 셈이다. 독일이나 스웨덴 같은 부자 나라 가서는 몇 배 되는 택시비를 척척 잘도 내면서도, 경제적으로 좀 늦은 나라에서는 얼마 안 되는 거 가지고 까다롬을 핀 태도는 나의 오만함에서 비롯한 차별이고 까불음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버릇이 남아서 요새도 상하이 공항에 내려서 택시 타고 호텔에 도착하면 우선 거기 도어맨한테 바가지 여부를 감정받고 요금을 내준다. 80 이 되면 고쳐질까. 우리 속담이 기가 막히다.